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페미헌터-161화 (162/289)

EP.161 8장 - 서은하(2)

감았던 눈을 뜨자, 완전히 바뀐 세상이 눈에 들어온다.

감각만 생각하면 저번 설아 때보다는 채린이 때랑 비슷한 것 같은데.

[대상에게 남아 있는 비틀림을 바로잡아, 당신의 맹세를 증명하십시오.]

[공간의 비틀림: 대상의 트라우마를 통해 만들어진 던전에 대상과 함께 갇히게 됩니다. 대상을 데리고 던전을 클리어하십시오.]

"역시."

"어라, 여긴...."

채린이 때와 마찬가지로 던전을 클리어해야만 나갈 수 있는 공간의 비틀림이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시작부터 은하가 내 옆에 붙어 있다는 점이었다.

이 부분은 저번보다 훨씬 유리하긴 한데....

'가능하면 이번 던전도 저번처럼 실존 던전이 모티브면 좋겠는데.'

저번 던전이 난이도가 높은데도 어떻게든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은 관련된 정보를 내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난이도로 완전히 오리지널로 이루어진 던전이면 고생을 꽤나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몰라서 난이도가 높은 던전에 대한 데이터는 전부 새벽에 확인했었으니, 실존 던전을 모티브로 했다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던전?"

"어, 여길 클리어 해야 자궁의 맹약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거야."

이번에도 던전의 형태 자체는 미궁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시작 방부터 몬스터들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몬스터랑 조우할 확률이 좀 높아 보이는 곳이었다.

퍼즐보다는 그냥 사냥을 통해서 진행하는 곳이려나?

"아, 잠시만."

은하가 마력을 뿌려서 던전의 수준을 가늠하더니, 뭔가 이상한지 인상을 찌푸렸다.

바닥은 평범해 보이던 돌 주제에, S급 헌터의 공격을 받아도 끄떡없는 튼실함을 보여줬다.

그런데 정작 마력으로 인해 튕겨 나오는 반탄력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단단함을 보여주는 정도면 신화 던전이라고 봐야 하는데, 신화 던전이라고 해도 마력은 난이도에 맞춰 존재한다.

"던전에 마력이 깃든 건 없는 수준인데, 신화 던전의 특징을 가진 단단함이라...."

"엑스트라 난이도?"

이건 이것대로 골치가 아파지는 형태라서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엑스트라 난이도는 참가자의 스펙에 따라 던전의 수준이 올라가는 난이도였다.

신화 던전에만 가끔 등장하는 난이도 특징으로 유명하다.

난이도가 조절된다는 것이 듣기로는 배려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아무리 강해져도 던전이 요구하는 바를 달성하지 못하면 클리어할 수 없는 악질적인 점이 문제였다.

그래서 실제로 엑스트라 난이도의 던전은 S급 헌터도 해결하지 못해서 브레이크로 이어진 경우가 정말 많았다.

그리고 지금 우리야 우연히 S급이 들어왔으니까 알아차린 것이지, 원래라면 처음 던전을 발견한 이들이나 공략자들에 따라 가변하는 난이도 때문에 엄청난 혼란을 주기까지 한다.

심지어 평범한 신화 던전보다 던전의 형태가 더 자유분방해서 공략하기 어렵다는 연구 결과까지 있어서 이쪽 업계에서는 엄청난 골칫덩이 취급을 받는 존재였다.

따라서 엑스트라 난이도의 던전은 어지간하면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면서 진행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몬스터들의 수준도 예측보다 더 강해졌을 수 있기에, 우리는 정말 조심스럽게 전투를 진행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도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몬스터는 꽤 상대할만한 수준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아, 이 정도면 할만하지. 은하야, 괜찮아?"

"응. 이 정도면 좀 쉬운 편인데?"

엑스트라 난이도라서 너무 쫄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적당히 상황을 파악한 이후에는 나만 전열에 남고 은하를 후열로 보냈다.

아무래도 내가 전열에서 제대로 싸우고 은하가 뒤에서 지원해주는 편이 더 효율적일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던전 공략 경험이 적긴 한데, 그래도 후열 경험보다는 전열 경험이 많은 편이라서 이 형태가 제일 이상적일 거다.

"아, 씨. 미안."

"괜찮아. 자기는 애초에 전투 경험이 적잖아."

