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9 7장 - 생리통이 아니라 정혈통(5)
"설아야? 묘설아!"
워낙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자, 머리가 텅 비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장난인가 싶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긴 시간 설아의 연기를 봤기에 어느 정도는 구별할 수 있는 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히려 괜찮은 척을 하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진 쪽이었다.
내가 진심으로 당황한 것이 느껴졌는지, 우리 쪽을 보고 있던 아이들도 놀라서 조금씩 울먹거리고 있었다.
일단 아이들한테는 최대한 괜찮을 거라며, 피곤해서 그런 거라며 둘러대고 빠져나왔지만.
아마 눈치가 빠른 아이들이니까 좋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설아야, 설아야?"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전혀 미동이 없다.
물론 숨이 끊어지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마력이 모여 있는 가슴 부근이 심할 정도로 열이 오르고 있다.
혹시 마력과 관련된 병 같은 거라도 걸렸나?
설마 최근에 몸이 이상하다고 말했던 것들이 그 전조 증상이었다고?
하필이면 그녀가 0레벨에 도달했기 때문에 '힘조'를 사용해 깨우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마력이라도 없으면 모르겠지만, 정작 마력을 써야 하는 설아가 쓰러져 있어서 소모할 수 없었다.
그나마 설아의 마력을 건드릴 수 있는 건 채린이 정도인데, 채린이의 특성으로는 마력을 뽑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겉으로만 보면 그냥 잠든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그냥 잠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쓰러지기 직전 그녀의 표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보였다.
아무리 설아가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다지만, 고통의 감정 자체는 가끔 몸을 막 굴리는 나 때문에 꽤나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F급의 사실상 인류 최강 헌터가 졸려서 쓰러진다는 게 말이 안 되지.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아니야. 나야 자기 얼굴 보면 언제든 좋아. 아직도 반응 없어?"
"응...."
순수하게 전투 계열에 가까운 채린이를 제외한다면, 지금 상황에서 가장 도움이 되는 건 은하였다.
물론 은하는 아직 10레벨이니까 0레벨인 설아를 치료하는 건 무리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설아가 이렇게 된 원인 정도는 알아낼 수 있기를 기도하며 찾아온 것이었다.
"가슴의 마력이 불덩이네. 이건 마력이랑 관련된 무언가가 몸에 침입해서 싸울 때 일어나는 현상인데...."
"하지만 이상하잖아. 설아는 사실상 10레벨보다 강한 엘프들보다 강한 0레벨 마력을 가지고 있는데.... 대체 어떤 마력이 설아를 이렇게 만든다는 거야?"
"확실히 그 부분이 이상한 점이야."
내가 알기로 엘프들은 같은 레벨의 인간보다 강력한 만큼, 0레벨에 도달할 수 없다고 알고 있다.
물론 그들의 무서운 점은 그런 무력보다는 이 세계에 심어둔 간첩들이 가득하다는 점이고, 그 때문에 우리가 0레벨에 도달한 이들이 있음에도 바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던 건데....
아무리 녀석들이어도 0레벨을 당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잖아.
"S급까지라면 말이 안 되지만.... F급 이상의 특성이라면?"
"F급?"
"자기의 경우에는 자기보다 강한 엘프들에게 그냥 특성을 걸 수 없어. 맞아?"
"응, 그렇지?"
"하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마력을 없앤 다음에는 걸 수 있잖아. 그런 특별한 조건을 맞춘 거라면?"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내 특성들은 F급이라 그런지, 레벨이 낮을 때는 상위 레벨에 당연히 걸리네 싶은 수준이었고.
최근 들어 최상위 레벨에 도달한 이후에야 나보다 높은 레벨에 거는 제약이 빡빡해진 느낌이다.
마찬가지로 상대도 F급 특성이 있는 녀석이, 비슷하게 빡빡한 조건을 만족해가면서 설아에게 이런 짓을 한 거라면?
"하지만 일단 그런 조건을 건다는 것부터, 설아에게 접근했을 확률이 높다는 건데.... 모르는 사람에게서 그런 기색을 느꼈으면 설아가 알아차렸을 거야. 그럼 이미 만난 사람 중에서 범인이 있다는 건가?"
그것도 설아가 원래부터 강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상대?
