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페미헌터-97화 (98/289)

EP.97 9레벨 - 웅, 완전 공감해(11)

"역시 반응은 없고."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안에 있을 서은하가 반응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혜은이에게 받아온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가니, 전등이 꺼져서 온통 캄캄한 집 안이 드러났다.

분명 집에 틀어박혀 있다고 했었는데, 혹시 다른 곳에 가 있는 건가?

현관을 지나 들어가자, 마치 고급 바처럼 꾸며져 있는 거실이 드러났다.

여기서 유채린 팀이 자주 모이면서, 유채린의 취향에 맞는 모임 공간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진짜 이런 요소 하나하나에 서은하 자신이 들어가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드니까, 얼마나 심각할 정도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인지 느껴졌다.

"뭐야, 여기는 잠겨 있네."

이상하게도 방문이 잠겨 있었고, 집 내부 잠금장치의 열쇠는 나에게도 없으므로 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리였다.

이건 직접 잠그고 들어가서 저 방에 틀어박힌 거로 생각하는 편이 정답이겠지?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자신이 피해를 준다고 생각할 사람이다.

그런데 대체 얼마나 멘탈이 깨졌길래 이 정도로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는 거야?

"일단 『기울어진 운동장』을 해소하고...."

그다음에는 '웅, 완전 공감해'를 통해서 서은하의 생각을 읽어내기로 했다.

지금 당장 '해줘'를 써서 문을 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지금 그녀가 어떤 상태인지부터 확인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니까.

그런데 내가 특성을 발동하는 순간 어지러울 정도로 추운 한기가 몰아닥쳤다.

'죄송합니다. 유가족분들, 다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제가 그러지만 않았어도.... 이제야 착한 척하던 악마 같은 본성이 나왔더니, 맞는 말입니다. 저는 전혀 착하지 않아요. 그런데 착한 것처럼 이미지 메이킹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애미 없이 크고, 사람들이 성녀라고 떠받들어서 자만심에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해버린 게 맞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창녀 같은 년이 맨날 꼴리는 옷으로 팬들이나 끌어모은 것도 사실입니다. 전투복은 기본적으로 노출이 심하니, 당연히 그렇게 느낄 수 있겠네요. 거기까지는 미리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헌팅 얀데스의 회장님과 그런 외설스러운 관계는 아니지만, 그렇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때문에 여러분께 불편함을 느끼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부 제 잘못이니 회장님을 탓하지는 말아주세요. 저희 팀원들이 불쌍한 것도 맞아요. 제가 항상 신세만 지고 있습니다. 탈퇴해서 유채린팀에는 피해가 가지 않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사지 절단해서 묶어놓고 물약만 뽑아내는 공장처럼 써야 한다는 말도 맞아요. 그렇게 해서 여러분의 기분이 풀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목매달아 죽는 건, 심정은 이해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아직은 제가 쓸모가 있는 모양이라 차라리 아까 말 나온 것처럼 물약 공장으로 쓰이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그때 목을 매달고 죽겠습니다. 저를 믿던 여러분, 항상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굳이 저를 지켜주려고 하지 마세요. 전부 그들의 말이 맞아요. 제가 다 잘못한 거예요. 차라리 저를 욕해주세요. 사건이 이렇게 커지고 있는데도 의견 하나 피력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전부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수가 없어요. 맞아요. 제가 묻은 사건 때문에 억울함을 느끼셨을 모두에게 사과드립니다. 다 제가 잘못했어요. 전부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이제까지 자만심에 찌들어서 그게 더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거라고 멋대로 판단해서 일을 벌였으니까 다들 내가 미워도 어쩔 수 없는 거야. 항상 나는 그런 식이지 사람의 행복을 저울질해서 어떤 쪽이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할까 고민이나 하고. 내가 무슨 자격으로 소수인 사람들의 행복을 망치는데? 그러니까 결국, 이 사달이 났던 거잖아. 이번 사건도 내가 안전을 철저히 해달라고 이야기를 해뒀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지 않았을까? 결국 그들은 나를 믿어준 잘못밖에 없는 거야. 국가의 주장에 틀린 건 하나도 없어. 내가 공략에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거기서 그 공격을 피하지 않고 제대로 버텨냈더라면.... 그렇다면 애초에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전부 책임지는 것이 맞아. 나는 욕 먹어도 싼 년이니까 내가 들어야 해. 나는 왜 항상 이런 식이지? 왜 계속 실수를 반복하고 모두에게 상처만 입히고.... 그러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무서워, 무서워.... 내가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아. 싫어, 싫어, 싫어, 싫어...!'

