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8 9레벨 - 웅, 완전 공감해(2)
나는 순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멍한 상태를 유지했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쾌감이 한계를 벗어나면, 그 사람은 그 이후를 굉장히 두려워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수준까지 넘어선다면 그 사람은 몸에서 보석 비슷한 게 튀어나온다는 거지?
"...심지어 지금 각성이 취소된 것 같은데?"
원래 H컵 정도로 크게 부풀어있던 가슴은 A컵 정도로 쪼그라들었고.
아까라면 문제없이 버텼을 복부의 상태 또한 심하게 찢어져 있었다.
아무리 약으로 신체를 약화했어도 하위 헌터 수준의 튼튼함은 있어서 버티고 있었는데.
지금은 일반인 수준으로 연약해져서 터져나갔겠지.
"공주야!"
"하고 있어!"
일단 대충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공주가 시간을 돌려서 원래대로 되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찢어져 나간 배가 원래대로 되돌아가긴 해도, 아까 그 보석이 나타나기 이전으로는 되돌아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특성도 먹히지 않는 걸 보면 각성과 관련된 법칙이 분명했다.
"이런 게 있었다고?"
결국 공주는 억지로 알을 꺼낸 뒤에 알을 제외하고 시간을 돌리는 섬세한 방법을 사용했고.
겨우겨우 강아리가 죽지 않는 상태를 만들어 놓을 수 있었다.
공주가 옆에 없었으면 그대로 죽었겠네.
"생각하고 있는 게 맞을 거야. 원래라면 얘는 여보 손에 죽을 예정이었어."
"...고의는 아니었어."
죽어도 큰 상관은 없겠다고 생각한 건 맞았지만, 정말 죽으라고 이런 일을 행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이렇게 각성이 취소될 줄도 몰랐지.
나는 원래 강아리를 계속 S급 헌터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아까 그 보석은 대체 뭐였으려나."
"모르겠어요. 저도 그런 보석은 처음 보는데요?"
손으로 만지니까 반응해서 내 몸으로 들어온 것 같았는데....
실제로 그 타이밍에 이제까지 막혀있던 벽이 무너지고 레벨업을 했다.
마치 혜미가 나에게 부러진 뿔을 제공해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일단 그 보석 같은 걸 만지니까 레벨이 올랐어. 강제로 벽을 부숴준 것 같아."
"벽을 부수는 물건이라...."
"이미 10레벨인 녀석을 소모해서 만드는 것 치고는 너무 아쉬운 효과긴 하네."
다만 앞으로 활용할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
굳이 각성 박탈 수술을 없이도 각성 상태를 제거할 수 있고.
구제할 수 없을 정도의 나쁜 녀석인 경우엔 일부지만 재활용할 구석이 생기는 거니까.
"혹시 모르니까 새 특성만 확인해 볼게."
[웅, 완전 공감해(F)
대상의 생각을 일부 읽어내고, 시전자가 공감하면 그 생각을 강화한다.]
"생각을 읽는 거구나? 만약에 내가 원하는 대로 생각을 했으면 그것도 더 강화하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상대의 생각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능력이다.
그러면서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파악할 수 있고.
꽤 괜찮네.
근데 이 정도면 일부러 그러는 건가?
전투랑 관련된 특성은 하나도 나오질 않는 것 같은데.
흐음.....
"아까 놀라서 특성들을 해제했는데.... 좀 깨워봐야겠다. 야, 『힘조』"
"흐으...."
힘겹게 눈을 뜬 강아리가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떠한 원망도 고통도 담겨있지 않았고.
그저 강렬한 의문만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주위를 둘러보기만 했다.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혹시 정말로 머리에 문제가 생겼나?
"『웅, 완전 공감해』"
강아리는 내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고.
나는 참지 못하고 새 특성을 걸어서 생각을 읽기로 했다.
'해줘'를 써도 비슷한 효과를 얻겠지만, 어떤 능력인지 테스트하는 것을 겸해서 사용한 것이었다.
