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2 2장 - 유채린(2)
몸이 붕 뜨는 듯한 묘한 감각.
이전에 난이도가 낮은 던전에 들어가야 하는 시험에서 느낀 적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건 던전에 출입할 때 느껴지는 감각이다.
[대상에게 남아 있는 비틀림을 바로잡아, 당신의 맹세를 증명하십시오.]
[공간의 비틀림: 대상의 트라우마를 통해 만들어진 던전에 대상과 함께 갇히게 됩니다. 대상을 데리고 던전을 클리어하십시오.]
"이건 또 뭘 어쩌라는 거야?"
특성창을 통해서 나타난 것을 보면, 특성의 일부로 이루어진 기능 같은데.
맹세를 증명하는 세세한 방법은 만든 사람도 잘 모른다더니 꽤나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이걸 혜은이가 따로 구현한 게 아니라는 소리야?
'여기가 채린이의 트라우마를 기초로 해서 만들어진 던전이라는 거지?'
대체 어떻게 이런 시스템을 구현할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 배꼽뷰지라는 걸 만들려면 이 시련 비슷한 걸 통과해야 한다는 소리 같았다.
근데 설명에는 채린이도 같이 있다고 하던데, 왜 혼자서 던전에 도착한 거지?
'아니, 일단 던전 구조부터 살피자.'
어차피 지금 상황을 겪는 것은 처음이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다지 이상한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던전 공략을 하면서 상황을 살피는 것이 정답이겠지.
특성창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까, 던전을 공략하다 보면 발견할 수가 있을 거다.
"전형적인 미궁 형태인 것 같네."
일반적으로 던전의 내부는 그냥 다른 차원이라고 보면 될 정도로, 여러 가지 형태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고, 그만큼 연구도 많이 되어 있는 것이 미궁 형태였다.
이런 던전은 일반적으로 실내의 출발점에서 시작해서, 최종적으로 도착점이라는 곳에 도달하면 던전이 클리어되는 형태를 하고 있다.
계단을 내려가거나 올라가는 경우도 많고, 미궁이란 표현 그대로 미로처럼 길과 진행이 꼬여 있다.
길을 잘못 들면 다시 돌아가기도 해야 하며 함정을 이용해서 수시로 공략자들을 죽이려 들기도 하지.
'뭐 미궁 형태라는 말 자체가 너무 광범위하긴 해.'
미궁 안에서도 몬스터가 있는지나, 고난도 퍼즐이나 특정 능력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지.
다른 던전과 연계되는 스토리나 세계관 등의 연계 요소가 있는지.
미궁 마지막 방에 보스가 있는지 등으로 세세하게 나눠야 할 정도로 미궁 던전은 종류가 많다.
"내가 이걸 직접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특성을 사용하는 것처럼 마력을 뽑아내다가, 특성을 사용하지 않고 던전 바닥이나 벽에 마력을 부딪친다.
성질이 다른 마력끼리는 반발하는 특성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손이 튕겨 나갔고.
대충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실제로 해본 적이 없어서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10레벨인데도 이렇게 손이 날아갈 정도라니....
던전에 깃든 마력만 보고도 던전 난이도가 굉장히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긴 10레벨 둘이서 깨라고 만들어준 던전인데 난이도가 낮은 것이 더 이상하려나?
'음, 이거 재질이 뭐지? 엄청 고급스러우면서 단단한데.'
그래도 어지간한 던전에서 나오는 물질들은 알아보기 위해 공부를 많이 해놨는데.
이 던전은 정말 처음 보는 재질로 되어 있는 느낌이라서 여러모로 꺼림직했다.
대리석처럼 반들거리면서 색은 거무튀튀하고, 강도는 다이아몬드에 가까우면서 연성이 그렇게 낮지도 않았다.
당장 들고 나갈 수만 있으면 무기 만들 때 최고급 재료 취급받을 수준으로 대단한 녀석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 것으로 미궁을 이루는 건물을 도배해놨으니, 던전을 파괴해가면서 루트를 새로 만드는 건 불가능할 테고.
정석 공략만 그대로 따라가면서 진행하도록 유도되어있는 던전이네.
이건 좀 자유도가 떨어지는 셈이니까 공략자 입장에선 좋은 소식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훼손이 어렵게 설계된 녀석들은 대부분 특정 세계관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서, 신화 던전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난이도야 천차만별이긴 한데, 일반적으로 클리어 자체는 쉽지만, 누군가를 희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관련 사건도 듣다 보면 기분 나빠질 만한 내용이 좀 많았지.
