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5 8레벨 - 기울어진 운동장(1)
"정아야!"
"네, 네!?"
얘는 저번에 설아 사건 때도 입을 꾹 다물더니.
이번 일에도 비슷한 반응이네.
평소에는 마조력 때문인지 쿨하고 장난스러운 분위기인데, 심각한 일만 터지면 혼자서 끙끙 앓는다.
"아직도 많이 무서워? 미안하다. 내가 정액 넣으면 감도 오르는 건 말렸어야 하는데."
"아, 아니에요. 제가 한다고 한 건데요. 그것보다 저야말로 매니저님 마음 쓰게 해서 죄송해요."
차라리 평소처럼 잘못했으니까 매도해달라고 해.
오히려 그렇게 반응하니까 뭐라고 못하겠잖아.
"나는 오히려 고맙거든? 덕분에 경험치도 99퍼고."
"어, 그래요? 이번에도 벽에 걸리셨나 보네요."
"익숙해."
저번에 바로 레벨업 했던 것이 신기한 거다.
하여튼 정아 덕분에 경험치가 금방 가득 찼고, 이번 주말은 마음 편하게 푹 쉴 수가 있었다.
오랜만에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쉬었더니 힘이 나더라.
'뭐, 아영이는 주말에 데이트해달라고 난리긴 했지만.'
너무 졸려서 그냥 무시하고 잤다.
최근에 워낙 신경 쓸 일이 많아서 피곤했단 말이야.
나도 좀 쉬어야지.
"그래서, 무슨 일인데?"
"조금 걸리는 게 있어서요."
"걸리는 거?"
"별건 아니에요. 확실해지면 말씀드릴게요."
정아는 기본적으로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성격이라 그런지, 저러면서 맨날 대답을 회피하려고 했다.
근데 좀 이상하네.
그냥 내가 말로 매도만 해줘도 좋아할 정도로 심한 마조인데, 그 성취향이 저 성격이랑 매치가 가능한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는 워낙 정아의 마조력에 압도당해있어서 가볍게 넘어갔는데.
이번 사건을 생각해보니까 마음에 좀 걸렸다.
"정아야. 말해."
"......."
"말하라니까?"
"시, 싫어요."
역시 어제 있었던 일이 그녀에게 미친 영향이 큰 모양이었다.
기억을 지워서라도 극복하게 해줘야 하나?
아니면 얘가 극복하길 기다려줘야 하나?
"하아, 부탁할게."
"...특성 쓰시면 되잖아요."
"뭐?"
"특성 써서 억지로 말하게 하시면...."
"그럴 생각 없어."
물론 지금 이렇게 말하지 않고 버티는 게 좋은 상태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런 방법까지 쓰고 싶지는 않았다.
뭐, 확실히 그녀가 위험하다고 확신이 들면 써서라도 들어야겠지만.
"왜요?"
"나는 정아를 믿으니까. 말해줄 때까지 기다릴게."
"...치사해요"
"뭐가?"
정아는 말없이 나를 조용히 껴안았다.
그리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냥 귀엽다고 생각하면 좋았을 텐데, 그녀의 커다란 가슴이 나를 꾹 누르면서 야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미치겠네.
이런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상대를 유혹해버리는 몸뚱아리라니.
정말 감탄스럽다.
"솔직히, 아직도 무서워요. 또 그런 수준까지 도달할까 봐. 그래서 힘조도 더는 걸지 말아 달라고 했던 거고요."
"알고 있어."
"근데, 그 순간에 이상하게 설아 생각이 나더라고요."
"설아...?"
여기서 갑자기 설아가 나온다고?
어제 일이랑은 아무런 관련도 없을 텐데.
저번에 설아가 정아를 가둬둘 때 너무 아프게 맞아서 오버랩된 건가?
아니면 그때 설아가 원격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려나.
"정확한 건 모르겠어요. 아까도 설아를 보는데 굉장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면서...."
"안타깝다고? 그건 좀 이상하네."
너무 뜬금없는 감정이잖아.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정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보세요. 모르겠죠? 그래서 말 안 하려고 했던 건데."
"그건 아니야. 이렇게 소통하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해."
"왜, 요? 귀찮지 않아요?"
"내가 왜 귀찮아."
