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2 7레벨 - 힘조(4)
"그랜다? 이거 예전에 유행한 5인조 아이돌 그룹이잖아?"
"이 그룹 전원이 실종되었던 사건이 있었죠? 아이돌 그룹 전체인 민준, 서준, 예준, 도윤, 시우. 전부 지금 밸밸사이에 잡혀있어요."
"그 정도면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 팬들도 난리 나지 않았어?"
"의외로 돌아오고 나서 정상적으로 활동해서 금방 사그라들었지만요."
처음에는 같은 여자긴 해도 사형시키라고 난리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돌 멤버들끼리만 엮이고 다른 남자들과는 엮이지 않았던 데다가, 그들이 돌아온 이후에 금방 정상적으로 활동하면서 분노가 줄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여자 쪽에게서도 사건에 가장 분노할 사람들이 사라져버렸고.
그 뒤로는 그냥 남자와 여자의 싸움 구도로 이어졌구나.
"리스트 100명이 이렇게 많은 거였나. 어지럽네...."
그 와중에 피해자 대부분은 잘 알려진 연예인이나 SNS에서 유행했던 사람들이었다.
하긴 저런 외모로 주목을 받지 않았을 리가 없지.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스크롤을 내렸는데, 아래로 갈수록 일반인이 많았다.
"와, 일반인 외모가 이게 맞나? 나도 좀 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들은 선 넘네."
"제 눈에는 박은혁씨가 더 잘생겼는데...."
"그렇게 말해주면 영광일 정도잖아. 물론 화장을 좀 한 것 같기는 한데."
아니 생각해보니까 이거 대부분 밸밸사이의 내용을 캡처한 거잖아.
높은 확률로 화장까지 해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점점 심연에 발을 들이면 들일수록 기분이 나빠지는 느낌이었다.
"제가 알기로 후반부터는 짬이 차서 잘생긴 일반인을 좀 잘 찾았다고 인터뷰를 들은 것 같아요."
"그래...."
정말 쓸모없는 지식이 하나 더 늘었다.
아무튼 이 잘생긴 100명의 남자를 죄다 자기 망상 세계관에 집어넣고, 서로를 물고 빨게 해놓았다는 거지?
진짜 미친년인가 봐.
"아무리 찾아봐도 음지영이랑 관계가 없는 사람들 아니야? 그나마 그랜다는 음지영이 팬이었다는 정도의 관계는 있는데. 나머지는?"
"그냥 외모랑 목소리로만 뽑은 것 같던데요? 아, 자기가 느끼는 설정에 맞는 캐릭터라서 가져온 것도 있겠고?"
"진짜 마인드 자체가 글러 먹었네."
내가 잘했다는 건 아닌데.
그래도 시발 가만히 있던 사람을 쥐어패는 건 양아치잖아.
최소 너한테 기분이라도 나쁘게 했으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그냥 잘생겨서 납치하는 건 무슨....
'뭐, 이건 본인한테 직접 물어봐야 하는 문제고.'
이번 일을 벌인 음지영 본인에게 이유를 들어야겠지.
정말로 아무 이유 없이 피해자들을 고른 건지, 무언가 이유가 있었던 건지.
개인적으로 그저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누군가를 괴롭히는 사람은 혐오하는 편이니까.
하지만 복수나 무언가 필요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목적 자체도 어느 정도 정당해야겠지만.
어차피 나는 내 목적을 위해서 그녀를 무너트릴 거고, 그건 바뀌지 않을 거다.
그래도 그녀의 인성 수위에 따라서 적당한 범위 내에서 내가 책임질지, 아니면 정말 나락까지 떨어트려서 어디 쓰레기통에 처박을지가 결정이 나겠지.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도 취향이라는 게 있는 법인데, 그런 또라이 마인드를 가진 인간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책임은 지고 있다는 건가?"
"자기 자신이 밸밸사이의 최고 팬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을 거예요."
"납치해서 데려왔고, 사랑해주는 방식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라 그렇지 본인은 사랑한다고 생각하겠네."
"그러게요. 의외로 음식 같은 거 들어가는 걸 보면 잘 되어 있어요. 가끔 특식으로 들어가는 것들은 어디 고급 레스토랑급 퀄리티던데."
근데 그건 당연한 재투자 아니냐?
결국 그런 시설이나 음식 같은 거도 다 영상에 나올 텐데.
당장 시발 쟤가 밸밸사이로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인데 그 정도도 하지 않으면 양아치지.
"그렇게 보면 또 그렇네요. 결국 그것도 다 컨텐츠가 되니까."