"엑스트라 난이도를 실전 공략하면서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임하면 안 되는 거니까."

헌터가 던전에 들어가서 실전으로 싸우는데 그런 변명을 들이밀 생각은 없었다.

그냥 내가 부족하니까 파티에 피해를 주는 거고, 그건 사과해야 하는 일이 맞지.

아무리 경험을 쌓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해도, 찾아보면 방법이 있었을 텐데....

이제까지 너무 안일하게 살아오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땡큐."

괜히 채린이가 은하 없이 던전만 다녀오면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뒤에서 은하가 봐주는 것과 봐주지 않는 것의 간극은 정말 무서울 정도네.

사실상 상처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몬스터에 달려들어도 괜찮다 보니, 이것 자체가 상당한 전투력 차이를 만들어냈다.

"자기가 싸우는 거, 채린이랑 닮았네."

"아무래도 그 녀석 움직임을 배운 거라서."

아무래도 순간적인 화력을 생각하면, 채린이의 날개만큼 적당한 것이 없으니까 그걸 미러링해서 사용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원본 사용자인 채린이가 어떻게 다루는지부터 달달 외워가면서 익혔으니까.

물론 꼭 내가 전투에 활용하는 특성이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설아의 특성을 미러링해서 마술도구를 제작하면, 전투의 자유도나 성능 면에서 굉장한 이점을 준다.

'망할.'

괜히 생각을 줄줄이 이어가다가, 일부러 떠올리지 않고 있었던 설아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설아는 지금 괜찮은 걸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설아에게 더 잘해줬어야 했는데.

아니, 애초에 내가 다키마쿠라를 상대할 때 설아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않았더라도....

기분 나쁜 자책감이 머리를 침식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설아가 그러고 있는데도 하루씩이나 늦게 출발했던 점도 걸린다.

내가 그때 흥분해서 난리만 치지 않았어도, 바로 진정해서 은하한테 조곤조곤 부탁했다면 하루를 빨리 진행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자기야?"

"어, 어?"

"괜찮아? 땀나."

"으응."

박은혁 너 뭐 하는 거야?

지금 간단한 난이도도 아니고 엑스트라 난이도를 클리어하면서 딴생각을 하는 거야?

너 미쳤어?

그러다가 설아는 물론이고 은하까지 다치게 할 셈이야?

"미안, 정신 차릴게."

"아,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야. 진짜 안 좋아 보여서 그렇지."

정작 그렇게 말한 은하의 표정도 많이 굳어 있었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웅 완전 공감해'를 통해서 듣고 싶었지만, 비틀림을 해결하는 도중에는 내 특성의 대상으로 설정할 수 없다는 제약이 있었다.

그 와중에 직접 물어볼 용기도 없어서 사람 마음이나 읽어서 확인하려는 거야?

오늘따라 진짜 최악이네.

"은하야, 혹시 문제 있으면 말해줘."

"어? 그, 그게...."

"역시 있구나."

하긴 은하가 보기에도 내가 지금 고쳐야 할 부분이 한둘이 아닐 거다.

물론 커다란 문제는 터지지 않고 있지만, 이대로 계속 진행했으면 위험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고칠 테니까 말해달라고 말하려 했는데, 그 순간 은하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더니 예상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아니, 내가 제대로 전투형이 아니라서 발목만 붙잡고 있는 것 같아서."

"뭐? 그게 뭔 소리야."

사실상 내가 트롤하는 걸 네가 다 캐리하고 있는 거잖아.

애초에 은하 네가 없었으면 바로 끝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앞에서 싸우고 있기는 한데, 솔직히 평소에 은하가 합을 맞추던 채린이보다 훨씬 부족할 거다.

그리고 내가 회복도 가능해서 저렇게 말하는 것 같은데, 애초에 이 회복 능력이 효율이 좋은 이유도 너를 미러링 해서 그런 거잖아.

"네가 없었으면 아까 다친 거 때문에, 내가 회복하느라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을걸?"

"내가 애초에 화력으로 같이 쓸어버렸으면 다치지조차 않았겠지."

그건 또 생각도 못 해본 참신한 자책이네.

생각해보니까 얘는 후열인데 공격 하나 탱킹 못했다고 자책하던 이상한 애잖아.

