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4 2장 - 유채린(4)
"여길 혼자서 돌파한 유채화 헌터님에 대한 존경심이 마구마구 솟아나는데.... 어우 뒈지겠다."
"괜찮아?"
"이거 대체 웨이브가 몇개나 있는 거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쿠구구궁!
채린이의 날개 하나가 부서지더니, 그대로 날아가서 새로 튀어나온 몬스터들을 박살 낸다.
처음 보는 몬스터들이라 약점을 이용해서 효율적으로 사냥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이렇게 화력으로 조지는 것 말고는 특출난 해결법이 없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우리 둘이 여기 있는 몬스터들을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약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다 처리했다 싶으면 새로 몰려오는 물량 때문이었는데, 강한 녀석들의 비율이 올라가는 걸 보면 난이도도 계속 올라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몬스터들을 쓰러트리면서 문제를 푸는 건가 싶었는데....
힌트라고 볼 수 있는 바닥에 있는 글자는 첫 번째 방에 있던 것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내 예측대로라면 '네가 강자라는 증거를 가져오면 문을 열 수 있다.'라는 내용인데.
다른 점이라면 그때처럼 물건을 올려놓을 자리가 없다는 정도겠지.
아주 심플하게 생각하면, 이 몬스터들을 막아내서 우리의 강함을 증명하라는 소리가 된다.
즉, 우리가 지금 여기서 고전하고 있는 건 순수하게 실력이 밀려서라는 말이다.
나는 유채화 헌터의 대단함에 감탄하면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공격을 배분하기 시작했다.
"위험한데, 채린이 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아직은 괜찮은데."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아무런 준비물 없이 이곳에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원래라면 마력을 회복시키는 약물이나 전용 장비 같은 것들을 전부 챙겨왔어야 했는데.
그게 아니라서 채린이의 날개 소모가 너무 극심한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경우에는 기본적인 마력통도 큰 편인데 날개 스택으로도 마력을 보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채린이한테 최대한 빠지라고 하고 마력이 많은 내가 몬스터를 처리하는 방향으로 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진행했음에도, 워낙 많은 몬스터들이 쏟아져나오니 채린이의 날개가 슬슬 바닥을 치고 있었다.
"헉, 허억...."
"괜찮아? 마력 고갈하면서까지 날개 충전하지 마!"
"그래도 아마 이 정도면...."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개지랄을 했으면 몬스터가 그만 나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비가 전혀 없는 이 미친 던전은 여기서 보스 몬스터를 던져주는 초강수를 두고 있었다.
사실 그래도 나에게 충분한 마력이 있었으니 보스 몬스터 정도야 내가 어떻게든 해결하면 마무리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채린아...!"
문제는 보스 몬스터가 등장하는 위치가 너무 악랄하게 설계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제까지 모든 몬스터는 벽 쪽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중앙 천장에서 떨어지는 걸 어떻게 예측하라는 거야.
아무래도 채린이는 날개 스택을 모두 소모해, 전투할 수 없는 상태라 중앙에서 쉬는 중이었고.
하필이면 거기 떨어진 보스 몬스터의 공격에 직격당하고 말았다.
"망, 할!"
아까 채린이를 묶고 있던 사슬과 비슷한 것이 튀어나오며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나는 남아있던 마력 대부분을 쏟아내서 날개를 만들었고.
최대한 빠른 속도로 날아가 채린이를 구해냈다.
"괜찮아?"
"윽...!"
채린이는 몸부터 하반신까지를 전부 사슬로 꽁꽁 묶여 있었다.
혹시나 해서 사슬을 부수려 했지만, 이 건물과 같은 재질도 되어있는지 부서질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자칫 채린이가 다칠 것 같아서 이 이상의 화력으로 때리는 건 무의미할 것 같고....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저걸 죽여보는 건가?'
중앙에서 사슬을 휘두르며 공격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일단 지금 마력으로는 화력을 쏟아내 압살하기에는 좀 부족할 것 같으니까, 무조건 약점을 찾아야만 쓰러트릴 수 있다.
나는 판단이 내려지자마자, 마력을 최대한 아끼면서 녀석의 움직임을 살피기 시작했다.
사슬을 꺼내는 쪽은 노출되어 있으니까 약점일 가능성이 작고, 최대한 몬스터가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럴듯해 보이는 장소....
생각해보니까 저 녀석 한 번도 우리한테 뒤를 보이지 않았네.
어차피 사슬이 전 범위로 뿜어질 수 있는데, 굳이 회전하지 않는 이유가 뭐지?
아까 채린를 공격할 때도 나와 채린이를 모두 볼 수 있는 위치로 굳이 이동했었지?
