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3 2장 - 유채린(3)
아니 저렇게 대놓고 짜증이 났다고 티 내고 있으니까 오히려 귀엽게 느껴지네.
내가 묶여있는 그녀를 보고 웃음을 터트렸더니, 뭘 웃냐면서 한 소리 들었다.
그나저나 저 사슬은 채린이 특성으로 해제가 안 되는 모양이네.
"제대로 설명도 없이 이런 곳으로 보내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정작 같이 있었던 너는 보이지도 않고."
"아니, 나도 어떻게 될지 알았던 게 아니야. 일부러 늦게 온 것도 아니고."
"정말?"
내가 굳이 그거 가지고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지 않겠냐.
애초에 내가 이걸 처음 해보는데 그런 상세한 것까지 알지 못하는 게 정상 아니냐며 그녀를 설득했다.
그리고 늦게 도착한 것 역시, 던전의 특성인 것 같다고 해명했고.
그제야 채린이의 표정이 조금이지만 풀어졌다.
"근데 왜 거기 묶여있어?"
"몰라, 문을 부수고 좀 보려고 들어왔는데. 갑자기 마력을 쓰지 못하는 상태가 되더니 그대로 묶였어."
"아...."
채린이는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 움직였었던 모양이다.
옆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니까, 제대로 되어있는 길이 아니라서 그녀를 묶어버린 거구나.
그래도 죽이거나 하지 않고 묶어만 두는 거면 꽤나 인도적인 처사네.
하긴 신화 던전은 마지막을 제외하면 이런 경우가 많지.
"하여튼 이거나 좀 풀어봐."
"기다려봐, 푸는 방법을 찾아야지."
굳이 이렇게 양쪽 방을 연결해둔 것을 생각한다면, 다른 동료가 여길 클리어할 때 데려가라는 의도 같은데.
그럼 저 사슬을 해제할 방법이 분명 준비되어 있을 거다.
사슬을 따라가다가 도달한 바닥에는 무언가 놓으라는 표식과 함께 글자가 적혀 있었다.
밖에 있었던 '증거'랑은 다른 글자니까 아까처럼 문이 부서진 파편을 가져오는 건 아닌 것 같고.
나는 조작 방법을 찾다가 우연히 손으로 바닥을 건드렸는데, 그 순간 바닥에서 빛이 나더니 사슬이 모래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냥 손을 올려서 동작시키는 거였나?
그런 거면 글자 말고 손바닥 모양을 그려놓으면 다른 언어 사용자가 이해하기도 쉽고 얼마나 좋아?
"어디 다친 곳은 없지? 손목이나 발목 괜찮아?"
"응, 괜찮은 것 같아."
일단 채린이랑 무사히 재회한 것만 생각해도 충분히 좋은 상황이었다.
지금 나는 이 던전이 어디인지도 알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공략에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꽤 챙겼으니까.
제일 고민인 것은 이 던전에 대해 채린이가 인지를 했냐는 부분이다.
솔직히 그녀가 그걸 알게 되는 것 자체가 변수라서 조심스럽긴 한데.
만약 모르고 있다가, 중요한 타이밍에 깨닫고 폭주하면 그게 더 큰 문제로 발전할 수 있다.
역시 이런 내용은 제대로 이야기를 해서 풀어놓고 진행하는 것이 낫겠지.
던전에서는 의욕이 없는 것보다는 예상치 못한 폭주가 일어나는 것이 더 위험하니까.
"채린아, 이 던전 혹시 어디인지 알고 있어?"
"...알고 있을 리가 없잖아. 너도 아까 모른다며."
"아니,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를 몰랐던 거지. 여기가 어딘지는 문 통과 하면서 알아냈어."
채린이는 별생각 없는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 던전이 유채화 헌터가 사망했던 던전일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를 꺼냈고.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나에게 대체 무슨 말이냐며 되물었다.
"설명한 그대로야. 너도 알고 있지? 유채화 헌터님이 희생하는 동영상."
"......."
"거기 나왔던 문자를 바탕으로 해서 첫 번째 문을 열었으니까,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해."
"그, 그냥 세계관이 들어맞는 던전일 수도 있잖아."
"그거야 그렇지."
당황한 채린이가 말을 버벅거리면서 현실을 부정하려고 했다.