근데 대체 무슨 트라우마가 있길래 이런 던전이 걸리는 거지?
'몬스터는 없고.'
신화 던전이라고 해서 몬스터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길을 여는 클리어 조건 요소 등으로 쓰인다.
그냥 무작정 막으려는 식으로 몬스터들이 배치된 것이 아니라, 몬스터들 자체가 어떤 목표 달성의 수단으로 설정이 되어 있다.
마치 무언가를 지킨다기보다는 도전자에게 시련을 내린다는 느낌이 강하다.
여길 클리어 하려면 이 시련을 해결해 보라는 듯한 느낌이지.
그래서 요즘엔 신화 던전이라고 판명이 나면 절대로 무리해서 클리어를 노리지 않는다.
최대한 천천히 던전이 의도하는 시련의 의미를 찾고, 여러 번에 걸쳐서 도전해 완벽한 성공을 의도한다.
그래야만 아무런 희생 없이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으니까.
"하, 진짜 예상 못 한 루트로 일을 하게 되네."
그리고 그렇게 던전의 공략 방법을 찾아내는 것은 항상 매니저들의 일이다.
물론 던전을 공략하는데 필요한 정보나 데이터는 모두 헌터들이 기록해서 돌아오는 거지만.
그래서 난생처음으로 그 작업까지 내가 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혀 있었다.
출발점의 방을 나왔더니, 밖은 강당과 비슷한 느낌의 공간으로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무언가에 파손되어 뜯어져 나간 듯한 문이 하나가 있었고.
다른 한쪽의 문은 공격받은 흔적은 있지만 파손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함정이네.'
아까도 말했지만 어지간한 힘으로 부술 수 없는 재질로 이루어진 던전인데.
거기서 굳이 두 개의 문 중에 하나만 부술 수 있게 설계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즉, 저기 강제로 뜯어진 문은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함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나저나 화력의 상태나 공격의 스타일을 생각하면, 이 문짝을 박살 낸 범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채린이 같은데.
확신할 수는 없는 부분이겠지만 채린이가 나보다 먼저 던전 공략을 시작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던전 중에서 출발 위치를 다르게 하거나, 일부 인원을 잠재웠다가 늦게 출발시키는 던전들이 있으니까.
이것도 그런 종류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채린이가 저게 함정이라는 걸 몰랐을 리는 없고."
함정인 것을 알면서도 자신감에 그냥 진행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일단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는지 구경하고 돌아오면 되겠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다만 이쪽에 돌아온 모습이 없는 걸 보면, 저쪽에 계속 길이 있어서 진행했거나....
'돌아오지 못하는 상태에 빠졌겠네.'
이건 좋은 상황은 절대 아니라고 보는 것이 맞았다.
어차피 내 최대 화력도 채린이랑 비슷하기에, 채린이가 벗어나지 못한 함정이면 나도 똑같이 걸릴 거다.
즉 저기 있는 같은 문을 그대로 통과하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바로 옆에 있는 이 깔끔한 문을 열어야 한다는 소리가 되겠는데.
문에는 별다른 표식이나 정보가 존재하지 않았고, 그나마 특이한 점이라면 이 강당 바닥에 그려져 있는 문양들인데.
딱 봐도 뭔가 사전 지식이 있어야 하는 퍼즐 느낌이라서 골치가 아파졌다.
원래라면 이런 데이터를 모아두는 서버에 접속해서 비교해가며 정보를 찾을 텐데.
지금은 그런 것 없이 오로지 이 던전 내에 있는 정보만 가지고 퍼즐을 풀어내야 했다.
아니 근데 분명 채린이의 트라우마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던전이 아니었나?
그럼 이게 채린이랑 관련이 있는 실존 던전이라는 건데.
아무래도 채린이가 들어간 던전은 대부분 유명해서 내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이 던전은 처음 보는 형태다.
채린이가 들어가지 않은 던전인데 트라우마가 있을 수 있나?
친한 헌터가 들어왔다가 못 나왔다거나 하는 그런 사건이라도 있....
'잠시만'
내가 이 던전을 보지 못한 이유가, 만약 이 던전이 굉장히 오래돼서 그런 거라면 어떻게 할까.
유채린의 어머니인 유채화 헌터는 대한민국의 희망이라고 불리던 S급 헌터였다.
그리고 그러던 그녀가 어떤 신화 던전에서 자신을 희생하며 클리어했다는 것은 헌터계에서 굉장히 유명한 사건 중 하나였다.
만약 유채린의 트라우마라는 것이,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그 던전 자체라면?
