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5 2장 - 유채린(5)
채린이의 입술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한다.
나도 이걸 실제로 보니까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인데, 딸인 채린이가 느끼는 수준은 오죽하겠는가.
나는 유채화 헌터의 명복을 빌면서 방 중앙에 있는 석판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석판 위에 글자가 생겨나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를 희생해 세상을 지킬 수 있다면?]
유채화 헌터가 들었던 내용은 '나를 희생해 세상을 지킬 수 있다면?'이라는 내용이었다.
즉, 지금 우리는 공략 인원이 둘이라서 채린이가 희생될 대상으로 선택된 것이고.
아마 채린이한테는 유채화 헌터와 같은 내용의 메시지가 전달되었을 거다.
"아, 아아...!"
"채린아. 괜찮아."
"엄, 마...."
나는 석판 앞에 채린이를 내려놓고, 최대한 진정할 수 있도록 꽉 껴안아 줬다.
누구보다 강한 대한민국의 얼굴 같은 그녀조차.
이렇게 약해질 수 있을 만한 상처가 있는 법이다.
영웅들이 완벽해야 한다는 것은 그저 욕심과 악랄함이 가득 찬 바램일 뿐인 거니까.
"야, 이 쓰레기 같은 던전아. 채린이를 희생해? 웃기고 있네. 그딴 방법으로 세상을 지켜? 나는 그럴 생각 없어."
"너, 너...."
아무리 이게 복사해서 만들어진 던전이라고 하더라도, 이제까지의 퀄리티를 보면 정말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수도 있다.
유채화 헌터가 막아냈던 악몽이 그대로 서울에 덮쳐오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게 싸워보지도 않고 소중한 이들을 희생해가며 버티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헌터들.
그리고 그중에서도 영웅이라고 불리는 이들.
언제든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아름다운 이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던 유채화 헌터까지.
분명 유채화 헌터가 했던 것은 아름다운 희생이고,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선택을 거부하고 싶었다.
내 옆에 있는 이 성격 더러운 여자아이가 자신을 희생해가며 세상을 지키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유채화 헌터님. 당신이 틀렸어요."
내가 휘두른 공격이 석판에 부딪히고, 생각보다 쉽게 부서진 석판이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울고 있던 채린이가 벙찐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게 좀 귀여웠다.
쟤는 갈수록 애가 귀여워지는 것 같다?
"자, 업히시고."
"너, 무슨 짓이야! 그랬다간 던전 브레이크가...!"
"어쩌라고. 던전 브레이크? 일어나라지."
물론 이 선택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중한 사람을 바치는 것은 이제 사양하고 싶었다.
나는, 아니 우리는.
던전과 싸워서 세상을 지키는 헌터다.
던전과 타협해서 세상을 지키는 희생양이 아니라고..
[너의 오만을 증명하라.]
"그래, 증명해주마."
어떤 성격 나쁜 쓰레기가 이딴 던전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이 하나 더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아마도 추가 스테이지를 실력행사로 클리어하는 것.
"근데 진짜 악질이긴 하다."
진짜 마지막 방으로 이동하자마자 보이는 거대한 몸체가 눈에 들어온다.
저걸 시야에 모두 둘 수 있는 곳에서 바라보면, 아마 우리는 점으로 보이지 않을까?
소형 인원으로 공략하는 던전의 최종 보스가 초대형이라니.
하긴, 그 정도는 되어야 오만을 증명하라는 소리가 나오는 법이겠지.
저기에 혼자 돌격해서 싸워봐야 화력이 부족해서 죽이지도 못할 것이 뻔히 보였다.
솔직히 저번 브레이크 때에 처리한 초대형도 몇 번이나 마력을 회복해서 순간 빡딜을 했으니까 가능했던 거지, 지금처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불가능에 가깝다.
사람이든 몬스터든 시간이 지나면 몸이 조금씩 복구되기에, 저런 놈은 딜량이 그 복구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거든.
"채린아."
"...응."
"내가 미친놈이라고 생각하지?"
"......."
아마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얼굴을 내 등이 파묻는 감촉이 부드럽게 전해져왔다.