한순간에 끈적끈적하고 더러운 감정이 온몸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그녀에게서 전달되어오는 폭주하는 생각들이 마치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송곳인 것처럼 심장을 찔러온다.

그저 저주의 말을 자기 자신에게 쏟아낼 뿐인데도, 그 생각을 읽는 나조차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누군가에게 붙잡혀서 이상한 것을 강제로 먹여지는 듯한 역겨운 감각이었다.

"우욱.... 시발 토할 것 같아."

실시간으로 악플을 읽으면서 그것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자신을 깎아내리고 반성한다니.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도움은 되겠다는 마음만큼은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 정도로 사람이 당했으면 오히려 저 사람들을 미워해야 정상 아니야?

왜 계속 자기 자신만 깎아내리는 건데?

"자신 탓 그만하고 문이나 오픈『해줘』"

결국 나는 그녀의 상태가 악화하는 것을 멈추기 위해서 특성을 사용했다.

지금 뭘 가려가면서 사용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러다가는 진짜 그녀가 국가 소속의 물약 제조기 및 공략 노예로 전락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은혁씨?"

문을 열고 나온 서은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의 새하얀 나신보다는 쥐어뜯어서 난리가 나 있는 머리카락과 눈물로 인해서 엉망이 된 얼굴이 먼저 들어왔다.

심지어 그녀의 뒤에 보이는 바닥에는 말라붙은 핏자국도 가득한 걸 보면 자해도 시도했던 것이 분명했다.

반쯤 죽어있는 그녀의 눈은 내가 아니라 들고 있는 휴대폰으로 향하고 있었고.

나는 결국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아서 쓰레기통으로 집어 던졌다.

"에, 에?"

"주접 그만 떨고 따라와요. 일단 좀 씻으셔야겠네요."

나는 그녀를 억지로 욕실로 끌고 들어와서 강제로 세수시키고 머리를 감겨주기 시작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그녀는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제, 제가 할게요. 이러면 죄.... 히익!?"

"그냥 아무 생각하지 말고 머리를 좀 쉬게 해주세요. 은하씨처럼 예쁜 사람 몸 씻겨준다고 힘들 남자 아무도 없으니까. 좋으면 좋았지."

오히려 이런 상황에 잘 모르는 남자가 자기 몸을 만지작거리는데 아무 반응이 없는 게 더 신기하다.

내가 그렇게 한다면 그 정도야 당연히 받아줘야 한다는 듯한 표정이네.

돌겠다 진짜.

"자, 눈 제대로 감으세요. 물론 눈 뜬다고 다치시진 않겠지만, 괜히 따끔하니까요. 일부러 자해한답시고 뜨고 있으면 저 마음 아파요?"

"...네"

샴푸 때문인지 은은한 장미 향기가 욕실에 퍼져나가고, 나는 어설픈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감겨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꾸 어두운 생각을 하려 할 때마다 등짝을 한 대씩 때려주면서 몸에 바디워시를 칠해줬다.

"진짜 이렇게 예쁜 몸을 그렇게 방치하면 몸이 울어요. 다른 사람 말고 자기 자신한테도 좀 미안해 보세요."

"저한테 그럴만한 가치는...."

"가득 차거든요? 서은하씨가 생명을 구한 사람만 참가해도 집회를 일으킬 수 있을걸요? 이렇게 논란이 기울었는데도 당신 쉴드치는 팬들이 괜히 있는 줄 알아요?"

"저, 저는...."

"가끔은 당신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생각하세요. 오히려 서은하씨가 이러면 이럴수록 상처받는 주변 사람들도 있어요."

그 와중에 나는 그녀의 가슴골 안쪽에 잘 보이지 않도록 작은 문신을 몰래 새겨두었다.