"와 진짜 영상 징글징글하게 많다. 심지어 중간 단계에 카메라맨 역할을 하는 사람들도 있나 본데?"
"관리자라고 불리나 봐요. 지난 회차에서는 반 정도밖에 잡지 못하고 일반 멤버들이랑 섞였었죠."
"쟤들은 뭐 돈 받으면서 일하는 거야?"
"찍은 영상에 대해서 퍼센트로 가져간다고는 하던데요?"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밸밸사이의 이용권만 구매하면 CCTV나 오래된 영상들만 열람할 수 있고.
저런 관리자들이 찍은 영상은 추가금을 주고 구매한다는 거구나.
"가끔 음지영 본인이 기획하는 대형 기획 같은 게 있는데, 이런 건 최대한 많은 사람이 즐겨야 한다고 이용권만 있어도 볼 수 있어요."
"왜 시발 시스템만 들으면 그럴듯하냐?"
그래서 더 꼴 받네.
납치하고 최면을 걸지 말고 연기자들로 이런 시스템을 구성했으면 누가 뭐라고 하겠어.
아, 그건 연기가 마음에 안 들어서 포기했다고 했나?
"모르겠다...."
"오, 성공이다!"
"뭘 성공했다는 거야?"
"제가 최근 밸밸사이 들어가서 후원을 왕창 넣고 있거든요?"
"왜?"
내부 정보를 확인하려는 거면 그냥 영상만 최대한 구매하면 되는 거잖아.
굳이 후원까지 넣어가면서?
"후원을 넣으면 의뢰를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그거로 101번째 멤버로 박은혁씨를 추천했어요."
"너 돌았냐?"
아니, 나는 어떻게 내부에 침입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딴 미친 방법을 사용하려고 하네?
"어차피 그 스탠스? 정신? 하는 거 쓰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하셨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남자들 좆 비비는 곳에 팔려 들어가는 거잖아. 싫어."
"그 사람들은 뭐 원해서 들어갔겠어요?"
"하아...."
"저도 어차피 본거지는 모른단 말이에요. 이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서 어쩔 수가 없어요."
"그래, 뭐.... 상시로 특성을 유지하고 있으면 되는 거겠지."
내가 시발 살다살다 잠입해서 빌런 찾는 일까지 해야 한다니.
매니저 일만 하다가 뒤질 줄 알았는데, 빌런이랑 1대1 싸움을 붙게 생겼네.
"어차피 박은혁씨가 이기잖아요. 뭘 그리 걱정해요?"
"내가 실수해서 갇히면 구하러 올 거냐?"
"당연하죠. 지구 전부를 뒤져서라도 구하러 갈 거예요."
"저도요!"
설아야 네가 나를 항상 보고 있다는 건 알고 있는데.
그래도 갑자기 그렇게 나타나면 좀 무섭단다.
"아예 저는 같이 따라가도 괜찮은데요."
"아, 씨. 깜짝이야.... 아니 혜미 너도 듣고 있었어?"
"주인님이 빌런 잡으러 가신다는데 저는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엿듣고 있었어요."
왜 다들 그렇게 엿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말하는 거야.
F F F
이공주의 설명에 따르면 그냥 평범하게 집에 가면 될 거라고 했다.
원래라면 혜미와 함께 집에 돌아가야 했겠지만, 아무래도 그러면 상대가 다음 기회를 노릴 확률이 높아서 먼저 집에 보내놨다.
아무튼 인적이 드물긴 해도 굉장히 평범한 길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몸에 마력이 닿아 반발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나 자신에게 '힘조'를 건 상태라서 잠이 들진 않았지만, 일단 잠이 든 척을 하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최대한 연기를 완벽하게 해야 들키지 않고 본거지까지 이동할 수 있겠지.
"진짜 실물도 괜찮네. 이번 후원자님 추천은 완벽한데.... 관리자 권한 드려야겠다."
정말로 직접 사냥을 나서는 스타일이네.
그게 가장 자신이 있는 방법이라서 그런가?
그나저나 이공주가 관리자 권한을 받으면 나중에 들어와서 도와줄 수도 있겠는데?
그건 좀 이득이다.
나를 납치한 음지영은 밸밸사이의 본거지까지 가는 동안 여러 가지 암시를 걸고 있었다.
여자는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고, 남자만이 사랑하는 대상이라는 것은 기본이고.
일반적으로 매력을 느끼는 부분까지도 전부 암시를 통해 바꾸려고 하고 있었다.
사실 이게 전부였다면 딱 예상 그대로의 수준이었을 텐데.
그 이후에 걸기 시작한 암시가 레전드였다.
