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2 8장 - 서은하(3)
"후회할만한 기억이라니, 『너무 무섭긔』"
아주 원론적으로 생각해서 인간이 후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후회할만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기억을 자극해서 자존감을 낮춰,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하는 상황은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는 것일까.
'간단하지.'
그냥 애초부터 그런 기억을 지워버리면 되는 것이다.
자기혐오를 늘어나게 하는 능력 자체를 방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런 능력을 당해도 버틸 수 있는 상태로 체질을 바꾸는 정도는 가능하다.
물론 이런다고 완벽하게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닌데다, 공략하는 동안 기억이 완전하지 않다는 단점까지 생기지만.
그래도 까놓고 말해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설아야 미안하다.'
혹시 몰라서 최대한 많은 양의 기억을 지우겠지만, 그중에서 독보적으로 많은 기억 삭제의 대상은 설아였다.
어린 설아를 구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이번에 설아가 쓰러진 것까지.
나에게는 설아에 대한 책임감과 후회가 가득했으니까.
솔직히 이 기억만 지워도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매우 심한 상태만 아니라면, 나는 이미 이 던전에서 어떤 식으로 마음가짐을 먹어야 버틸 수 있는지 공략을 알고 있었다.
내심 굉장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 아무래도 아무것도 모르고 부딪히는 것과 이렇게 정보를 알고 공략 빌드를 짜는 것에는 난이도 차이에 극심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워낙 옛날 던전이고 보고서가 완벽하게 있는 게 아니라서 세부적인 몬스터 공략까지 전부 남아 있는 건 아니지만....
'애초에 그게 중요한 던전은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대충 어떤 형태의 것들이 나오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면, 내 옆에서 아직도 자기 비하를 계속하고 있은 은하에 대한 건데.
사실 이번 공략에서 가장 문제가 되기도 하고,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 은하였다.
'대상 지정 불가가 진짜 사람 돌아버리게 하네.'
맹세를 증명할 때는 은하에게 내 특성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내 평범한 특성은 물론이고, 미러링을 사용해 우회한다고 해도 정신과 관련된 특성은 전부 실패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즉 은하의 기억은 나와 다르게 지울 수 없다는 소리다.
물론 애초부터 은하는 워낙 후회나 자기 비하, 자책 등이 패시브라서 그 기억을 지울 수 없을 가능성이 크긴 한데.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막혀있는 상황이라서 더 골치가 아팠다.
그럼 결국 은하는 이 던전의 특성을 그대로 껴안으면서 진행해야 한다는 소린데....
안 그래도 자책이 심한 은하가 이걸 직빵으로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뻔한 걸 넘어서 현재도 진행 중이었다.
"나, 나는...."
"괜찮아 은하야. 나 좀 봐봐."
"자, 기야?"
"그래, 내가 바로 네 자기야. 즉 나도 너야. 내가 빛난다고 했으니까, 너도 빛나는 사람이잖아. 자책할 필요 없다니까?"
"응...."
그렇다면 말 그대로 은하가 이런 지옥도에서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정상적인 마인드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애초에 이 던전이 선택된 이유조차 그걸 유도하는 것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채린이 때도 부모님 트라우마 이겨 내랍시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던전 던져주던 게 시스템이었잖아.
이번이라고 오죽하겠어?
"자, 이제 가자. 솔직히 우리 잘하고 있었어."
"아, 응...!"
역시 내가 예상했던 던전이 맞았는지, 생각보다 금방 내가 알고 있는 함정의 스타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을 처치하면 장치가 나타나는데, 이 장치를 양쪽에서 동시에 조작해야만 다음 문으로 넘어갈 수 있다.
실패하면 다시 리젠된 몬스터를 처리해야 하는 장치인데....
'존나 악독하지.'
방금 내가 설명한 것이 겉보기에 느껴지는 장치의 역할이고.
실제로는 처음에 등장한 것을 제외하면 정확하게 맞춰도 실패하도록 설정이 되어 있었다.
일부러 실패 경험을 맛보게 해서 멘탈을 흔들려는 함정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소통하다가 의심을 할 만한 부분인데.
