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1 7레벨 - 힘조(3)
이제 유림이는 사실상 조교가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전에도 충분히 자지로 중독을 시키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그녀가 자지 없이 방치되면서 중독 증세가 심해졌고.
그걸 이용한 이번 조교로 중독을 넘어 의존하는 수준까지 넘어갔으니까.
"은혁씨는 유림선배를 싫어하는 거죠? 아영선배도 그렇고."
"그게 설아 너한테도 느껴져?"
"네, 다른 사람을 볼 때랑 다르게 좀 답답한 게 있어요. 하지만 일을 벌이시고 나면 항상 시원해하시고요."
근데 그건 어쩔 수 없는 게 아닐까.
사람이 연 단위로 누군가에게 구르면서 살았다고 해봐,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고 싶어지지 않겠어?
일단 유림이는 이 정도면 충분히 망가트린 것 같긴 하다.
슬슬 나도 쟤가 불쌍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으니까.
"아영선배는 아직도 기억이 제거된 상태인 거죠?"
"응.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지."
그녀의 마음은 지금도 나를 향해서 일직선에 불타오르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착각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다.
마지막에 모든 기억을 돌려줬을 때, 이제까지 나를 사랑해온 기억과 속았다는 배신감이 밀려들 때의 표정을 생각하면 벌써 몸이 떨려온다.
"물론 그렇게 망가트리는 건 망가트리는 거고. 망가트린 걸 책임지긴 할 거야."
"그게 은혁씨의 스타일이라는 거죠?"
"어찌 보면 그렇지?"
혜은이나 혜미는 솔직히 그녀들에게 악감정을 가질만한 것들이 없었다.
오히려 혜미쪽은 내 계획을 너무 추월해서 날아가는 바람에 당황스러울 정도고.
왜 아직도 혜미가 특성을 해제해도 나를 주인님으로 모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리 애기, 요즘 표현이 되게 다양해졌네."
"그, 그래요?"
처음에는 완벽한 발상이라고 생각했지만.
혹시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많이 되었는데.
설아에게 내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긍정적인 영향이 많았다.
"근데 당연한 게 아닐까요?"
"그래?"
"은혁씨가 느끼는 감정들은 뭔가 밝고 건강한 게 많거든요. 그냥 일에 집중할 때의 책임감조차 보면서 느끼고 있으면 가슴이 따뜻해져요."
"......."
그냥 일이니까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뿐인데.
하는 김에 최대한 헌터들이 덜 다쳤으면 좋겠다는 거랑.
민간에 피해가 생길 가능성을 최대한 배제하고 싶다는 정도?
근데 그건 던전 공략의 기본이잖아.
"그렇네요. 은혁씨 생각이 맞아요."
"요즘에 자꾸 네가 내 생각 읽는 것 같아서 좀 그래."
"그럼 인제 그만두실래요?"
"이렇게 효과를 보는데? 어림도 없지."
완전히 나을 때까지는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물론 이런 방법으로 그녀가 완벽히 치유될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게 효과가 있으니까 멈출 계획은 없었다.
"박은혁씨!"
"아, 이공주 헌터."
"편하게 부르셔도 괜찮은데."
"그럼 그렇게 할게."
생각보다 금방 레벨이 올라서, 그녀에게 금방 연락하게 되었다.
그랬더니 그녀가 말해줄 것이 있다면서 금방 이쪽으로 달려온 참이었다.
생각해보니까 저번에 본명 알려주지 않고 도망갔었네, 이번에도 비슷한 짓거리 하면 '해줘'를 써서라도 들어버릴 거다.
"그나저나 7레벨은 왜 찍어야 한다고 했던 거야?"
"7레벨이면 이제 고문 특성 열리셨죠?"
"고문이 아니라 정신 스탠스."
"어차피 고문 용도로 쓰시잖아요.
너,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어.
하긴 나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녀로서는 내가 지인이니까.
내 성격을 잘 알고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건가?
"저번에 말했던 거 기억하세요? 여성인권위원회의 최종계획."
"세계정복이라며."
"그걸 막으려다가 박은혁씨는 실패했죠. 그 원인이 되는 사건 중 하나를 터지지 못하게 막을 거예요."
"무슨 사건인데?"
