EP.163 8장 - 서은하(4)
물론 정말로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으면 치명상이 될 수도 있었으니 그렇게 하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겉보기에는 그렇게 보이도록 의도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일정 이상 상처가 커지지 않도록 내부에서 막아 놓았으니까.
하지만 은하가 느끼기에는 정말 심각한 상태였을 것이다.
"에? 아, 아아...."
나는 일부러 내 몸을 치료하지 않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은하를 바라보았다.
덜덜 떨리는 은하의 손이 애처롭게 떨렸고,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치던 은하가 바닥에 자빠진다.
나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찔렀다는 사실이 가져온 충격이 꽤나 큰 모양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아...!"
은하의 입에서 발악과도 같은 비명이 쏟아져 나온다.
나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찍어눌렀다.
지금 은하에게는 고통스럽더라도 이 상황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고찰할 시간과 사건이 필요했다.
그녀는 바닥을 기어가듯 뒤로 도망치다가, 결국은 등을 가로막는 벽에 가로막혔다.
그리고는 지금 상황에서 도망치려는 듯, 던전의 다음 공간으로 뛰어 들어갔다.
진짜 멘탈이 많이 깨진 모양이네.
"후,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은하의 특성을 '미러링'한 회복 능력을 사용하자, 방금 찔렸던 상처는 원래부터 없었다는 듯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실제로 은하도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으니까 치료하지 않고 도망갔을 것이다.
내가 위험해서 놀랐다기보다는 나를 다치게 했다는 그 사실 자체에 멘탈이 박살 났을 테니까.
"이 던전에선 당연한 건데 말이야...."
그녀가 나를 자기 자신의 일부라고 인식하게 했으니.
당연히 자신 자체에 대해 이상한 감정을 가지게 하는 던전 특성상 내가 좀 찌르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날 수 있다.
심지어 아까부터 계속 깐죽거리면서 열받게 했으니까 이런 반응이 당연하지.
물론 은하는 평소에 이런 당연한 반응조차 하지 않던 녀석이니, 오히려 이런 반응을 해줘서 고마울 정도다.
은하를 따라서 다음 방으로 이동하자, 꽤 약해 보이는 잡몹들이 몰려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꽤 난이도 높던 중간 보스를 잡게 해놨으면서.
다음 몬스터는 갑자기 이런 약해빠진 녀석으로 등록해놓은 이유가 대체 뭐야?
"아, 저기 있네."
그리고 은하는 그 잡몹들이 뭉쳐있는 중앙에서 쓰러져 있었다.
아마 내가 제발 죽지 말라고 했던 것을 기억했는지, 몸이 위험해질 때마다 계속 치료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런 반격도 없이 주변의 잡몹들에게 얻어맞으면서 고통을 축적하고 있는 신개념 자해였다.
심지어 정말 위험하지 않으면 회복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박살나 있었다.
겨우 나한테 칼 한 번 휘둘렀다고, 그거로 저렇게 충격을 받아서 난리를 치고.
심지어 저리 고통받으면서도 나를 위해 삶을 이어가려는 모습을 보니, 내 심장에 못을 때려 박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은하야."
"......."
거의 반쯤 죽어가는 눈동자가 눈에 들어온다.
내가 불렀음에도, 기계적으로 자기 자신을 치료하기만 하면서 몬스터에게 몸을 던진다.
나는 이곳에 몰려 있던 몬스터에 날개를 쏟아부어 싹 처리하고 은하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지금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그녀의 어깨가 파르르 떨려왔다.
나를 보고 나서야 조금 정신이 든 모양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계속 깎아내리며 저주의 말을 쏟아냈다.
순간적으로 이 아이가 이렇게 될 때까지 몰아세운 나의 행동에 역겨움이 쏟아져 나올 뻔했지만.
결국 은하가 이걸 이겨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방금 후회한 기억을 지워버렸다.
하여튼 지금의 은하는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지만.
애초에 나는 은하가 이런 상황에 도달하기를 원하면서 일부러 지금까지 상황을 유도해왔다.
그래야만 애초에 내가 그녀에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으니까.
'어쩌면 이 던전의 특성을 교재처럼 이용했다고 봐야지.'
