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6 9레벨 - 웅, 완전 공감해(10)
콰강!
굉음과 함께 사무실에 설치되어있던 가벽이 우르르 무너진다.
휘둘러졌던 유채린의 주먹이 화를 참기 위해서 부들부들 떨린다.
평소였다면 이미지 관리를 하는 유채린이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만약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나만큼은 그녀의 본성이 드러났다면서 속으로 씹고 있었을 터다.
하지만 그런 나도 오늘만큼은 그녀의 감정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야, 시발. 우리가 대충대충 싸웠냐? 내가 어이가 털려서 할 말이 없네. 뭐? 실패한 원인을 찾아? 시발 지들이 뭔데?"
"채린아, 진정하고...."
"진정? 진정하게 생겼어? 은하야, 이게 우리가 받아야 할 취급이야? 다른 나라들이 우리를 영웅이니 뭐니 할 때, 한국에선 우리를 헌터라고 부르니까 진짜 뭐 용병인 줄 아는 거 아냐?"
유채린은 다 찢어져 가는 자신의 장비를 추스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격분했다.
서은하를 비롯한 혜은이와 혜미까지 모두의 장비가 넝마가 되어있는 상태.
그들은 조금 전까지 최전선에서 싸우다가 돌아온 분명한 영웅들이었다.
던전이 등장한 초기에 한국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빠르게 던전과 특성 시스템에 적응했고, 그로 인해서 땅덩어리에 비하면 엄청난 헌터 강국이 되었다.
각성자라는 이름을 각성 범죄자와 확실히 구분 짓기 위해 헌터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도 그때의 일이다.
하지만 빠른 발전으로 인해 헌터라는 직종은 자신들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고, 심지어 돈을 많이 버는 부러운 직업으로 인식이 박혀버렸다.
오히려 헌터라는 자리가 시기와 질투를 낳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자리는 본래 영웅으로 불려 마땅한, 목숨을 걸고 모두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이들의 자리다.
다른 나라에서도 대부분 헌터를 영웅으로 취급하지, 이딴 취급을 하면서 국뽕은 오지게 채우는 이상한 나라는 여기 밖에 없을 거다.
당연히 시스템이 안정화된 한국인 만큼 헌터로 활동할 때 돈을 가장 잘 벌긴 하지만, 사고만 터지면 문제를 전부 헌터들에게 떠넘기곤 했다.
"뭐? 실패한 원인을 분석해서 책임자를 규명해? 던전이 장난이야? 맨날 연예인 부려 먹듯 부려 먹으니까 우리가 개 호구로 보이나?"
"채린아...."
"야, 막말로 우리 팀이 그대로 외국으로 가면 오라는 곳이 널렸어. 그놈의 빌어먹을 애국심으로 빌붙어주면 고마운 줄을 알아야지. 이딴 취급을 한다고?"
유채린팀의 공략 실패.
그리고 그 던전의 던전 브레이크.
그로 인해서 벌어진 혼란과 사상자들.
정확히 말하자면 유채린팀이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공략에는 최선을 다하여 임했고, 공략에 실패한 직후 피곤한 몸으로도 던전 브레이크를 해결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세계 최고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다는 S급 헌터들의 전용 장비가 저렇게 찢어질 정도면, 유채린팀이 얼마나 고생했을지가 눈에 훤했다.
이번 일은 연전연승이었던 유채린팀의 능력을 국가도 국민도 너무 심하게 믿었던 것이 문제였다.
당연히 일정 수준 이상의 던전이 있다면, 그것도 브레이크가 가까워진 던전이라면 대피를 하는 것이 상식이다.
던전 관리에 있어서는 당연한 기본기나 마찬가지인 내용.
하지만 유채린팀이 들어가니까 무조건 클리어하리라 믿고 기본 규칙 자체를 무시했으니.
던전 브레이크가 나자마자 대형 사고가 터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단번에 클리어하지 못한 유채린팀의 잘못으로 책임 떠넘기기를 하는 거였다.
"그대로 말해봐야 우리만 욕먹을 뿐이야. 채린아 조금만 더 냉정해지자."
"그래, 우리도 미안해, 공략 성공 못 해서 미안하고, 피해자들 안타깝지. 근데 우리가 뭘 안 했냐? 우리가 시발 대충 싸웠어? 온몸을 바쳐가면서 싸웠는데 이게 말이 되는 대우야?"