'등에 뭔가 있구나.'
일단 확인해볼 가치가 있었고, 나는 방금 남아있는 미미한 마력을 전부 쏟아서 마술도구 하나를 만들었다.
마력이 고갈되면서 어지러움으로 인해 머리가 핑 돌았다.
'힘조'를 사용해서 최대한 정신을 유지하며 마술도구를 적당한 위치에 배치했다.
그리고 그 마술도구가 보스 몬스터의 등 뒤에 위치할 수 있도록 최대한 움직임을 유도한 다음....
"제발, 정답이어라!"
나는 시야가 바뀌는 순간 사고를 가속했고, 새로 채웠던 마력의 양이 단숨에 바닥을 때렸다.
거의 마력이 생기는 대로 쏟아붓는 미친 짓에, 마력을 돌리는 회로인 신체가 과열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사고가 가속하여 모든 것이 느려진 것처럼 느껴졌고, 나는 천천히 보스 몬스터의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등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슬롯에서, 푸른 불꽃이 반짝이면서 타오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마 저게 엔진이고, 저걸 통해서 움직이는 원동력을 가지는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한 것이 맞으면 저게 없이는 움직이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뒈져어...!"
마력 부족으로 사고 가속이 강제적으로 풀려났지만, 이미 나는 모든 판단을 마친 후였고.
나에게 남아있던 모든 날개를 화력으로 쏟아부어서 보스 몬스터의 등짝을 걸레가 될 정도로 후려쳤다.
빠지직! 콰앙!
결국 꽤 튼튼해 보이던 엔진도 금이 가더니, 곧 문제가 생겼는지 폭발하며 몬스터의 움직임이 멈췄다.
"헉, 허억...."
마력부터 스택까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쏟아내서인지.
긴장이 풀리자마자 다리의 힘까지 풀려서 바닥을 몇 바퀴 구르며 넘어졌다.
심장 터질 것 같아....
"채린아, 좀 괜찮아?"
"...모르겠어"
예상대로 방금 쓰러트린 보스 몬스터가 마지막이었는지, 우리를 가로막고 있던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래서 이 정도면 잘 해결한 편이라고 생각하며 채린이의 안부를 물었는데.
생각보다 그녀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은 상태였다.
심하게 고통이 있거나 죽을 만큼 위험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까 묶였던 사슬이 풀려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사슬 때문인지 특성도 사용할 수가 없었고, 다리는 묶여서 걷지도 못하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몬스터를 쓰러트렸는데도 풀리지 않는 건 진짜 악질인데.
혹시나 해서 여러 공간을 뒤져보거나, 그녀와 함께 문을 넘어 다음 공간으로 지나가는 행동까지 해봤지만.
뭔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러면 그냥 내가 업고 가는 수밖에 없겠네.
한순간에 든든하던 동료가 공략의 짐짝으로 변해버린 상황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진짜 미친 던전이네.
역시 사람을 정신적으로 몰아넣는 신화 던전이라고 감탄 아닌 감탄이 절로 튀어나왔다.
"미안...."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나는 오히려 부드럽고 쫀득쫀득한 마력통을 등으로 느끼며, 손으로는 엉덩이를 조물조물할 수 있어서 좋은데.
원래 위기는 기회로 바꾸는 거라고 했으니까.
움직이지 못하는 채린이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 법이다.
"변태, 바보."
"그래서 싫어?"
"아니, 좋아...."
내가 굳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이미 들킨 것 같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풀린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애초에 이거로 채린이가 미안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
지금 이 던전을 공략하는 것 자체가 내가 부탁해서 시작된 일이니까.
오히려 고생시켜서 내가 미안하지.
"이건 또 뭐 하는 거냐...."
최대한 마력과 날개를 회복하고 다음 방으로 들어섰는데, 이번 방은 뭔가 많이 형태가 달랐다.
일단 바로 앞에 무언가가 놓여있는 돌덩어리가 있었고, 그 앞쪽의 길은 낭떠러지로 되어있었다.
바닥에 적힌 글에는 '네가 강자라는 증거를 가져오면 문을 열 수 있다.'라는 내용에서 '강자'부분만 바뀌어 있었다.
"그놈의 증거 존나 좋아하네."
"이거, 퍼즐 같은데?"
"진짜 대놓고 퍼즐을 가져다 놓고, 풀면 길을 주겠다는 건 또 처음 본다."
대부분 던전의 기물을 이용해서 자연스럽게 풀게 되어있는 퍼즐인 경우가 많은데.
애초에 이렇게 커다란 던전을 만들면서 그 정도 시스템을 만들어 놓지 않는 것 자체가 스케일이 부족한 거 아니야?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그래도 특성에 따라 난이도가 달라지는 기물 퍼즐이 싫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까 무력을 증명하는 거였으니까, 이번에는 순수하게 지력만 증명하라는 거겠지."
