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7 6레벨 - 나는 사회적 약자야(11)
"정말 죄송합니다! 주인님!"
"아니...."
설아에게 당한 후유증으로, 혜미는 며칠간 병원 신세를 지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오늘 대망의 퇴원 날.
나는 설아가 혜미에게 사과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래서 혜미와 설아를 옥상으로 불러낸 참이었는데....
"일어나. 네가 뭘 잘못했다고."
왠지 옥상에서는 옷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알몸으로 절을 하며 사과하는 혜미가 있었다.
이거 왠지 정아나 혜은이가 부추긴 것 같은데.
애초에 나는 너한테 사과시킬 애를 데려온 거지, 내가 사과받을 생각이 없어.
"제 목숨을 바쳐가면서라도 지켰어야 했던 물건이었습니다. 아직도 살아있다니 주인님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전혀 화 안 났으니까 제발 일어나라."
계속 머리를 바닥에 쿵쿵 찍으면서 사과를 하는 통에.
저러다 다시 입원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안 그래도 한쪽 뿔이 부러져있어서 굉장히 아파 보이는데.
"자, 설아야."
"네...."
아니 시발 너는 또 왜 옷을 벗는 거야.
언제부터 사과의 국룰이 알몸도게자가 되어버린 거지?
설아가 혜미한테 알몸도게자로 엎드려서 사과를 빌고, 혜미는 나에게 알몸도게자로 엎드려서 사과를 빈다.
너무 엄청난 구도라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죄송해요. 은혁씨의 아기를 가지고 싶은 마음에 들떠서 너무 심한 짓을 했어요."
"아뇨. 제가 막아내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했어야...."
"혜미야, 없던 화도 날 것 같으니까 그만해."
아무리 혜미가 설아보다 9레벨 경력이 높다고 해도, 최근 모든 코스트를 소모했던 혜미가 미리 장비에 화력까지 준비해온 설아를 이기기는 어려웠을 거다.
애초에 사고를 친 건 설아인데 왜 혜미가 사과하고 있냐고.
"하, 하지만.... 저는 주인님의 노예입니다. 주인님을 위해서 목숨 정도는 바칠 수 있어야...."
계속 저런 소리를 하니까 슬슬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 노예로 최면을 걸어두는 건 부작용이 심하네.
나는 일단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혜미에게 걸려있는 '나 머리가 띵했어' 특성을 해제했다.
이제 우리가 진행한 성노예의 맹세에 대한 상식이 사라졌을 거다.
"왜 그렇게 보세요 주인님?"
"응?"
뭐지, 버근가.
분명 제대로 해제한 것 같았는데.
왜 쟤는 아직도 나한테 주인님이라고 하는 거야?
"아, 상식개변 해제하셨구나. 죄송해요, 겨우 그런 거에 의지해서 주인님을 모시려고 했었다니. 이제는 그런 거에 의지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 시발 뭐라는 거야."
그러니까 이미 그런 상식개변이랑 상관없이 나를 주인님으로 모실 생각이라는 거야?
그게 도당체 무슨 소리야.
너 진짜 내가 알던 그 혜미 맞냐?
"서, 설마 저를 버리신다는 뜻이었나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제발 혜미를 계속 성노예로 써주세요!"
"아니, 어.... 버린다는 건 아니야. 책임지기로 했으니까."
"정말요!?"
"그러니까 옷이나 입고, 저기 너한테 사과하는 애의 사과나 받아줘."
혜미가 웃으면서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더니 옷을 주워 입었다.
그리고는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 설아를 보며 말했다.
"주인님은 저 사람을 용서한 거죠?"
"응."
"그럼 상관없어요. 제 뜻은 항상 주인님의 뜻이에요."
그 말 자체는 굉장히 좋다고 생각하거든?
근데 왜 갑자기 이렇게 변한 거지?
뭔가 이상한데.
"저는 다 필요 없고, 딱 하나만 허락해주시면 나머진 다 주인님 명령을 따를 수 있어요."
"그게 뭔데?"
"유혜은 그년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거, 참을 수가 없거든요. 그거만 허락해주세요."
"...선만 넘지 않으면야"
"감사합니다!"
오히려 그건 걔도 기대하고 좋아하는 것 같더라.
어떻게 자기가 소중하게 키운 동생의 변기가 되는 걸 기뻐할 수 있지?
하긴 자신을 범해줄 미래의 강간범을 기다리던 정신병자한테 너무 많은 걸 기대한 건가?
"뭔가 설아 너도 바뀐 것 같다?"
"주말 동안 많은 걸 느꼈어요."