"말이야 안되지...."
혜은이도 딱히 반박할 방도가 없는지 한숨만 푹푹 쉬기 시작했다.
물론, 이건 한국 내에서는 거의 관례처럼 박혀있는 책임 떠넘기기였다.
다만 그것은 대부분 하급 헌터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이었을 텐데, 이번 사건은 진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들이 많았다.
아무리 그래도 S급 헌터가 둘이나 있는 국가 최대 전력을 이런 취급을 한다고?
너무 황당한 상황이라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게 이상할 정도로 당당하니까 국민들도 정말 뭔가 잘못이 있는 줄 알고 유채린팀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뭐, 뉴스? 뭔 뉴스를 보라는.... 잠시만 기다려봐."
그 와중에 또 뭐가 떴는지 유채린은 잠시 분노 표출을 멈추고 휴대폰으로 뉴스를 확인했다.
그리고 기사 내용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구겨지는 표정이 기사가 어떤 내용인지를 대충 짐작하게 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황당한 내용이길래 저렇게까지 반응하나 싶어서 나도 휴대폰을 켰고.
나는 방금 발표했다는 정부의 입장문을 읽으면서 뒤통수를 처맞은 기분이었다.
"아니 시발, 지랄하고 있네."
공략 영상 일부를 공개하며, 공략 도중에 서은하가 공격 한 번을 받아내지 못한 것을 원인으로 본다는 어처구니가 없는 주작질이었다.
혜은이가 거기 공략 짜는 걸 나도 도왔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실제로 그걸 받아냈다면 공략이 조금이나마 유리해졌을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과 공략 실패의 제대로 된 연관관계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정말 저걸 받아내지 못해서 공략에 실패했다고 치자, 그게 왜 서은하 잘못이지?
서은하가 무슨 탱커야?
가끔 서은하가 팀이 위험하면 몸을 대서 자힐로 버티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몫을 넘어서는 행위다.
자칫하면 목숨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것을 정신력으로 버텼던 숭고한 행위.
근데 지금 그걸 못했으니까 서은하가 잘못한 거라고?
그냥 궤변인데?
"아니야, 은하야 보지 마."
"뭔데 그래."
"제발, 은하야. 너 절대로 인터넷 열지 마. 한동안 인터넷 금지야."
오히려 화를 내던 유채린이 당황해서 서은하를 말릴 정도로 어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사실 거기까지라면 그냥 말도 안 된다고 싸우기라도 했을 텐데....
이 새끼들도 저게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아는지 여론전까지 시작하고 있었다.
[성녀의 민낯? 그녀가 숨겨온 비밀은?]
[서은하, 헌팅 얀데스와 유착 관계....]
[유가족들 오열 중인데.... 이번 공략의 실패 원인은 서은하의 실수?]
뜬금없이 쏟아져나오는 서은하에 관한 의혹 기사들.
이건 그냥 서은하를 묻어버리겠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까지 서은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이유는 간단하겠지.
'그걸 받아줄 만한 사람이니까.'
이미 그들도 서은하의 호구력은 잘 알고 있는 거다.
그래서 아무리 이런 악성 기사를 뿌려가며 서은하에게 죄를 뒤집어씌워도.
서은하는 자신의 잘못이라면서 자책을 하지, 그들에게 죄를 묻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 거다.
이제까지 뭘 믿고 이렇게 하나 했더니, 전부 서은하의 인성을 믿고 이러는 거였어?
심지어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일반인들은 이런 상황인데 입장조차 내지 않고 있는 서은하를 욕하고 있었고.
소수의 관계자만 익명으로 저걸 막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설명을 던져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거로 여론이 바뀔 리가 없지.'
그나마 여기서 맞붙으려면 서은하가 직접 싸우던가, 아니면 유채린이 나서야 하는데.
문제는 서은하는 기껏해야 저런 의혹들을 던져주는 게 전부지만, 유채린은 터질 게 워낙 많다는 거다.
정말 정치적으로 매장당할 수도 있어서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다.
물론 유채린의 성격상 그걸 무시하고 달려들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가 유채린이 매장되면 그건 그것대로 서은하가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할 것이 뻔했다.