오히려 말하지 않아서 상황이 복잡해지는 걸 더 싫어하는 편이다.
저번에 설아에 대한 것도 끝까지 말하지 않다가 사건이 터질 때까지 입 다물고 있었잖아.
오히려 그게 내가 싫어하는 전개다.
"아, 그렇지.... 죄송해요. 제가 너무 익숙해져 있었네요."
"익숙해져?"
"개인적인 일이라서, 그건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또 숨기네."
"에이, 앞으로는 최대한 상담할게요. 제가 매니저님은 그런 분이라는 걸 자꾸 까먹어서 그래요."
"내가 뭐?"
"제가 많이 좋아한다고요."
갑자기?
너무 맥락이 없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애초에 평소에도 장난스럽게 저런 말을 던지던 녀석이었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저렇게 말하니까 부끄러워지네....
"귀여우시다니까. 평소엔 훨씬 부끄러운 말도 막 던지시면서."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정아가 키득거리면서 나를 놓아주었다.
진짜 얘는 가늠이 가질 않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걸까.
혜은이는 그래도 야한 것 원툴이라서 대충 예상은 가는데....
정아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번 기회에 여러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네요. 최근에는 그냥 다 잊고 싶어서 쾌감만 쫒아다녔는데...."
"그랬어? 전혀 몰랐는데."
"안 그래도 신경 써야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제가 계속 매니저님한테 매달려 있을 수는 없잖아요. 자위로 만족하려고 했었죠."
"흠...."
하긴 처음에는 나한테 매달렸던 것 같다.
그러다가 저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이후로 나랑 거리를 둔 거구나?
당시에는 그냥 방치 플레이를 즐긴다고 생각했는데, 나에게 방해가 될까 봐 걱정되어서 자신이 거리를 두려고 했던 거다.
이건 좀 심각한데?
"앞으로는 그냥 말해. 정 뭐하면 옆에서 방치 플레이라도 당해라. 혼자서 그러지 말고. 나는 여러 명이 같이하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니까."
"그, 그래도 괜찮아요? 방해가 되는 건...."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고. 너야말로 너랑 섹스할 때 누가 있으면 방해라고 생각해?"
"오, 오히려 좋아요."
뭔가 다른 의미인 것 같긴 한데.
일단 대충은 이해한 것 같으니까 이거로 괜찮으려나?
"그게 싫은 애도 있겠지만, 그건 다 사전에 허락을 받으면 되는 거고. 애초에 네가 물어본다고 다 된다고 하겠냐? 그냥 편하게 물어봐."
"그럴게요."
음, 생각해보니까 정아랑은 데이트 같은 분위기는 낸 적이 없었나?
데이트는 어려워도 같이 시간을 좀 보내주고 싶은데.
문제는 오늘 내가 고아원에 갈 생각이었다는 거다.
'연락은 하지 않았지만.'
애초에 휴일에도 갑자기 일이 터져서 가지 못할 수 있는 게 헌터 업계 일이다.
그렇다 보니까 혹시 애들이 실망할까 봐 굳이 미리 알리지는 않는 편이었다.
갈 수 있으면 가는 거지.
"정아 너는 애들 좋아해?"
"애들이요? 어린 애들?"
"엉."
"음, 싫어하지는 않을걸요. 근데 그건 왜요?"
그야, 같이 고아원이나 가자는 거지.
원래라면 설아랑 가자고 할 텐데, 설아는 지금 던전 공략 때문에 차출된 상태였으니까.
솔직히 사람마다 다르니까 뭐라 못하겠네....
나는 애들이랑 있으면 치유되는 편이라서 힘들면 거기 가는데.
"궁금하긴 하네요. 매번 거기 가실 때마다 표정이 밝으시잖아요."
"포근포근하잖아."
"매니저님이랑 되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네요."
"죽을래?"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좋아진 것 같네.
꽤 충격적인 경험이었던 모양이니 금방 원래대로 돌아오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빨리 회복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밝던 애가 저렇게 침울하니까 나까지 마음이 착잡했다.
"이건 어때요?"
"아, 응. 그것도 좋아할 것 같다. 싸울 수도 있으니까 같은 건 적당히 여러 개 사는 게 좋아."
"그런 것도 신경 써야 하는구나...."