저런 모습을 보고 나서야, 정말 이 던전이 그녀의 트라우마라는 사실이 와닿았다.
하지만 그런 만큼 이 부분은 더 확실하게 해놓고 넘어가야 한다.
"내가 이 던전을 들어오고 나서, 하나 알게 된 것이 있어."
"어?"
"이 던전은 네 트라우마를 통해 선택된 거야. 그래서 나는 유채화 헌터님의 사건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거고."
"......."
그냥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채린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조금 불쌍할 정도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어떻게 이곳의 문을 열었는지 담담하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채린이답지 않은 표정으로 아이처럼 떨고 있으니까 이상한 느낌이네.
"괜찮아. 괜찮아. 이건 그냥 똑같이 생긴 던전일 뿐이야."
"아, 응...."
"재현했다고 봐도 좋아. 그때 그 던전이 남아 있는 게 절대로 아니야."
무슨 말을 하면서 위로해야 할지는 확신이 생기지 않아서, 무작정 그녀를 껴안고는 토닥여줬다.
그녀의 상처가 정확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이상 섣부르게 건드릴 수 없으니까.
원래는 '웅 완전 공감해'를 이용해서 생각을 읽으려는 계획이었는데....
[대상에게는 해당 특성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처음 보는 메시지가 뜨면서 특성이 취소당했다.
혹시나 해서 실험해보니, 이 던전 내부에서는 채린이를 대상으로 특성을 사용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이건 조금 골치 아픈 문제인데.
"나, 나는...."
"너무 걱정하지 마. 첫 번째 문도 내가 어렵지 않게 열었잖아?"
"...응"
장비가 없어서 살짝 약해진 부분은 있지만, 우린 S급 헌터가 둘에 매니저까지 있는 상태고.
심지어 공략에 필요한 최소한의 데이터도 가지고 있어서 문제가 없을 거라는 것까지.
내 설명을 듣고 완벽하게 진정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훨씬 괜찮아진 모양이었다.
"그렇게 긴장해서 어디 전투나 할 수 있겠어?"
"...괜찮거든?"
"밥은 먹었어? 아까 나보다 훨씬 빨리 출발했다며."
"아직."
당연히 나라고 여기 들어오면서 뭔가 식량을 챙겨온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대신 마술도구를 이용해서 간단한 요깃거리 정도는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해본 말이지.
물론 이렇게 만든 음식은 마력으로 되어있어서, 실제 음식처럼 소화되는 것은 아니다.
근데 원래 헌터는 마력만 있어도 굳이 식사하지 않아도 버틸 수 있거든.
그냥 자기만족으로 식사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사기가 올라가는 효과가 있다.
이걸 그 사기가 올라가야 하는 본인이 생각하는 것도 웃기긴 한데.
그게 실제로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의외로 뭔가를 먹으면 힘이 난다고 하더라.
"알아서 리필되는 무한 컵라면이야."
"음식 선택 정말 센스 없네."
"원래 던전에선 이런 게 국룰 아니었어?"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냐? 요즘엔 다 정상적인 도시락 먹고 다녀."
그거야 매번 발주 넣고 있으니까 가장 잘 아는 게 나거든?
내가 말하는 건 어디까지나 그게 질릴 때 먹는 특식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만 회사에 남으면 야식으로 컵라면 먹고 그러는 거였나?
"원하는 거 있어?"
"달달한 거."
"케이크라도 만들어줘?"
"응."
생각해보니까 여자들은 단 걸 좋아하는 사람이 되게 많았지.
나도 달달한 과자류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럴 때는 단 것보다는 이런 짭짤하고 뜨끈한 라면이 더 좋은데.
하여튼 사람마다 취향이라는 건 너무 다른 법이라니까.
나는 쿡쿡 웃으면서 컵케익이 무한으로 나오는 컵을 만들었다가.
진짜 센스 없다면서 욕을 무더기로 처먹었다.
아니, 그래도 컵케이크라는 디자인 안에서는 그럴듯한 걸로 고르려고 종류를 티라미수로 했는데.
센스 없다고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이 바보야. 기껏 그런 능력을 그렇게 활용하니까 그렇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실용성 말고 디자인을 보라는 거지."
아, 그 부분이야 나도 신경 쓰고 싶지.