"여인위에서 일으키는 사건은 아니긴 한데...."
헌터가 될 수 없는 남성들과.
헌터가 될 수 있는 여성들의 사이가 틀어지는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 있다고 한다.
지금도 별로 사이는 좋지 않은 것 같던데.
이게 얼마나 심화한다는 거야.
"거의 여자들이 남자들을 소유하는. 남성이 노예가 되는 수준까지 발전해요."
"그건 좀 큰일이네."
아무리 남성의 인권이 바닥을 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인간으로서 취급은 해주고 있었다.
각성하지 못해서 일정 이상 요직에 올라가지 못하는 유리천장이니 뭐니 하는 말도 나오고 있지만.
그래도 비각성 직업에서는 대등하게 경쟁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그런데 갑자기 인간 취급도 못 하는 수준까지 떨어진다고?
"사건의 시작은 한 빌런이 남자들을 사육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거예요. 거의 100명가량의 실종되었던 남자들이 학교라는 이름으로 사육되고 있었죠."
"학교...?"
"하지만 그런 비밀 공간을 유지하고 안전을 도모하려면 다량의 돈이 들어갔고. 그걸 영상으로 남겨서 판매하는 일을 겸하고 있었어요."
"납치에 성착취, 불법 영상물 판매. 헌터 범죄치고는 약해 보이지만, 그 인원이 100명이면 이야기가 좀 다르겠네."
사실상 남자들을 자기 입맛대로 노예처럼 부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비슷한 짓을 하는 나로서 뭐라고 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100명은 좀 심한 거 아니야?
그거 혼자서 감당하면 복상사 당하지 않아?
"그 사건이 알려졌는데. 영상을 구매하거나 봤던 여성 헌터가 생각보다 많았어요. 그래서 남자들은 헌터들이 그래도 되는 거냐고 불타기 시작했죠."
"괜히 가만히 있던 헌터들은 자신들한테 불똥이 튀니까 짜증이 났구나."
하지만 그걸 자신과 같은 강자인 다른 헌터들에게 푸는 것보다는.
자신보다 약할 것이 분명한 남자들에게 푸는 것이 쉬웠겠지.
"마치 헌터로 각성하는 것이 벼슬이라고만 말하지만,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헌터들에게 그딴 식으로 말하는 것이 맞냐는 말도 나오고. 결국 조금씩 사이가 틀어지는 원인이 되었죠."
"뭔 그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서로의 성별을 혐오하게 되었지만.
이 세계는 기본적으로 헌터가 없으면 굴러갈 수 없는 구조가 되어있으니.
당연히 결과는 여성들의 승리.
남성들의 인권은 지금보다 더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래서 여성 헌터들 사이에서 '남성'이라는 것 자체가 꺼려지게 되고, 아무리 S급 헌터라지만 이레귤러인 남성 헌터 박은혁씨는 꽤 배척받아요."
"반대로 남성들은 좋아했겠네."
"희망이라고 했죠. 하지만 오히려 그게 박은혁씨의 활동에는 방해가 되었고요."
거참 좆같은 상황이네.
그나저나 내가 S급까지 오르긴 하는 모양이네?
은근슬쩍 스포당했구만.
"사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그 사건의 범인이 정신 조작 특성이 있었거든요. 그러니 박은혁씨 특성이 정신 조작 특성이라고 알려지면서 난리가 났죠."
"와, 시발. 내 근처 사람들까지 배척받았겠네?"
"네, 거의 폭력의 피해자처럼 나오면서 아무도 그녀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죠."
사실상 나와 주변의 움직임은 봉쇄당하는 수준까지 몰렸고.
우리는 여인위의 대가리인 마스터들을 조지는 것에 실패했다.
그로 인해서 이런 상황을 막아야 했던 그녀가 과거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은 박은혁씨가 제대로 움직일만한 타이밍은 아니에요. 레벨을 10까지 올리고 S급이 된 이후에야 활동하시겠죠. 하지만 이번 일은 어디서 냄새를 맡기 전에 빨리 처리해야 해요."
"그걸 처리하는데 7레벨이 필요해?"
"일단 상대는 A급의 정신 조작 능력자로. 대상을 수면에 빠지게 하고, 그 사이에 그 사람의 뇌를 만지작거리죠."