완전 외통수네.
"하, 돌겠다...."
그러니 유일한 해결 방법은 서은하를 설득해서 그녀가 직접 정부랑 싸우게 하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해결할 수가 없다.
"보여줘."
"은하야...."
"어차피 대충은 예상이 가니까, 그냥 보여줘."
그리고 결국 서은하는 그들의 예상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용히 입장문을 읽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더니, 맞는 말이라며 자신을 자책하기 시작했다.
"분명 내가 그걸 맞을 수 있었어."
"그랬다간 또 한동안 앓아누웠을 거 아니야! 심지어 그거 때문에 공략이 클리어되지 않았다는 인과관계가 없어!"
"그건 맞아. 은하야, 잘 생각해."
"설령 나한테 잘못이 없다고 해도, 굳이 국가의 안정성이나 유채린팀의 안정성을 의심하게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그냥 내가 전부 책임지면 모든 게 끝이잖아. 그게 가장 많은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이야."
"너야말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네가 왜 책임을 져!? 야, 서은하. 네가 뭘 잘못해서 책임을 지냐고! 진짜 돌아버리겠네!"
와 진짜 답답해서 죽을 것 같네.
오늘만큼은 서은하를 때리지 않고 참고 있는 유채린을 존경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랜만에 그녀가 제대로 된 영웅으로 보였다.
이걸 참아?
"아마 이런 분위기면 팀에서 내보내고 단독으로 운영할 가능성이 커. 사실상 그걸 노린 거겠지. 그 뒤에는 이제 공략할 때만 활용하고 공식 기사에서 네 이름을 뺄 거야."
"상관없어. 그거로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러다 문제가 터질 때마다 사실 네가 참여했다면서 또 너한테 뒤집어씌우고. 그렇게 살겠다고?"
"응."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서은하가 사실은 누구보다도 그런 말들을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유 없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에도 자신을 자책하는 사람이니까.
이런 다량의 악플과 추측성 기사들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번에 악플 좀 달렸다고 그렇게 힘들어했으면서. 여론을 등지겠다고?"
"상관없다니까. 어차피 다 사실이니까."
"...야!"
"이번 공략에서 내가 저 공격을 막지 못해서, 공략에 실패하는 것에 일조한 건 사실이지?"
"그건 막지 못하는 게 정상이라니까!"
"아니, 막을 수 있었어. 나는 알아."
그렇게 말하고 있는 서은하의 표정은 누구보다 괴로워 보였다.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너무나 지독하게 쏟아져나와서 어찌할 줄 모르는 모양새였다.
"여기 있는 민낯 기사처럼 시끄러워지는 걸 원하지 않아서 피해자들의 아픔을 그냥 묻어버렸던 것도 사실이야."
"전부 피해자한테 허락 맡았잖아. 오히려 그들이 원했던 걸 네가 이뤄준 거잖아!"
"그래도 결국 진실을 숨겼고, 그게 드러났으니 실망하게 만든 건 맞잖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리고 내가 헌팅 얀데스의 회장님이랑 아는 사이인 것도 사실이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것도 사실이잖아."
"그거 대부분은 내가 부탁한 거잖아!"
"어쨌든 내가 했고, 실망한 사람들도 있어. 그럼 내가 욕을 먹어 마땅해."
차라리 서은하가 이런 여론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그 선택이 아름답고 숭고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힘들어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겨우 자신에게 욕설 하나만 날아와도 상처를 받고 이유 없는 사과를 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어떻게 그녀에게 그런 무거운 짐을 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유채린팀의 모두는 그녀를 말렸지만, 그녀는 끝까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아직도, 소식 없지?"
"...응"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
여론은 완전히 굳어져 서은하를 천하의 쓰레기로 만들어가고 있었고.
서은하는 집에서 틀어박힌 채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
"은혁아, 부탁할게."
"부탁 안 했어도 내가 했을 거야."
나는 저렇게 선량한 사람이 당하고만 있는 걸, 그냥 지켜볼 수 있을 만큼 참을성 좋은 성격이 아니었다.
그게 가능했으면 애초에 유채린이랑 척지지도 않았겠지.
"좀 이기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저 인간은 좀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특성을 써서라도.
저 서은하라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