'몸이 이상하네, 분명히 감각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하지만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아.'
그리고 내가 읽어낸 내용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감각 자체는 느껴지지만, 그것으로 인한 감정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거다.
'분명 기억 속에선 이 알이 굉장히 소중했었는데.... 왜 지금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지? 어떻게 된 거야...?'
평범하게 생각하면 무섭게 느껴질 법한 일이지만, 그녀는 무섭다는 생각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지.
그리고 나는 이걸 처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었다.
묘설아.
설아가 가지고 있던 증상과 완전히 같은 상태였다.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설아가 그런 상태인 것도 이것과 관계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주야, 이걸 나 말고 다른 이들도 성공했을 가능성이 커."
"왜?"
"설아가 가지고 있는 증세랑 똑같아. 설아는 분명 어릴 때부터 이런 상태였다고 했거든."
그럼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이미 이 보석을 추출하는 방법을 알고, 어린 설아에게 시도했다는 것이 된다.
그래서 설아는 감정을 잃어버리게 되었던 거고.
이건 진짜 생각도 못 한 결과인데.
'그런데, 이상해.... 왜 저 남자만 보면 미세하지만, 짜증이 나지? 다른 그 어떤 것에서도 짜증이 날 않는데.'
"나한테 짜증이 난다고?"
그건 감정의 일부다.
생각해보면 설아도 나한테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혹시 나한테 그 보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감정을 주는 능력이 있는 건가?
특성창에 나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애액에 신비한 효과가 깃드는 것처럼 각성자들은 특별한 힘을 가질 수도 있으니까.
이것도 좀 연구해 봐야겠네.
"조금 골치가 아파지겠네. 공주 네가 있어서 S급 헌터 자체는 공백이 없겠지만.... 근접 쪽이 중요한 던전에선 고생이겠어."
"뭐, 그건 어차피 금방 해결될 거야."
"그래?"
아마 공주는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하는 말이겠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서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아, 일단은 좀 착하게 살게 해볼까?"
나는 설아에게 걸어줬던 '모르면 공부하세요'의 설정을 떠올렸다.
만약 정말 똑같은 증세라면 같은 방법으로 해결해줄 수 있을 테니까.
강아리가 바라보는 모든 대상에게서 그 감정이나 감각을 예측한다.
그리고 그 결과의 감정을 자기 자신이 똑같이 느끼게 된다.
즉,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짜증나....'
특성을 걸면서 그녀에게 혐오의 감정을 내비치자, 그녀의 머릿속에도 비슷한 감정이 떠오른다.
이번에는 최대한 그녀에게서 눈을 돌리고, 공주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더니.
행복에 가까운 감정이 그녀의 마음속으로 튀어나왔다.
"나 말고 공주를 주시『해줘』"
그리고 공주에게 부탁해서 비슷한 실험을 진행했는데.
이번에는 뜻밖의 결과가 튀어나와서 깜짝 놀랐다.
'.......'
그녀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나와 관련된 것이면 성공적으로 효과가 발동했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감정에도 동조하지 못했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설마 설아도 비슷한 상황인 건가?
하지만 최근 들어 설아는 평소에도 조금씩 감정이 생겨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설마, 이게 전부 내 감정에서 비롯된 거라서 가능한 거야?'
정말 나에게 뭔가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건 나중에 설아에게 부탁해서 추가적인 검증을 하기는 해야겠지만.
굉장히 충격적인 결과였다.
"아, 머리 아파...."
"내가 마무리할 테니까 여보는 들어가서 쉴래?"
"아니야. 아직 장부 속 애들 조지는 게 남아있잖아."
장부를 다 구했으니 나중에 해도 되겠지만, 지금은 전부 끝을 내놓고 쉬고 싶었다.
그리고 이 녀석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대충 가닥이 잡혀있는 상태였다.