이게 자기 비하로 뇌가 절여진 상태에서 당하면, 내가 실수해서 실패했다는 강박감이 쏟아져나오게 된다.
그럼 이제 공략조차 제대로 못 한다고 추가로 자기 비하가 밀려 나오게 되는 거지.
"여, 역시 나는 안돼. 내가 자꾸 실패해서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잖아. 미안해 자기야...."
"은하야...!?"
"윽!"
이후로 장치 조작에 실패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진 은하는 자해까지 하면서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진짜 이거 누가 생각한 함정인지는 몰라도 조합이 굉장히 악랄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은하를 치료해준 뒤에, 꽉 껴안아 주면서 다시 설득하기 시작했다.
"은하야.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는 하나야. 네가 만약 잘못했다고 느끼면 나도 잘못한 거고, 내가 잘했다고 생각하면 너도 잘한 거야."
"아...."
"나 좀 봐봐. 내가 엄청나게 공략을 망치는 걸로 보여?"
"아니...."
"그럼 너도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는 거야. 우리는 둘이서 하나야. 같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너 때문에 공략이 문제가 생긴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마."
"응."
일단 여기까지는 예상 범위로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간단한 대화로 풀리는 것 자체가 상황이 심각하지 않다는 소리였다.
이 미친 던전이 그렇게 간단했으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을 리 없다.
이번에는 조금 난이도가 올라서 타이밍만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난이도를 가진 퍼즐을 풀어서 진행해야 하는 곳이었다.
이제까지는 거짓말로 엿을 먹였다면, 이번에는 난이도를 서로 다르게 해서 의견이 엇갈리게 하는 걸 의도한 함정이다.
이러면 어려운 퍼즐에 당한 사람의 자책이 심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쉽든 어렵든 처음에 내가 할 건....'
나는 퍼즐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아무렇게나 조작해서 정답을 틀리게 입력했다.
은하는 패널을 조작하지도 못했을 테니, 은하도 내가 틀렸다고 확신할만한 상황이었다.
일단 가장 급한 리젠된 몬스터부터 처리하고, 은하는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고 시작했다.
"아, 간단한 문제 같아서 빨리 풀려다가 실수했나 봐. 아까도 계속 내가 실수했는지 실패해서 신경 쓰이던데.... 미안."
"지금 그게 미안하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야!?"
'됐다.'
딱 내가 원하던 반응이 튀어나왔고, 은하는 방금 그 말을 내뱉자마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경악에 물들었다.
자신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은혁에게 저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순간적으로는 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미워졌을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은하가 자책을 심하게 하고, 자신을 미워하면 할수록 그 감정은 나에 대한 것으로 전염된다.
왜냐면 은하는 지금 박은혁이라는 사람도 자기 자신으로 인식하고 있거든.
나는 이걸 위해서 아까부터 은하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유도해왔다.
"미, 미안. 내가 무슨 소리를.... 다 내가 잘못한 건데."
"은하야, 자꾸 그렇게 너만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마. 방금은 내가 잘못한 게 맞잖아. 굳이 따지자면 우리는 하나니까 같이 잘못한 거지."
"같이...."
지금부터 내가 은하를 설득하는 말에서 최대한 논리를 비우고 반박하기 쉽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은하는 이 말을 의심하고 자책을 키워나갈 테니까.
물론 은하 자신의 자책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우리'에 대한 자책이다.
"뭐 그까짓 거 실패하면 어때. 다시 잡으면 되는 거고. 던전 공략 천천히 하면 뭐가 어때서. 별로 어렵지도 않은 것 같은데 편하게 가자. 응?"
"그, 그게.... 하지만 지금 우리는 시간이 부족하잖아. 한시라도 빨리 설아를...."
"설아? 여기서 갑자기 설아가 왜 나와?"
얘는 또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혹시 은하가 설아랑 무슨 약속이라도 있었는데 갑자기 들어온 건가?
그럼 괜히 오늘 자궁의 맹약을 맺자고 제안했었던 걸지도 모르겠네.
'아, 망할. 이거 자책의 일종이네.'
나는 급하게 방금 있었던 일의 기억을 지우면서, 은하에게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방금까지 내가 하고 있던 '우리'가 던전 공략을 잘하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다시 쏟아내기 시작했다.