그런 식으로 인원을 추리니까 금방 한 엘프가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다키마쿠라가 범인이잖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을 만한 것들은 죄다 엘프인데, 그 엘프 중에서 우리가 아는 것은 히메노와 다키마쿠라 둘 뿐이었다.
하지만 히메노는 내가 각성을 해제시킨 이후에야 설아와 만났어.
물론 히메노의 마음 결정이 문제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 뒤로 한참이나 지난 지금에 문제가 되는 건 좀 이상하다.
그리고 마음 결정이 문제라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특성'이 문제인 경우와는 다른 원인이니까 일단은 제외하고 생각해야지.
그럼 결국 남는 건 지금 우리 집 침대에 널브러져 있을 다키마쿠라밖에 없는데....
생각해보면 설아의 힘으로 다키마쿠라의 집에 침입했었고, 그 뒤에 그녀와 싸우기까지 했으니까 함정을 걸 타이밍도 많았을 것이다.
심지어 조건을 만족해야 특성이 강해진다는 것 자체가 그녀의 특성인 저주라는 컨셉과도 잘 맞아떨어진다는 걸 감안한다면....
"확실히 마음에 걸리긴 하네. 하지만 저번에 '해줘'를 이용해서 그런 정보를 다 꺼내라고 했을 때, 특별히 이상한 건 없었을 텐데."
"혹시 지워진 기억도 확인했어?"
"아, 시발."
그제야 제대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초반에 설아는 다키마쿠라가 걸어둔 함정에 걸려서 저주에 걸렸고.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조교가 되기 전인 다키마쿠라는 우리에게 최대한 엿을 먹이고 싶었을 테고, 자신이 조교 되기 전에 보험으로 자기 기억까지 지운 거지.
생각해보면 다키마쿠라는 경찰을 관리하던 엘프 치고는 가진 정보가 너무 없었는데....
만약 자기 기억에서조차 말소시켜서 우리를 속이고 있었던 거라면?
"미안, 지금 가서 바로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설아는 내가 돌보고 있을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설아의 마력 때문에 이 이상한 녀석이 큰 힘은 쓰지 못하고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괜찮아야지, 괜찮아야만 해...."
이제야 좀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좋아하던 아이였다.
이제야 좀 어머니를 챙길 수 있다며, 엄마랑 싸웠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아이였다.
이제야 자기감정이 어떤 건지 알아가던 아이였다고.
그런데 그런 우리 애기를 건드려?
"어, 주인님. 오늘 출근하신 것 아니.... 컥!?"
"야, 너 똑바로 말해. 설아한테 무슨 짓 했냐?"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 제가 뭘.... 켁!?"
어차피 그 몸은 본체도 아니잖아.
숨 못 쉬어서 몸이 죽어도 네 정신은 안 죽어.
그러니까 그냥 목 졸려서 몸이 뒈진 후에 대답해도 되겠다.
그치?
몸이 죽어버리는 경험을 하는 건 꽤나 신선한 느낌일 거 아니야?
"『너무 무섭긔』 이래도 기억이 안 나?"
'너무 무섭긔'를 이용해서 그녀의 기억을 전부 날려버린 뒤, 다시 되돌리는 식으로 복구한다.
이렇게 전체를 걸어서 복구하면 다른 특성으로 지워졌던 기억도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아마 이 녀석이 범인이라면 이거로 기억이 돌아왔겠지.
"그, 그게...."
"아직도 기억 안 나냐고."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주인님께! 다, 다 말할게요! 전부 말할 테니까 죽이지만 말아주세요!"
이걸 어쩌냐.
나는 이미 너를 용서할 생각 따위 없는데.
일단 이야기를 들을 때 방해가 될 테니, 굳이 그 사실을 말해주진 않았다.
"그, 그 저주는 라스트 나이트메어라는 제 F급 특성인데요. 조건이 좀 어렵지만, 저주를 걸기만 하면 확실하게 대상을 처리할 수 있는...."
일단 마력을 굉장히 많이 소모해서 긴 시간을 들여 저주를 걸어둬야 한다는 단점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렇게까지 해서 거는 저주도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들을 만족해야만 발동하는 가성비가 나쁜 저주라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방벽을 뚫고 들어올 적을 대상으로 하도록 조건을 짜두었다고 한다.
"그, 그런데 하필 그분이 제 방비를 전부 뚫어버리시는 바람에...."