미친놈이지만, 그래서 좋아.
그녀는 굳이 말해야만 아냐는 듯이 그렇게 중얼거렸고, 나는 확신을 가진 채로 말했다.
"그럼 그 미친놈을 좀 도와주지 않을래? 사고를 쳤는데 혼자서 수습하기는 좀 힘들어서."
"응...!"
저걸 평범하게 내가 날개랑 마력을 쏟아붓는다고 부서질 리가 없다.
화력보다 정확한 타격이 중요한 마지막 공격은 모르겠지만, 겉 외장을 부수는 건 어떻게든 화력을 끌어올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마력이 부족할 때 화력을 올리는 가장 심플한 방법은 서로 다른 마력을 충돌시키는 거다.
'물론 그게 말처럼 쉬우면 다들 그렇게 하겠지만....'
서로 다루는 마력이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어야 하고, 안정성 때문에 최대 화력은 올리지 못한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자면 마력의 가성비가 올라간다는 걸 의미하는데.
이런 위험한 행동을 할 바에는 그냥 약물로 마력 회복을 하는 편이 나으니까 사장된 지 오래된 기술이었다.
나는 마술도구를 써서 내 등의 일부를 채린이의 등과 교체했고.
그러자 내 등에서 채린이의 새하얀 날개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걸 다룰 수 있는 건 여전히 채린이었다.
사슬이 채린이가 마력을 다루지 못하도록 막는 걸 우회시켰다고 보면 된다.
"어, 어?"
"우리 둘 다 해본 적은 없지만.... 어떻게 충돌시키는 건지는 알지?"
"설마 날개를 충돌시키겠다고?"
"지금 좀 가까이 갔다고 파르르 떨리잖아. 이 반발력이면 가능할 것 같지 않아?"
흰색 날개와 검은 날개가 겹쳐지며 강렬한 마력의 파동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 충돌에 따른 여파를 안정적으로 화력으로 바꿔낼 수 있다면, 마력 회복 없이도 충분히 초대형을 쓰러트릴 수 있을 거다.
내 설명을 들은 채린이가, 오랜만에 짜증을 내면서 말했다.
"알았어, 하면 되잖아! 실수하면 죽는다!"
"너나 잘하세요."
새하얀 날개와 검은색 날개가 빛을 흩뿌리며 하늘을 수놓기 시작하고.
그 두 종류의 날개가 하나로 겹쳐지며 묘한 빛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는 없지만, 이전에 우리가 싸웠던 기억을 토대로 상대의 마력과 내 마력의 수준을 정확하게 맞춰낸다.
두 날개가 충돌하며 완벽한 균형을 맞추자, 묘한 느낌으로 곧 폭발할 듯한 형태로 날개가 바스러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몬스터를 향해 날아갔다.
거대한 몸체가 우리를 노리고 공격을 쏟아냈지만, 워낙 느려터진 공격이라 맞을 리가 없는 수준이었다.
"흐읍!"
검은색도 아니고 흰색도 아니다.
그렇다고 회색도 아닌, 묘하게 무지개에 가까운 색이 하늘에 펼쳐졌다.
마치 무지개가 공격을 퍼붓는 듯한 느낌으로 몬스터를 내리찍었고.
부서지지 않는 몸체를 내려찍고, 또 내려찍었다.
투입한 마력보다 훨씬 더 강한 위력.
강하긴 했지만, 몬스터는 그 정도 공격으로는 모자란다는 듯 버텨냈다.
하지만 애초에 이걸로 부서지리라 생각했으면 이렇게 위험한 방법을 채용하지도 않았을 거다.
"다음!"
우리는 날개가 바닥날 때까지 공격을 퍼부었고.
천장은 무지개를 넘어 거대한 오로라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와, 진짜 독하긴 하네.
"이게 마지막이야. 이거 부족할 것 같은데?"
"부족한 건 내가 어떻게든 채워볼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전력으로 가자."
"응...!"
이제까지 항상 일정한 양만 투입되던 새하얀 날개가, 아까보다 1.5배는 강해 보이는 크기로 전개된다.