별건 아니지만, 의미 있기를 바라면서 진행했던 일정이었는데.... 의외로 괜찮았나 보다.
토요일에는 아영이랑 데이트했고, 일요일에는 정아랑 데이트를 했다.
매번 섹스하기는 했지만 모두 사랑을 담은 순애 섹스였고.
그나마 정아랑 했던 섹스가 하드한 체위가 많은 정도였다.
"정아도, 아영선배도 그렇게나 꼴리는 사람들일 줄이야."
"그거 맞아?"
"그런 느낌 아니에요?"
그런 느낌이긴 하지.
하긴 얘가 느끼는 감각은 내가 느낄 때와 같은 것이니까.
솔직히 아영이가 좀 바보 같긴 해도 순수하게 사랑을 구애하며 다가오는 모습을 보면 꼴리지 않을 수가 없다.
심지어 그게 평소에 싫어하던 나에 의해 조작된 거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정아는 마조끼가 강하긴 해도, 그 덕에 막 다뤄도 된다는 점에서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부분이 있다.
"조금이나마 내 마음을 이해하고 있구나."
"신기해요. 저는 지금도 별 감각이 없는데, 주인님을 보고 있으면 신기한 감각이 마구 몸에 쏟아져서.... 이제야 좀 살아간다는 감각이 들어요."
설아는 자신의 반지를 조심스럽게 만지면서 웃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애기한테 하나씩 가르치는 기분이라서 묘하네.
"대충 일도 풀렸으니까 내려가서 밥이나 먹자. 치킨 시켜놨어."
"네."
아영이와 정아, 그리고 혜은이가 먹을 준비를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딱히 별건 없고 혜미가 퇴원하는 기념으로 같이 밥이나 먹자고 마련된 자리였다.
그리고 단골집에 부탁해둔 덕에, 콜라 캔으로 보이는 이 캔들 내부에는 모두 맥주가 들어있었다.
이런 날에 치맥은 못 참지.
"그럼, 혜은이가 축사할까?"
"좋지. 성기를 기원하며 발기를 기원하며! 성기발기!"
"미친년아!"
다행인 것은 이런 상황에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만한 사람이 없다는 거였다.
그나마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혜은이를 바라보는 것은 혜미뿐이고.
나머지는 오히려 피식 웃으면서 내 하반신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거 시선 강간입니다?"
"어쩌라고. 진짜 강간당하고 싶어?"
"아무리 은혁이 네가 레벨이 올랐어도 여기 다 A급인데 감당 가능해?"
잠깐은 커버가 가능할 것 같기는 한데.
왠지 장기전으로 가면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네.
어쩌다가 여기 평균 랭크가 이렇게 되어버렸지?
"아, 근데 집단으로 당하는 매니저님은 좀 꼴리네요. 그때는 제가 이 촉수로 좀 괴롭히면 안 되나요?"
"무서운 소리 하지 마!"
"농담이에요 농담."
"농담이라도 할 말이 따로 있지."
정아 너 나중에 보자.
이번 주말에는 설아한테 좋은 것만 보여주려고 많이 봐줬는데.
다음 기회에는 예외 없이 끝을 볼 거다.
"정아야 조심해. 은혁씨 화났어."
"헉, 기대하고 있을게요♡"
"하, 배정아 저거 존나 치트키라니까? 뭘 말해도 다 좋아하는 미친년이야."
"헤헤."
"칭찬 아니다."
아, 그러고 보니까 혜미한테 물어볼 게 있었는데.
아까는 갑자기 알몸으로 사과를 하고 난리를 쳐서 물어봐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있었다.
지금 생각난 김에 물어봐야겠다.
"혜미야, 내가 레벨 올리기 전에 나한테 전화의 목소리가 믿을 만하다고 했잖아."
"네. 그랬어요. 주인님."
"널 믿어달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때 근거가 뭐였어?"
"......."
혜미는 한동안 고민에 빠져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결국에는 답을 내지 못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어요. 아마 코스트에 포함되어 있던 내용인가 봐요."
"사라진 기억이구나. 오케이, 어쩔 수 없지."
"아, 그나저나 오줌마렵다."
"큰 소리로 말하지 마 병신아...."
"죄송합니다. 주인님. 육변기한테 좀 들으라고 꼽주는 거였습니다."
나 정신 나갈 것 같아.
진짜 개판도 이런 개판이 따로 없다.
왜 내 주변의 헌터들은 왜 이렇게 미친 애들밖에 없는 거지?
사실 헌터가 되면 머리가 돌아버리는 건가?
"그나저나 이번 벽은 뭐려나."