하여튼 정말 못 말린다고 생각하면서 그녀의 뺨을 꼬집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죠? 너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하고 죽었어."

"하지만...."

"애초에 여기에 들어오는 것부터 내가 부탁해서 들어온 거잖아. 네가 도와주는 건데 왜 자책을 하고 있어."

오히려 자책해야 한다면 내가 하는 것이 맞다.

물론 언젠간 은하와도 아이를 가질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모든 게 급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진행되는 것은 나 때문이었으니까.

하긴 생각해보니까 은하가 저런 불안함을 가지는 것도 나 때문이네.

괜히 설아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은하까지 저런 기분이 되게 된 거잖아.

그래, 결국은 전부 멍청한 내가 설아를 다치게 했기 때문이야.

"으...."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웅웅거리면서 밀려오는 여러 생각들이 나를 괴롭힌다.

지금 당장이라도 은하에게 모든 걸 맞기고 나는 포기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내가 앞으로 발을 내딛는 것 자체가 은하에게 피해를 주는 거 아니야?

"진짜 미치겠네."

내 머릿속을 울리는 기분 나쁜 생각들에 구토가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방금 순간적으로 떠올린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조차 포기하는 최악의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조차 나 자신을 너무 혐오스럽게 느끼게 했다.

머리를 채워나가는 혐오의 감정들이 나를 뒤덮고, 결국 제대로 전투에 집중하지 못해서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실수에 대한 혐오가 다시 나를 물어뜯는 자기혐오의 연쇄가 나를 후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차라리, 나 따윈 죽어야...."

"뭐?"

하지만 그 생각은 은하가 중얼거리는 말 한마디에 순간적으로 우선순위가 밀려 지워졌다.

오랜만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우리가 대체 뭘 하고 있나 싶었다.

조금 전에는 정신이 없어서 은하가 자책하는 것이 평범하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은하는 그런 부분이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나처럼 뭔가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자기를 자책하고 있는 거지?

애초에 최근에 나도 은하의 일부로 생각하면서, 저런 식의 자책은 많이 줄어들었을 텐데?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했던 자책들도 좀 말이 안 되는 것들이 많았다.

"시발, 이거 설마...."

한국에서 발생했던 사건은 아니지만,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이 하나 있었다.

미국의 유명 S급 헌터들이 저급의 난이도로 평가받던 어떤 던전을 도전했다가 그대로 사망한 사건이다.

아직 엑스트라 난이도에 대한 이해도가 인류에게 부족했던 시점이라 발생한 사고였다.

결국 공략법을 전혀 모르는 그 게이트를 공략하기 위해 투입된 헌터의 수는 어마어마했고.

여러 등급을 다 투입해보며 테스트하는 바람에, 등급에 상관없이 어마어마한 수의 헌터가 갈려 나갔다.

그 때문에 한동안 미국쪽 헌터계의 위상이 추락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돌았지만....

'오히려 엑스트라 난이도에 대한 공략법을 정립하면서, 그게 다 퍼지기 전까지는 그 정보 독점으로 이득을 봤지.'

하여튼 모든 정보가 다 풀린 지금도 공략된 엑스트라 난이도의 게이트 중 가장 악랄하다 취급받는 것도 그 녀석이고.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관련된 정보가 오픈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멍청한 나도 바로 떠올리지.

'와, 던전 효과 끝내주는데?'

이 던전의 특징은 평범한 난이도에 숨겨져 있는 패시브 효과에 있었다.

침입한 사람은 점점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극도로 떨어지게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혐오가 강해지게 되는 특징이 있는 던전이었다.

특히 누군가를 구하지 못했다는 후회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고 있던 그 당시 헌터들에게는 그 후회가 자신을 잡아먹어 자살로 몰아가는 끔찍한 던전이었다.

심지어 이 던전 특징은 정신 방벽계열 특성이나 약물로도 방어할 수 없어서 던전의 특성을 알아냈음에도 해결법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평범하게 생각하면 해결법이 없다고 생각할만한 상황이지만....

'막을 방법이 하나 있긴 하지.'

물론, 이건 그 당시 누군가가 시도해봤던 검증된 공략도 아니고.

심지어 이걸 행한다고 해서 완벽하게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그래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질 것이라 믿으면서 특성 하나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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