"음, 이거 직소 퍼즐이지?"
"얇은 사슬로 묶여 있는 직소 퍼즐이라...."
직소 퍼즐인데, 퍼즐 조각마다 얇은 사슬로 묶여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슬들의 색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보고, 평범한 퍼즐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이건 저 사슬까지 퍼즐의 일부인 이중 퍼즐이었다.
"이거 사슬이 당기면 조금씩 늘어나잖아? 그래서 사슬을 끼우는 순서에 따라, 다른 사슬이랑 닿을 수도 있고 닿지 않을 수도 있어."
심지어 그 사슬의 종류도 정할 수 있고, 잘 꼬아내면 특정한 것들만 부딪히도록 의도하는 것이 가능했다.
혹시나 해서 퍼즐부터 싹 맞췄더니, 아니나 다를까 사슬의 색에 따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퍼즐 위에 담겨 있었다.
어떤 미친놈이 한 생각인지는 몰라도 참 잘 만든 퍼즐이었다.
"뭐, 뭐해?"
"대충 계산 중."
문제는 내가 이런 퍼즐을 존나 좋아한다는 거다.
내가 퍼즐을 싫어했으면 던전 공략 같은 걸 짜야 하는 매니저 일을 했을 리가 없잖아?
붉은색 사슬은 어떤 사슬과도 부딪혀서는 안 된다.
파란색 사슬은 붉은색 사슬을 제외한 모든 사슬과 부딪혀도 상관이 없다.
노란색 사슬은 노란색 사슬과 부딪혀서는 안 된다.
천천히 규칙을 지켜가며 퍼즐을 풀기 시작했고, 생각보다 기본 규칙을 달성한 결과물을 달성하기는 쉬웠다.
문제는 사슬과 사슬이 부딪치는 개수까지 맞춰져야 한다는 건데, 지금 나는 너무 적게 부딪히고 있었다.
"규칙을 깨지 않으면서 더 늘리려면...."
한참을 수정하고 또 수정한 끝에, 이게 맨 처음부터 조각을 잘못 끼우면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모든 퍼즐을 빼고 다시 끼우면서 정확한 정답을 맞힐 수 있었다.
굳이 저딴 함정을 파둔 거 보니, 제작자가 악질인 건 확실했다.
"와, 그걸 맞춰?"
"잊어버렸나 본데. 내 직업이 이런 거 푸는 거야."
물론 이런 건 매니저가 못하면, 따로 외주로 전문가한테 맡기는 경우가 있긴 한데.
위에서는 거기까지 예산이 들어가는 걸 좋아할 리가 없으니, 못하면 매니저한테 개지랄하는 업계다.
하긴 매니저한테 주는 월급도 큰 편이니까 저런 것도 해결 못 하면 빡치긴 하겠지.
쿠구구궁!
퍼즐을 정확하게 풀어내자, 방금 우리가 풀어낸 퍼즐과 똑같은 디자인의 거대한 퍼즐이 올라왔다.
그 퍼즐이 바닥 공간을 채우면서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냈다.
이거 스케일이 부족한 게 아니라, 제작자가 능력에 따라 난이도 바뀌는 게 싫었을 뿐이네.
"뭐야, 이것도 퍼즐이야?"
난이도가 바뀌는 게 싫었던 게 아니라, 그냥 이중으로 퍼즐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었구나.
진짜 개악질 이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번 퍼즐은 우리가 특성빨로 쉽게 깰 수 있는 난이도라는 거였다.
붉은 퍼즐은 밟을 수 없고, 파란 퍼즐은 밟아도 괜찮다.
마지막으로 노란색 퍼즐은 딱 1번만 밟으면 붉게 변해버리며 붉은 퍼즐처럼 밟으면 안 되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도착 전까지 정확히 밟아야 하는 횟수가 정해져 있어서 정확히 그 횟수를 밟아야 문이 열린다.
좀 어려워 보이지만, 그냥 대충 밟는 횟수 조건만 만족한 다음에 날아서 문으로 지나가면 되는 거였다.
아마 이걸 설계한 이들한테는 나는 능력이 희귀했던 모양이네.
마력이나 스택을 사용하지 못하는 제한이 있긴 했는데, 채린이 특성에서 비롯된 날개는 마력이나 스택 소모 없이도 날 수 있어서 인식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
"이제 마지막이다."
모든 퍼즐을 풀어낸 뒤에 도달한 마지막 방에는 유채화 헌터의 영상에서 본 익숙한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이 던전의 하이라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