일단 처음에는 은하가 나를 자기 자신으로 여기는 마음을 강하게 만든다.
그리고 계속 내가 하는 행동을, 은하가 자기를 비하할 때 써먹을 만한 수준의 실수로 채웠다.
그럼 이제 그녀는 자신의 일부인 내가 계속해서 실수하고, 심지어 그걸 뉘우치지도 않는 모습에 분노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은하가 일종의 자해하는 느낌으로 나를 찔러버린 거고.
은하가 지금 자신이 했던 공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그게 너무 충격적인 행동이라서 나를 자신과 동일선상에 놓는 걸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은하는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문제가 있을 때만 혐오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나를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된 시점에서 분노의 대상은 오롯이 자신만을 향하기 시작해서 이해할 수가 없게 된 거지.
하여튼 이렇게 생각만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는 걸 체험 시켰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의미가 있는 상황이었다.
"은하야, 아까부터 계속 내가 미웠지?"
"아, 아니야. 절대로 자기야가 미울 리가...."
"정확히는 내가 너의 일부라고 생각하니까, 결국 자기혐오가 극에 달해서 나까지 미웠잖아."
"......."
그녀는 이걸 반박할 자신은 없는지, 뭔가 말하려다가도 입술을 꽉 닫으며 고개를 떨궜다.
애초에 내가 그렇게 느끼고 행동하길 원해서 그렇게 만든 건데.
저렇게 후회하고 미안해하는 걸 보니까 양심이 쿡쿡 찔린다.
그렇다고 후회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나라고 해서 무조건 밝은 부분만 있는 게 아니니까."
"하,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거지?"
끄덕.
딱 내가 원했던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렇게 진행이 되어야 은하를 설득할 수 있는 베이스가 마련이 되거든.
"은하야. 너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낮고, 타인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심하게 사랑하는 건. 절대로 네가 못나서가 아니야."
"아니야. 나는...."
"그냥 취향이지."
"...어?"
자, 생각해보자.
이 세상 모든 것이 네 취향이지만, 그중에서 유일하게 그 취향을 벗어난 것이 자기 자신이라면 어떨까.
그래서 모든 것이 아름답게 빛나지만 자기 자신은 빛나지 않게 느끼는 거라면?
"실제로 나는 은하 네가 반짝이고 아름답다고 생각해. 착각이라고 하지 말고, 내가 빛난다고 생각하면 내 의견도 좀 존중해주라."
"으, 응...."
"그래서 너는 나도 너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다 보니까 취향을 벗어난 거지. 그래서 혐오감을 느낀 거고."
꼭 내가 아니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그러한 대상이 될 수 있다.
뭐든 취향을 벗어난다면, 기존에 취향이라서 빛 때문에 가려진 추악함이 제대로 보이기 마련이거든.
자, 지금의 너라면 이 세상도 너와 다를 바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을 거야.
정말로 너 자신이 너무 컴컴하고 끔찍한 무언가라고 생각한다면.
이 세상 또한 겨우 너와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비슷하게 끔찍한 무언가로 생각할 수 있지.
즉, 까놓고 말해서 본질은 죄다 똑같은 것들이라는 소리야.
"다들 크게 다르지 않아. 은하 너도 결국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충분히 빛나는 사람일 뿐이야."
"내가, 빛나...?"
"취향의 문제라니까? 네 취향에는 맞지 않겠지만, 내 취향에는 정말 아름답게 빛나."
내 눈에는 나보다 네가 훨씬 환하게 빛나고 있어.
너는 너 자신에게 담겨있는 어둠에 분노를 터트리지만, 그 어둠 따위 네 눈이 부신 빛에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아.
이거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네가 말하는 너를 제외한 모든 것이 빛나는 것과 다르지 않잖아.
따라서 네가 보아온 빛도 너의 취향이라서 그렇지 결코 가짜는 아니야.
하지만 너무 취향에 눈이 멀어서 그들의 본질을 보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지.
가끔은 그 취향을 빼고, '너 자신이 그 행동을 했을 때'를 상상하면서 일반적인 가치를 판단할 필요는 있다고 봐.
반대로 네가 빛난다고 생각하는 네 취향의 다른 사람들을 보고.