"수면에 빠진다면...."
정신을 잃는 것에 속한다.
그것이 정신을 조작하는 조건이라고 한다면, 7레벨에서 얻은 ‘힘조’가 완벽하게 카운터로 들어가게 된다.
"근데 이게 질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아무것도 없이 당하면 레벨이 더 낮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게 아니라 특성이니까 특성의 적용 수준에 따라 바뀌거든요. 솔직히 박은혁씨 특성이면 지금 A급한텐 다 먹힐 거고."
"그렇게 되는구나."
하긴 애초에 헌터가 레벨로만 굴러가는 관계였으면 당장 눈앞에 있는 9레벨의 S급 헌터부터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런 레벨적 한계를 뛰어넘는 가장 큰 예가 나다.
5레벨이면 C급 정도나 되려나 싶은 레벨인데, 그때부터 9레벨 헌터들에게 정신 조작이 먹혔으니까.
이제 대충이지만 이해가 갔다.
매스컴에 나가지 않도록 내가 조용히 해결해야 하는 빌런 사건이라는 거네.
그래서 그걸 시도할 수 있는 7레벨을 기다려줬던 거고.
"이해했어. 그럼 이제 그 사건에 대해서 자세한 경위를 좀 들어도 될까?"
"아, 자료 정리해놨으니까 보면서 들으세요."
얘도 의외로 철저한 면이 있네.
심지어 내가 정리하는 스타일이랑 닮아있어서 이해하기 편했다.
혜은이랑 같이 일할 때도 이 정도로 딱딱 달라붙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밸밸사이? 이게 사이트 이름이야?"
"현재 여기서 관련된 영상이나 사진들이 공유되고 있어요. 정액제로 운영이 되고 있는데, 일부 고수위 영상이나 고화질 사진 같은 경우에는 추가 비용으로 구매하는 식이죠."
"의외로 팔아먹는 실력은 수준급이네. 근데 왜 이용자 대부분이 여성이야? 아무리 남자가 당한다고 하더라도...."
시발 이게 뭐야.
남자 둘이서 손을 잡고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고 있는 사진.
남자가 남자한테 편지를 내밀면서 고백하는 듯한 사진.
남자 둘이서 결혼식을 하는 사진.
심지어는 남자 둘이서 알몸으로 뒹굴고 있는 사진까지.
"미안, 이해했어. 이런 거였냐?"
애초에 이런 걸 좋아하는 건 대부분 여성인 경우가 많긴 하겠네.
그냥 남성이 여성에게 따먹히는 영상이면 남성 이용자층도 넓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런 장르면 이야기가 좀 다르지....
"너무 예상치 못한 장르라서 속이 울렁거려. 더 보고 싶지 않다."
물론 취향은 존중한다만.
그거랑 내가 보면서 힘든 거랑은 별개잖아.
내 눈앞에서 보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저기 있는 불쌍하게 착취당하는 남성들을 구하러 가셔야죠. 그러려면 이제 저걸 봐야겠네요."
"너 사실 악질이지."
저 사건이랑 미래의 문제랑 아무 관계도 없는 거 아니냐?
그냥 나 괴롭히려고 이 사건 가져온 거 아니지?
"이름은 음지영, 처음에는 그냥 잠재우는 계열의 능력이라서 의심받지 않았어요. A급에 오르고 나서 던전도 안 나가는데 계속 돈은 충분하니까 수상하다는 이유로 조사하다가 덜미가 잡혔죠."
"무슨 이유가 그딴 거냐?"
"던전에 가지 않았던 이유가, 밸밸사이 세계관을 운영하는데 한시라도 눈을 떼고 싶지 않아서래요. 미친년이죠?"
"그만큼 세계관에 진심이었냐고."
차라리 그 재능으로 글이나 쓰지.
그거로 왜 불쌍한 남자들을 납치하고 특성을 써서 괴롭히는 거야.
"처음에는 연기자를 고용했다던 모양이에요. 근데 이제 연기로는 만족할 수 없을 만큼 눈이 높아지면서...."
"그딴 이유라고?"
물론 자세한 내막은 살펴보고 판단해야겠지만.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로는 바로 조져도 문제없을 것 같은 빌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