나는 그 수준을 정확하게 계산해서 같은 양으로 대응했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합쳐진 공격이 몬스터를 향해 쇄도했다.
파스스스!
처음으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충분한 화력을 쏟아내서 몬스터의 외장을 부수기 시작했다는 거고.
이제부터는 화력이 좀 부족해도 괜찮으리라.
"뒈져라아!"
가지고 있던 마력을 모두 날개로 만들어서 쏟아낸다.
마력이 부족해지자, 신체가 위험하다며 경고를 보내오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하고 모든 마력을 날개와 공격으로 만들어 쑤셔 박았다.
까앙!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내부에 있는 코어를 무언가로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고.
균열이 생긴 코어가 여러 조각으로 부서져 흩날리며 몬스터의 움직임이 멈추기 시작했다.
"헉, 허억...."
"으...."
날개가 사라지자, 우리 둘은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쳐서 데굴데굴 굴렀고.
온통 먼지투성이가 된 채로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쓰러, 트린 거지?"
"그런 것 같은데...."
우리 둘은 얼이 빠진 채로 바닥에 누워서 한참을 키득거렸다.
미친 짓이긴 했는데 멋지게 성공했다는 것도 참 웃기고.
성공해놓고 바닥에 굴러서 전혀 멋지지 않은 마무리였다는 것도 되게 웃겼다.
"...고마워."
"무슨 소리야. 전부 내가 해달라고 부탁해서 생긴 일인데. 내가 고맙지."
"그런 답을 원하는 게 아니야."
"그럼, 혹시 이런 건가요?"
나는 채린이를 끌어안고 입술로 입술을 덮쳐버렸다.
서로를 탐닉하는 쯉쯉 소리가 조용한 던전 내부를 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있었다.
"프하, 진짜 혀 움직임이 야해."
"너도 엄청 야하던데."
"죽어...."
던전이 완전히 클리어된 영향인지, 채린이를 묶고 있던 사슬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술도구로 바꿨던 등까지 원래대로 되돌리고, 우리는 천천히 던전의 밖을 향해 나아갔다.
[대상의 비틀림을 해결했습니다!]
[귀환을 시작합니다.]
파아앗!
눈을 찌르는 듯한 빛과 함께 어지러운 감각이 몸을 지배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채린이의 집 바닥에서 뒹구는 중이었다.
자궁의 맹약을 맺던 장소로 돌아온 모양이네.
"채린아?"
"으...."
"야, 유채린!"
그런데 옆에 누워있던 채린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져 있었고, 깜짝 놀란 나는 그녀를 침대에 눕혀두고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줬다.
그녀는 한동안 끙끙거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수건으로 물을 묻혀줘도 워낙 체온이 높아서 금방 증발해버렸다.
"은, 혁아...."
"정신 들어?"
"왜 그렇게 놀랐어, 이 바보야...."
"그럼 네가 이상한데 놀라지 않겠냐? 기억은 다 제대로지?"
"응, 던전은 잘 깨진 거지?"
"그래."
일시적인 현상이었는지, 그녀는 금방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잠깐 사이에 내가 걱정해줬다는 사실조차 기쁜지, 그녀는 실실거리며 나를 껴안고 사랑을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
"알아. 바람둥이긴 해도, 그 말이 진심인 건 알고 있어."
"그건, 뭐라 할 말이 없다만...."
쯔붑!
키득거리던 채린이가 나에게서 떨어지려는데, 묘하게 질척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우리 사이에 투명한 실이 길게 늘어졌다.
그리고 그 끈적한 액체로 젖어있는 곳은 놀랍게도 그녀의 배꼽 바로 아래였다.
"어, 어라? 이거...."
"오...."
온통 질척하게 젖어있는 배꼽 아래쪽의 배와.
실시간으로 투명한 액체를 흘려보내는 배꼽 가운데의 모습.
뒤늦게 그 엄청난 모습을 본 나는 본능적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 이거 설마...."
"그 보지는 방금 생긴 처녀인데도, 벌써 음란하게 젖어서 질척거리네? 진짜 개변태다."
라고 놀렸다가 그녀에게 한 대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