은하는 지적하고 싶은 것이 많은지, 계속해서 태클을 걸려고 했지만....
"어, 생각해보니까 우리 여기서 나가면 마카롱이라도 먹으러 갈까? 근처에 카페 맛있는 곳 생겼다더라."
"그, 그게 아니라...."
굉장히 영양가가 없는 이야기로 말을 돌려버리면서 대화 자체를 끊어버렸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은하는 결국 내 말에 반박하는 것을 포기했다.
아마 이제부터는 은하의 안에서 '우리'에 대한 나쁜 감정이 커지기 시작할 터다.
"큭...!"
그리고 다음에 등장한 것은 다른 두 보스가 서로 연결되어서 동시에 쓰러트려야 하는 형태였다.
난이도도 서로 다르고, 심지어 맷집도 달라서 사망 타이밍을 맞추기가 굉장히 까다롭다.
그런데 하필 생긴 것까지 똑같아서 처음 경험하면 그냥 같은 보스라고만 생각한다.
괜히 중간 보스 네이밍이 붙은 것이 아니라는 듯, 굉장히 악랄한 형태였다.
심지어 초반 몇 번은 동시에 죽여도 살아나는 옵션까지 가지고 있어서 혼란을 가중한다.
사실상 앞에서 나오던 두 장치의 합쳐진 레벨이라 봐도 될 정도.
'확실히 좀 힘겹네.'
그리고 그 특성을 제외하고 보스 자체만 봐도 난이도가 꽤 높은 편이었다.
이걸 시발 몇 번이나 잡아야 하는 조건을 건 것부터가 토가 나오는데.
심지어 그게 실수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라고 착각하게 한다니.
진짜 엿같은 던전이야.
"헉, 헉...."
당연히 은하와 나는 이 보스를 처리하는 것에 엄청나게 애를 먹었다.
특히 은하가 저난이도 보스를 잡았다고는 해도, 은하는 애초에 전투 포지션이 아니라서 보스와의 1대1 전투를 이리 오래 하면 지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도 은하는 지금이라도 당장 자기를 비하하는 이야기를 꺼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내가 선빵칠 거거든?
"이야, 우리 완벽했다. 그치?"
"...뭐?"
"진짜 잘 하지 않았어? 물론 좀 횟수가 많긴 했지만, 솔직히 소통도 잘 안 되는데 체력 맞추는 게 쉽진 않잖아. 이 정도면 빨리 끝냈지. 우리 잘했는데?"
"...무슨 소리야. 조금이라도 더 늦었으면 마력 위험했잖아."
"죽지만 않았으면 잘한 거지. 우리 오늘 좀 빛나지 않아?"
은하가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반대의 말을 신뢰가 생기지 않는 정보만을 담아 쏟아낸다.
그녀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하는 말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거다.
빛나는 자신이었다고 생각한 '박은혁'이 사실은 빛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까지 이를 밀어붙인다.
물론 은하의 성격상 아무리 내가 이딴 말을 해도 굴하지 않고 빛난다고 지껄이는 것이 평소겠지만.
지금만큼은 던전이 자기 자신에 대한 네거티브한 감정을 잔뜩 밀어주고 있다.
그러니 갑자기 빛을 잃어 보이는 '자기'의 모습에 분노하기는 충분할 것이다.
박은혁이라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박은혁조차 역겨운 자신의 일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그것이 이제까지 은하가 나에게 느끼도록 유도해온 감정이었고.
지금에 도달해서야 그것이 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아니야. 우리 방금 이상했어. 위험했다니까?"
"에이, 무슨 소리야. 이대로면 던전 낙승이겠는데. 마력 좀 회복되면 가자. 금방 깨겠네."
"아니야, 아니야 서은하!"
비명을 꽥 지른 은하가, 발작하듯 방금까지 보스를 찌르던 검을 나에게 휘둘렀고.
나는 그 공격을 어떠한 반항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당연히 검을 휘두른 은하의 얼굴에는 경악이 서렸고.
그녀의 얼굴에 튄 붉은 피가 눈물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