네가 지금 하는 행동들이 일반적으로 빛나는 것인지를 유추할 수 있을 거야.
그 행동이 빛난다고 예상한다면, 아마 너는 충분히 잘하는 중인 거야.
후회할 필요가 없어.
"일반적인 가치?"
"뭐, 이건 그냥 네가 너무 너한테만 가혹한 잣대를 내미니까 말하는 거야."
"하지만...."
"자, 이제부터 그걸 설명해 줄게. 잘 들어봐."
은하는 내가 취향이라서 빛으로 느껴, 그래서 나를 곁에 두고 싶고 함께하고 싶어 하지.
반대로 나도 은하가 내 취향이라서 빛으로 느껴, 그래서 은하 너를 곁에 두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거고.
그런데 이건 결국 양쪽 다 원하는 것을 이루는 윈윈이잖아?
"그리고 원래 사람은 자기한테서 찾지 못하는 그 아름다움을 다른 것에서 찾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 법이거든."
"아?"
애초에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는 걸 강제로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사람은 남에게서 그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하고, 그 찾은 아름다움을 가지려 한다.
그게 바로 사랑이지.
"하여튼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는 게 사람이야."
"사랑...."
그런데 은하 네가 지금처럼 너에게만 가혹한 잣대를 내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본래의 아름다움을 오히려 잊어버리고 망가져 버리게 된다.
그럼 당연히 함께하고 있던 이들도 멀어져 갈 수밖에 없는 거고.
그래서 네 취향이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들이대는 잣대는 일반적인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남에게 들이대는 잣대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정말 1대1로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많은 것들과 관계되고 이어지며 살아간다.
그런데 은하 네가 취향이라는 이유로 그들에게만 너무 느슨한 잣대를 쥐여준다면, 다른 이들이 느끼기에는 그들이 빛을 잃어 망가졌다고 생각해 관계를 끊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소중한 관계가 모두 작살나서 부서지게 되겠지.
네가 느끼기에 빛나는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들에겐 일반적인 수준의 잣대가 필요하다는 소리다.
"응, 이해했어."
"사실 후자는 은하 너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고, 그렇게 행동하려고 했었지."
"그건...."
물론 나중에는 그것조차 자신이 묻어서 끔찍해질 수 있다며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멘탈이 좋은 시절의 서은하는 문제가 있는 빛들을 더 좋은 방향으로 끌어주려던 모습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이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한 잣대였다.
"망가지지만 않으면 너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 특히나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고."
"아...."
"나를 위해서라도 널 소중하게 대해줘. 그게 내 빛을 반짝이게 해주는 역할을 할 테니까."
솔직히 지금 나도 나에 대한 혐오감이 꽤 짙은 상태였다.
은하보다 훨씬 약한 수준이겠지만, 솔직히 그녀가 지금 이걸 말만 듣고 행하기엔 너무 힘들다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원래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실제 체감은 완전히 다르니까.
"아니면 이렇게 생각하자."
실제로 내가 이제까지 자기혐오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 않고 버틴 원동력이 하나 있었다.
물론 나는 다른 꼼수도 최대한 동원하긴 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효과가 있다는 건 검증이 되었으니까.
나는 무릎을 꿇고, 은하의 손등에 키스하며 말했다.
"나는 사실 이 던전을 주파하면서, 나 자신을 전혀 믿지 않고 네가 그렇듯이 좋지 않은 감정만 쌓여 있어."
"그, 그게 무슨 소리야?"
"하지만 말이야. 그런데도 괜찮은 건 분명 내 옆에 네가 있기 때문이야. 너의 빛에 의지해서 너를 따라 여기까지 왔기 때문이야."
너 자신에 무언가를 바랄 수 없다면, 그런 너를 믿고 따라가는 나를 믿고 따라와 줘.
네 행동이 나쁘지 않다는 걸 내가 증명할 테니, 내 행동이 나쁘지 않다는 걸 네가 증명해줘.
그럼 분명 서로를 믿고 사랑하기에 자신을 증명받는 선순환의 관계가 탄생할 수 있을 거야.
"그게 내가 원하는 우리의 관계고, 제대로 된 형태의 사랑이야."
"아...."
"사랑해, 은하야."
그 순간,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방울 하나가 보석처럼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