그리고 이 던전이 그 신화 던전을 그대로 복사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나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가정을 이어가며 그럴듯한 가능성을 완성해 나갔다.
"그래, 마지막 문장은 기억이 난다."
그 사건이 유명한 이유 중 하나는 유채화 헌터가 촬영하던 던전 공략 영상 데이터가 그대로 유출되었기 때문이다.
'나를 희생해 세상을 지킬 수 있다면?'이라는 마지막 질문이 던전에서 흘러나오고.
무언가가 적힌 석판을 빤히 바라보던 유채화 헌터는 고민 끝에 자신을 희생하기로 한다.
그 덕에 비슷한 던전에서 사상자 100만명을 냈던 기존의 결과와 다르게 아무 일 없이 던전이 클리어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때 유채화 헌터는 던전에서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래서 헌터의 행동 하나하나에 우르르 몰려가서 악플을 다는 한국에서도, 유채화 헌터는 성역 같은 존재라 아무도 건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마지막 석판에 적힌 말이 '나를 희생해 세상을 지킬 수 있다면?'이라고 가정한다면...."
나는 그 석판의 글자와 미묘하게 비슷한 바닥의 글자들을 보며 머리를 굴렸다.
아예 같은 글자는 없어서 연관이 없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어느 정도는 규칙을 알 것 같았다.
머리를 최대한 굴려서 그걸 어떻게든 끼워 맞추는 것이 가장 중요한 풀이 방법이었다.
맨 처음의 '나'를 의미하는 글자가 뒤집혀 있으니까, '너'라고 해석하는 편이 맞을 것 같고.
마지막의 '있다'는 끝부분이 조금 다르긴 한데 기본적으로 비슷한 느낌 뉘앙스다.
문제는 그 정도로 닮은 글자가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글자들인데....
"그나마 하나가 '지킬'이랑 비슷하게 생겼어."
'지킬'을 의미하는 글자에 뭔가 동그라미 같은 것이 더해져 있네.
근데 그 동그라미는 '있다'에 있는 거랑 동그라미랑 똑같이 생겼다.
'지킨'다는 의미랑 '있다'의 일부 의미가 뒤섞인 단어라는 것이 되는 건데.
"지킨다는 것이 존재한다. 약속을 지키다? 아니 그런 느낌은 아닌데. 약속을 지킨다는 '증거'? 그러면 좀 말이 되는데?"
만약 저 단어가 '증거'라면, 대충 바닥에 적힌 질문을 '네가 가진 어떠한 증거를 가져오면 문을 열 수 있다.' 정도로 예측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심지어 '증거'로 예상되는 단어는 질문 아래에 있는 묘한 공간에도 적혀 있었으니, 거기에 '증거'를 놓으라고 해석하면 딱 맞아떨어진다.
그냥 그럴듯하게 때려 맞출 뿐이지만, 원래 던전 공략의 분석은 다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법이다.
존나게 부족한 자료 안에서 번역을 시도해야 하니 어쩔 수 없지.
"증거 앞에 있는 단어는 '세상'이라는 단어를 반으로 쪼개고 위에 무언가가 그려져 있네."
세상 위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그럼 아까 찾은 단어가 '증거'라고 가정하면 문맥상 '강자'가 된다.
이렇게 되면 '네가 강자라는 증거를 가져오면 문을 열 수 있다.'라는 문장이 완성되는 셈이다.
어지간하면 이런 건 던전 안에 있는 물건을 요구하는 법인데, 나는 이제까지 여기 올려 놓을만한 특이한 물건은 보지 못했다.
나는 한참을 뭘 '증거'로 놓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채린이가 부숴놓은 문이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저걸 부술 정도면 강한 거 아닌가?
"아?"
나는 그 순간 '강함의 증거'가 뭔지 깨달았다.
채린이가 부숴놓은 문의 파편을 가져다가, '증거'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바닥에 올려놓자.
그곳에서부터 묘한 빛의 선이 이어지며 문 쪽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쿠구궁!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조금씩 열리는 것을 보고 나서야, 정답을 맞췄구나 싶어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진짜 여기서 아무것도 못 하고 늙어 죽는 줄 알았다.
"뭐야, 갑자기 미궁에서 왠 감옥 같은 디자인이...."
나는 문 너머의 상태를 살피다가, 아주 작게 들리는 인기척을 느꼈고.
조심스럽게 그 인기척이 느껴졌던 방향으로 걸어가서 상황을 살폈다.
"...뭐야?"
내가 도착한 곳에서 발견한 것은.
존나 빡친 표정으로 사슬에 묶여있는 채린이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