"아이들 괴롭힐 때 사용했던 시스템 전부 그대로인 거지?"
"이거 개조해서 쓰게?"
"성인 여성들 위주로 최대한 비슷한 방식으로 동작하게 만들자."
그래서 결국 전부 다 노예로 전락하게 할 생각이다.
한 번에 다 사라지면 이상하니까, 조금씩 진행하면 되겠지.
이렇게 완벽한 시스템이 완성되어있는 데 써먹지 않으면 아깝잖아.
"저번 사건이랑 마찬가지로 상식개변을 활용해야겠지."
'나 머리가 띵했어'를 이용해서, 당연히 이곳에 참여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물론 그냥 납치하는 편이 반응이 좋겠지만....
'이쪽이 훨씬 편하지.'
납치되어 실종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고 떠나는 것.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이러한 가출 사건이 가장 쉽게 묻히는 법이니까.
"이 정도면 이번에 참가한 애들한테 암시는 다 걸었고.... 얘들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서 게임 구동하는 건 문제 없을 것 같아?"
"워낙 강아리가 준비를 잘해놓아서 괜찮을 것 같아."
이제 이전에 참여한 이들에게도 암시를 걸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건 나중에 설아에게 부탁해서 최대한 빠르게 진행해야겠다.
그나저나 대체 고객 목록에 남자는 왜 있는 거냐?
"이건 어디다 쓰지...?"
"굳이 따로 나눌 필요 있어?"
"그건 또 그렇네."
지가 게이라서 이런 곳에 참여한 건데, 그럼 자기가 게이로 팔려나갈 것도 예상했어야지.
내가 그것까지 예외를 두면서 생각해줄 필요는 전혀 없을 것 같았다.
"이제 정말로 쉬러 가도 괜찮아."
"알았어. 남은 처리는 부탁할게."
"응."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아이들을 모아둔 방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다친 아이들이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네.
진짜 걱정돼서 죽는 줄 알았는데.
"얘들아. 괜찮아?"
"은혁이 형아?"
"태웅아!"
어이고, 우리 귀여운 새끼들.
이곳에서 생활했던 시간이 굉장히 무섭고 힘들었는지.
나한테 우르르 달려와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굉장히 마음이 아팠다.
내가 빨리 와서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그만큼 너희들이 힘들었던 건 사실이고.
다른 걸 포기하고 너희들부터 구하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미안해.... 형이 늦어서 미안하다."
"으하앙...!"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아이들은 서러웠던 감정이 폭발해서 한참을 울었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이후에야 아이들을 끌고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거 출입구가 뒤쪽에 하나가 더 있었네.
"원장님."
"얘들아...."
"원장니이임!"
[희망 보육원]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원래의 형태를 복구한 고아원의 상태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안에 있었던 여자아이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서 남자아이들을 위로해주기 시작했다.
다들 착하다니까.
"은혁이 형아, 은서 누나가 없어. 화장실에 갔나?"
"아, 은서 누나는 헌터가 되기로 했거든."
"헌터?"
"그래."
여인위의 시설에 남아서 각성 능력을 키우기로 한 여자아이들에 대해 설명을 해야 했다.
본인들이 선택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헤어진 것이 아쉬운 모양인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많이 침울해졌다.
"나중에 시간 내서 다 같이 응원하러 가자. 다들 기뻐할 거야."
"응!"
미리 원장님에게 부탁해서 주문한 음식들이 도착했고.
아이들은 즐겁게 음식을 먹으면서 힘들었던 기억을 지워내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저한테도 이 아이들은 이제 너무 소중한 아이들인데요."
그렇게 힘든 일을 겪었는데도, 최대한 밝은 척하려는 모습이 보여서 오히려 아이들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야.
"은혁이 형아도 같이 먹자!"
"그럴게."
태웅이가 입가에 치킨 양념을 잔뜩 묻힌 채로 나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지키고 싶었던 일상을 지켜냈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나는 기쁜 마음인데도 오히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