"물론 여러 개 챙긴다고 꼭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애들 장난감 고르는 건 꽤 어려운 일이거든?
심지어 그 개수를 넘어서 인기가 생기면 그냥 더 사다 주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사다 줬는데 인기가 없으면 창고행이니까 너무 많이 사도 좋지 않고.
"요즘은 애들 인형도 가슴이 크네요."
"우리 때는 그런 경향까지는 없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그만큼 헌터가 인기니까."
시대상이 반영된다고 보는 편이 맞겠지.
예전에는 헌터는 위험하면서 수익이 높은 직업이었다면.
요즘에는 어지간한 스타들보다 반짝이는 존재로 떠받들어지니까.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같이 놀자고 온 건데, 완전 짐꾼이 되어버렸네. 미안."
"아뇨. 저도 욕심부리는 거 좋아해서, 이런 일은 오히려 좋다고 생각해요."
음, 이번에도 새로운 헌터가 왔다고 좋아하려나?
저번에 설아가 해주던 마술쇼도 좋아했으니까, 정아가 얼음 특성 쓰는 걸 보여줘도 엄청나게 좋아하겠는데.
장난감도 충분했고.
혹시 몰라서 먹을 것들도 주문할 준비를 해놓았다.
가서 원장님한테 물어보고 애들이 아직 밥을 먹지 않았으면 풀코스로 먹여줄 생각이었다.
"...매니저님?"
"어, 라...?"
"여기 맞는 거죠?"
순간적으로 머리가 아찔해졌다.
내 눈이 잘못된 건가?
힘이 풀려서 손에 쥐고 있던 봉투를 떨어트렸다.
와르르 쏟아지는 장난감이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은 새 장난감뿐만이 아니었다.
어딘가 깨지고 부서진 장난감들.
아이들이 되게 좋아했던 장난감들, 그리고 자그마한 신발들까지.
고아원의 마당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원장님, 원장님!"
다급해진 마음에 건물의 내부로 들어갔다.
당연하지만 내부는 바깥이 양반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이리저리 불에 그을린 흔적까지 있는 걸 보면, 여길 습격한 건 각성자들이 분명했다.
그리고 미약하지만, 고통에 찬 신음이 들려서 급하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원장님! 괜찮으세요? 무슨 일이에요!"
"은, 혁씨?"
"무슨 일이에요. 애들은요!"
"제발.... 아이들을, 구해...."
"정신 차리세요! 원장님!"
"매니저님, 잠시만 떨어지세요. 출혈만 멈추게 할게요."
상처 부위를 얼려서 상처만 봉합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대체 누가 여기를 습격한 거지?
신고하기 위해서 휴대폰을 꺼냈더니, 곧바로 진동이 울리며 전화가 도착했고.
나는 발신자의 이름을 보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공주야."
"지금 당장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오세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정아와 나는 원장님만 챙겨서 급히 공주의 집으로 찾아갔고.
공주는 시간을 되돌리는 것으로 원장님의 상처를 모두 치료했다.
"미리 준비해놨더니 꽤 긴 시간인데도 괜찮네요."
"...알고 있었구나"
"이미 벌어진 적 있었던 일이니까요."
나는 참지 못하고 공주의 멱살을 잡았다.
알고 있었다고?
그렇다면 미리 말해줬어야지.
그럼 처음부터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막았을 거 아니야.
"내 말이 틀려!? 그러다 애들이 잘못되면 어쩔 건데!"
"이번 사건의 범인은 S급 헌터인 강아리. 아마 여보도 알고 있는...."
"너, 진짜!"
"막으면요. 아니, 7레벨인 여보가 막을 수나 있고요?"
뭐?
나는 뒤늦게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꽉 쥐고 있는 주먹을 떨고 있었다.
"강아리는 이렇게 납치한 적성이 있는 여자아이들을 여인원의 생산 시설로 공급해요. 그리고 남자아이 중 자신의 취향인 애들을 성 노리개로 쓰죠. 남은 아이들도 당연히 인신매매로 팔아버리고요."
"너, 너...."
누구보다 이 사건과 많이 얽혀 있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겠지.
그녀 또한 비슷한 사건과 얽힌 과거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특성의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구해주세요. 전부요."
"망할...."
이 사건이 내가 벽을 깨는 계기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