하지만 나는 이 특성을 오랫동안 갈고닦은 설아와 다르게 초보자란 말이야.
예쁜 케이크 상자 같은 디자인을 해줄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좋지는 않다.
그러다 내부에 있던 케이크가 폭발할 수도 있어.
정당한 이유가 있었던 탓에, 머릿속으로 변명을 하는 상상을 열심히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내가 실력이 없어서 못 한다고 하는 건 쪽팔리는 것 같아서 그만뒀다.
나중에 실력 쌓인 다음에 멋지게 만들어주면 좋아하겠지.
'표정도 꽤 밝아진 것 같고.'
주제 자체가 평범한 일상에 가깝게 돌아와서인지, 아까까지 유채화 헌터의 일로 무너졌던 멘탈이 많이 회복된 듯 보였다.
그나저나 먹기 전까지는 디자인 가지고 별 태클을 다 걸더니, 막상 먹으니까 표정이 녹아내렸다.
나는 라면 국물을 시원하게 들이켜면서 그녀가 헤실헤실하는 것을 구경했다.
"맛있게 먹을 거면서."
"크흠, 맛은 괜찮네. 완벽하진 않지만."
"마력으로 만든 가짜에 요리사 퀄리티를 기대하지 마라."
"나도 알아. 근데 좀 이상하다. 목이 좀 편안해."
"목?"
나한테 워낙 목으로 쾌감을 느끼는 교육을 많이 받았기에, 음식을 먹거나 마실 때마다 가볍게 가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뭔가 먹는 데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갑자기 그럴 수가 있나?
"혹시 내가 괴롭혔을 때 어떤 감각이었는지 기억나?"
"당연히 존나 힘들었.... 던 건 기억이 나는데. 어떤 감각이었는지는 좀 흐릿하네."
이상하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채린이에게 이런 현상이 없었다.
그 말은 저 현상을 일으키는 현상이, 지금 우리가 클리어하고 있는 이 던전과 관련이 있다는 건데.
'생각해보면, 특성의 대상으로도 채린이를 지정할 수 없었지.'
설마 '자궁의 맹약'에서 맹세를 증명할 때는 내가 특성에 의지해서 만든 관계나 조교 등이 무의미해진다는 건가?
꽤 가능성 큰 가설을 세우자마자, 나는 털이 우수수 돋는 것 같은 무서움을 느꼈다.
만약 아영이처럼 특성을 이용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녀석이랑 자궁의 맹약을 시도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채린이는 거의 나한테 하는 행동이 변한 것 같은 느낌이 없네.
조교에 대한 기억도 대부분 희미해져 있고, 그로 인한 신체나 정신적 반응도 사라졌다.
나와 친해진 기억 자체는 있지만, 사실상 원래의 채린이로 돌아왔다는 건데....
'조금만 시험해 보자.'
나는 이 상황이 혹시 어떤 변수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조심스럽게 채린이에게 다가가서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러자 채린이는 웃으면서 내 키스를 받아주고는, 오히려 즐겁게 내 쪽으로 혀까지 투입하며 진하게 타액을 교환해줬다.
"프흐.... 어때? 내 입술 달았어?"
"티라미수 향에 묻혀서 모르겠어."
"야! 아니 진짜 무드 없네?"
"농담이야. 농담. 존나 달았어."
그녀는 여전히 나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별문제는 없는 모양이네.
나는 그녀가 나에게 느끼는 감정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며 몸을 일으켰다.
"슬슬 갈까?"
"그래야겠지."
복도를 쭉 지나, 아까 봐두었던 다음 구역을 향해 걸어갔다.
맨 처음에 있었던 것과 비슷한 넓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마찬가지로 중앙에 출구로 보이는 커다란 문이 있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들어가는 쪽에도 문이 있는 걸 보면, 여기 들어가면 되돌아갈 수 없도록 문이 닫히는 구조네.
"몬스터가 나오는 시련."
"몬스터가 나오겠네."
우리는 동시에 정답을 중얼거린 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이런 식으로 전투를 해야 하는 공략이 채린이한테는 더 편하겠지.
"준비하시고...."
우리가 안으로 뛰어드는 것과 동시에 뒤에 있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입구와 출구를 제외한 모든 벽이 열리면서 몬스터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