"지랄하지 말고 계속 설명해. 그래서 지금 설아는 어떤 상태인데?"
일단 그 저주에 걸리게 되면, 저주한 대상을 특정하지 못하도록 한동안 잠복하며 대기하게 되고.
처음에는 꿈을 꾸는 상황에 갑자기 잠에서 깨는 정도로 간단한 증상으로 시작하게 된다.
그 증상은 꿈을 저주가 장악하는 과정이며, 그런 식으로 완전히 꿈을 장악하게 되면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빠진다고 한다.
그리고 잠이 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인데.
저주는 악몽을 통해 대상의 마음을 약화하고, 그 약화한 마음을 이용해 마력을 침식하기 시작한단다.
그렇게 침식된 마력은 악몽을 실체화시켜서 대상의 신체를 갉아 먹고, 그렇게 몸이 서서히 망가지다가 죽는다는 거지.
"해제하는 법은?"
"없어요."
"지랄하지 말고."
"컥, 케흑...! 지, 진짜예요! 완전히 꿈이 장악하기 전에는 제가 해제할 수 있지만, 장악한 이후에는...!"
완전히 꿈이 장악한 이후로는 대상이 꿈에서 깨어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 이전에 특성을 실험할 때는 10레벨인 엘프 힐러도 저걸 해제할 수 없다는 걸 확인했단다.
그래서 혹시 다른 엘프가 배신해서 자신을 공격할 걸 대비해서 저주로 함정을 파뒀다는데, 하필이면 설아가 거기에 걸려든 것이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두통이 점점 강해진다.
일단 쉽게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은 확실해졌네.
심지어 이 저주를 해제하려면 엘프 10레벨보다 더 강한 회복 능력이 아니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까지.
하지만 이 지구상에 그런 회복 능력이 있는 인물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나저나 너 진짜 머리 잘 썼더라."
"그, 그게.... 저는 진짜 억울해요! 과거의 제가 그런...."
"과거의 네가 잘못했으니까, 미래의 네가 벌을 받는 거지."
그리고 내가 아까 예상했던 것처럼, 이 녀석은 기억을 지움으로써 많은 여인위의 정보를 틀어막고 있었다.
심지어 이 녀석이 계속 연락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되어서 큰일이 날 뻔했던 부분도 하나 있었다.
솔직히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인 게 좀 있네.
시간을 들여서 제대로 조사해봐야 할듯한 자료들도 있고.
"와, 시발. 진짜 좆될 뻔했네. 이 미친년이."
자기 기억을 지워가면서까지 이런 함정을 파놓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앞으로는 혹시 모르니까 조교가 끝나면 기억부터 다시 엎어봐야겠다.
설아를 그렇게 만든 것만 해도 죽여버리고 싶은데, 진짜 제대로 엿을 먹여놨네.
"하, 시발. 이 새끼가 있어야 여인위에 들키지 않으니까 죽일 수도 없고."
그냥 화풀이하는 것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라는 것이 너무 억울했다.
지금 설아가 고통받고 있는데, 정작 이 녀석은 고통받지 않는다는 것도 화가 나고.
그래, 생각해보니까 고통스럽게 만들어주면 되잖아?
"네 모든 쾌감은 같은 수준의 고통으로 바뀌어. 『모르면 공부하세요』"
쾌감에 한해서는 오나홀의 기능을 통해서 마음대로 주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걸 고통으로 바꾸면 굉장히 고통스럽겠지.
나는 오나홀의 입구 쪽에 대충 문신을 그려두고, 양쪽 젖꼭지를 비틀어 무한 절정모드를 켜버렸다.
"아아악! 끄아악! 히익! 흐극!? 아파앗, 아파앗! 제발, 제발 용서...! 으그그극!?"
"걱정하지 마. 설아가 정상이 될 때까지만 걸어둘 거니까."
물론 그 전에 망가지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자기 기억을 지우면서까지 우리를 엿 먹이려고 노력했던, 아주 강한 심지를 가지고 있는 너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잘 참을 수 있겠지?
"제, 제발.... 아으윽...!"
"시끄러워."
퍼억!
나는 다키마쿠라의 목을 있는 힘껏 후려쳐서 음소거로 만들어 버리고는.
그대로 방치해놓고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