'모르면 공부하세요'의 문신으로, 내가 손뼉을 치고 말하면 그것이 적용된다는 설정을 담아놨다.

이따가 활용할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최대한 보이지 않는 곳에 새긴 것이었다.

"그건...."

"알고는 있죠? 하지만 마음처럼 안되는 거고."

"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잘못한 것 같아요. 분명 행동할 때는 그게 맞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면 잘못된 선택투성이였네요. 아니, 애초에 제가 그것밖에 되지 않으니까 주변 사람들한테도...."

"어휴...."

나는 한숨을 쉬면서 그녀의 몸에 있는 거품기를 씻어냈다.

어떻게 사람이 이리 부정적일 수가 있지?

그래도 저번에 만났을 때는 착하기는 해도 이렇게까지 심하진 않았는데.

"이 자랑스럽게 커다란 가슴도 있고, 머릿결도 이렇게 좋은데다, 피부까지 이런 건 반칙 아니에요? 진짜 이런 몸을 가지고 어떻게 그리 자신이 없어요? 심지어 S급 헌터가?"

"하, 하지만...."

"그래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거죠? 알아요. 일들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으시는 것도 알고요."

그래도 이제까지는 그녀가 가지고 있던 신념이 그녀를 지켜왔는데.

이번 사건과 악플 때문에 그 신념조차 무너질 정도로 사람이 망가져 있었다.

아마 정부 새끼들은 고의로 서은하를 이렇게 망가트릴 생각이었을 거다.

그다음에는 그녀를 천천히 가스라이팅해서 자신들의 노예처럼 부려 먹을 생각이었겠지.

쓰레기 새끼들.

"이거 머리핀은 여기다 끼는 거죠?"

"아, 네...."

드라이기로 그녀의 머리를 말리고, 평소 그녀가 하고 다니는 머리 스타일을 최대한 복구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는 거실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나저나 그녀가 자책하지 못하도록 특성까지 걸어둔 상태인데, 이렇게 해도 그녀의 멘탈이 나아지질 않네.

'...거기서 내가 그 공격을 맞았더라면'

자책을 막아놨더니, 이번엔 과거를 회상하면서 후회를 한다.

다른 방법까지 써가면서 자신을 끌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자신에 대한 애정이 부족한 사람이라니까....

물론 사람이 후회하는 생물이라곤 하지만, 저건 후회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거 제대로 된 선택이었으니까 후회하지 마세요."

"...네?"

"아, 티가 났어요. 그 공격 왜 안 막았나 후회하셨었죠? 그러실 필요 없어요."

"......."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나는 이 사람이 뭘 하고 있어야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질까 고민하다가, 그녀 뒤에 쌓여있는 술병들에 눈이 들어왔다.

물론 헌터가 술을 마신다고 해도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취하지 않지만, 그래도 유채린처럼 술의 맛 자체를 즐기는 사람은 꽤 있었다.

그리고 여기는 유채린을 비롯해서 팀원들과 즐거운 자리를 가지는 곳일 테니, 술을 마시는 것 자체는 그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같이 한잔하실래요?"

"...술 좋아하세요?"

"싫어하진 않죠. 술을 좋아하시나 봐요? 집에 이런 장소도 있고."

"...채린이가 좋아해서요. 저도 싫어하는 편은 아니에요."

'팀원들이랑 마시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되게 좋았는데....'

오케이, 정답.

나는 꽤 비싸 보이는 보드카 하나를 꺼내와서, 칵테일 잔으로 보이는 것에 적당히 따랐다.

처음 보는 거긴 한데.... 유채린이 가져다 놨을 테니까 좋은 술이겠지.

그녀에게 잔을 건넨 뒤에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이거 마시면서 좀 취합시다."

"에이, 이거 마셔서 어떻게 취해요."

그녀는 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내가 아까 걸어둔 특성 때문에 정말로 취하게 될 거다.

실제로 그녀는 별생각 없이 술을 들이켜다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눈에서 초점을 잃어버렸다.

그리고는 점점 얼굴이 구겨지더니, 이제는 눈에서 물방울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너무, 힘들어.... 아파, 괴로워.'

고통이라면 다른 사람의 것만 신경 쓰던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괴로움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술기운에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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