"벌써 경험치 다 쌓으셨어요?"
"거의 다. 최근에 설아가 가만히 있어도 경험치를 복사해주는 수준이라."
설아가 워낙 행복이랑은 거리가 먼 생활을 했었던 것이 원인인 것 같았다.
그랬던 그녀가 갑자기 제대로 된 행복을 느끼기 시작해서 예전과 비교해서 훨씬 행복해져서 경험치가 많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아, 경험치가 복사가 된다니까?
"달링."
"응?"
"솔직히 지금 양심 없다는 자각 있지? 유림이까지 하면 벌써 6명인데."
"아...."
물론 있긴 하지.
그리고 10레벨에 특성을 걸 수 있게 되면 유채린도 가지고 놀 거고, 그러면 여기에 편입될 가능성이 컸다.
아무리 내가 유채린이 미워도 책임질 건 책임을 져야 하니까.
그러면 최소 7명인데....
"딱 하나만 약속해줘."
"뭘?"
"지금 우리가 대부분 A급이고, 달링이 원하는 건 레벨업이라 강한 경험치 획득 대상이지?"
"응."
"내가 떡치는 원나잇 관계까지는 참견하지 않을 테니까. 달링이 제대로신경 써줄 대상은 S급 이상으로만 데려와. A급이면 우리가 조져놓을 거야."
"하지 말라는 거네."
"지금은? 하지만 S급한테 특성이 걸리기 시작하면 달링도 사람을 추가로 구해야 하잖아. 그건 이해해준다는 거야."
아영이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솔직히 따먹을 A급이 넘쳐나는 상황에 굳이 새로운 A급을 구하는 건 내가 쓰레기가 맞으니까.
"오케이, 그 정도는 인정할게. 어쩌다가 일이 있어서 엮이게 되더라도, 가능하면 기억 지우고 마무리할게. 그게 불가능해도 여기랑은 선을 두고 따로 취급해줄게."
"응, 역시 달링은 상냥해. 그렇게 말해줄 줄 알았어."
"매니저님이 바람둥이기는 해도, 은근 스윗해."
"저는 주인님이 하고 싶으시면 수백 명을 데려와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나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혜미는 이미 컨셉에 잡아먹혀서 내 노예처럼 행동하는 걸 즐기고 있었고.
설아는 아마 더 다양한 사람과 친해지고 싶은 거겠지.
아무튼 한동안은 애들 케어하면서 경험치 올리는 걸로 충분할 것 같았다.
박은혁 너무 조급해하지 마.
"음? 은혁아. 이거 뭔가 이상한데?"
아까 혜미의 오줌을 쪽쪽 빨아먹으러 화장실로 불려갔던 혜은이였다.
혼자 뒤늦게 나온 걸 보면 자위라도 한바탕 하고 나온 모양이네.
뭐길래 저렇게 놀란 거지?
"잠시만, 여기 TV 좀 틀게."
혜은이가 뉴스로 보이는 영상을 틀어서 보여주기 시작했다.
TV에서는 최연소로 S급 판정을 받았다던 이공주 헌터와의 인터뷰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네, 최근에 A급이 3명이나 발생했다던 그 팀 맞습니다. 지금 제가 아유팀에 들어가면 아마 이름이 저로 바뀔 겁니다. 그림 거기를 한국 최고의 팀으로 되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내용이 뭔가 이상했다.
아유팀, 그러니까 내가 매니저로 있는 팀이 바로 아유팀이다.
아영이랑 유림이 이름을 따서 아유라고 지었었지.
"지금 쟤는 뭐라는 거냐.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근데 어차피 은혁이 너 힘 없잖아. 쟤가 저렇게 계속 지랄하면 넣을 수밖에 없을걸? 여기 벌써 S급 설비 공사한다던데?"
"그건 또 뭔 소리야."
근데 이번에 최연소 S급에 도달했다는 헌터가 갑자기 이런 곳에는 왜 온다는 거야.
진짜 골치가 아파지네.
그냥 적당한 팀 찾아서 들어온 다음에 자기 맘대로 쓰려는 건가?
하긴 S급 헌터가 되었는데 그 정도는 하고 싶겠지.
[다른 팀의 스카웃도 많이 받으신 걸로 아는데요.]
[저는 아유팀이 아니면 싫습니다. 넣어주실 때까지 던전 공략을 중지할 생각입니다.]
"와, 저거 진짜 또라이...."
"주인님 잠시만요."
"엉?"
"비슷하지 않아요?"
"뭐가?"
"목소리요. 저번에 주인님이 받았던 전화에서 나온 목소리랑...."
응? 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