이미 내가 동작해야 하는 알고리즘이 존재하는지, 그 알고리즘 설정을 미친 듯이 때려 박고 있었다.
'진짜 돌았네.'
혜은이가 세상에서 제일 미친년인 줄 알았는데.
사실 설정딸 치면서 또라이짓 하는 건 더한 인간이 존재했구나.
어떻게 납치한 사람한테 저런 설정을 강제로 심어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이 정도면 거의 인형인데?'
애초에 나는 기억을 지운다든가 하는 장난질은 좀 하는 편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기 설정대로 사람을 새로 쓰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럼 애초에 이 사람일 필요가 없었다는 게 되잖아.
그건 둘째치고 그럼 굳이 이렇게 납치해서 해야 해?
돈 많이 준다고 하고 기간제로 일하고 다시 일상생활로 돌려보내 주면 서로 윈윈인데.
'아, 그건 설마 끝이 있어서? 계약이 끝나면 밸밸사이를 떠나니까?'
확실히 그게 원인일 수도 있겠다.
무슨 암시로 거는 설정이 책 한 권은 될 것 같은 설정집인 수준의 집착에.
자신이 걸릴 가능성이 늘어나는데도 헌터 일을 나가지 않고 여기서 눈을 떼지 않는 욕심까지 있는 사람이니까.
좀 두려워졌다.
"좋아,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기는 한데.... 테스트 좀 해보고 수정하면 되겠지."
일단 내가 잠들지 않아서 그런지 그녀가 말하는 암시는 아무것도 적용이 되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이공주가 말했던 그대로.
사실 지금 당장 음지영을 덮친 다음에 조져도 괜찮겠지만....
'일단은 내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볼까.'
걸려있는 암시들은 대부분 기억 추가나 상식 개변이기 때문에, '너무 무섭긔'와 '나 머리가 띵했어'를 사용하면 해결할 수 있었다.
그거로 이곳에서 생활했던 남자들의 암시를 해제한 뒤에 의견을 물을 수 있을 거다.
혹시 음지영이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는지, 지금 당한 입장에서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금의 삶이 어떠한지.
솔직히 물어보지 않아도 대충 예상이 가기는 한다.
아까 암시로 걸어놓을 때 항문이나 전립선의 감도를 억지로 올려놓는다던가, 말투를 이상하게 고정해서 나오게 한다던가.
무시무시한 것들이 많았던 걸 생각하면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 눈에 훤했다.
'뭐 본인이 마음에 들 수도 있는 거니까....'
다만 원래 조교라는 것이 굉장히 섬세한 작업인데.
그녀는 바로바로 이 세계관에 사람을 투입하기 위해서 조교는커녕 그저 다른 사람의 인격을 불어넣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러면 아마 기존 인격과 바꿔둔 인격이 충돌하기 때문에, 암시를 푸는 순간 그 사람은 높은 확률로 본래 인격을 되찾을 확률이 높았다.
'본래 인격을 잠식하는 과정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지.'
전혀 녹아들지 않는 기억이다 보니, 그냥 다른 사람의 짧은 기억이 들어와서 충돌하는 수준에서 멈출 확률이 높았다.
아무리 오랜 시간 이곳에서 생활했어도 원래 그들이 살던 시간보다는 짧을 테니까.
"라고 저는 생각하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까까지만 해도 어디 로맨스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느끼한 대사를 내뱉던 남자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너무 성급하게 물었나?
기억을 정리할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 미친년 자는 거 확실하죠?"
"제가 암시 걸어뒀으니까 확실해요."
아까 이 방으로 옮겨지기 전에 새로운 인원을 보충하면 바로 잠자리에 드는 암시를 걸어놨다.
지금쯤이면 이미 곯아떨어져 있겠지.
"일단 저는 그 또라이랑 전혀 아는 사이가 아니었어요. 초면이에요."
"역시 그랬군요...."
"그나저나 진짜 빡치네. 시발 데이비드 영상이 엄청나게 팔려나갔다고요? 쪽팔려서 어떻게 살지?"
"데이비드라면 여기 활동명이셨던가...."
"그렇죠. 딱 납치당하기 전 기억이랑 데이비드로 지낸 기억이 나뉘어있는 느낌이에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구토할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활동 내용을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지.
"진짜 시발, 와.... 차라리 여자가 강간했으면 이렇게까지 기분 나쁘지 않았을 것 같은데. 하필 남자랑...."
"많이 힘드세요?"
"그 미친년 그냥 죽여버리세요. 솔직히 말해서 선생님이 안 하시면 제가 직접 죽이러 가고 싶어요."
정말 딱 내 예상 그대로의 답이 나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