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8 6레벨 - 나는 사회적 약자야(2)
"어우, 시발."
귀에서 이명이 시끄럽게 울린다.
방금 잠에서 깨어나서인지 어지러운 감각이 머리를 덮치고, 은은하게 쿵쿵거리는 두통 때문에 구토감이 올라왔다.
"얼마나 독한 걸 박은 거야?"
"아, 일어나셨군요.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뒈질 것 같은데요. 누가 일반인한테 그런 독한 약을 씁니까?"
"놀랍게도 일반인 헌터 공용 수면제라서요. 자주 쓰는 것만 아니라면 큰 문제는 없으실 겁니다."
아까 그 경찰이 아니네.
여성인데다 가슴이 큰 걸 보면 헌터인 것 같았다.
혹시 뭐 이상한 점이라도 드러난 건가?
"음, 최근 행적이 좀 이상하셨네요. 물론 지금 검사 결과는 해당없음으로 나왔습니다.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럼 저 가봐도 됩니까?"
"아, 질문드릴 것이 좀 있어서요. 일단 좀 많이 주무셔서 배고프실 텐데, 이거부터 좀 드시고 간단한 질문만 답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유명 죽 체인점의 시그니처 메뉴였다.
확실히 지금 배가 고파서 어지러울 정도긴 하네.
"사양하지 않고 먹겠습니다. 너무 배고프네요."
"그러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익숙한 맛이긴 한데 배고파서 그런지 되게 맛있게 느껴졌다.
죽을 빠르게 먹어 치우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경찰과 대화를 시작했다.
"후우, 이제 좀 살겠네. 뭔가 물어보신다고요?"
"최근에 좀 이상한 일이 있지 않으셨나 해서요."
"이상한 일이요?"
"기억이 조금 애매하게 사라진 날이나, 혹시 누군가에게 감금을 당하신 적이 있거나. 그런 거죠."
음, 아무래도 나로 위장한 다른 각성 범죄자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하는 질문 같았다.
여기서 그런 적이 있다고 하면 귀찮아지겠지.
"그런 경우는 없네요."
"없었고.... 최근에 유혜미씨랑 자주 만나신 것 같은데, 어떤 계기로 알게 되신 거죠?"
"처음 알게 된 건 일 때문이고, 친해진 건 언니인 혜은이를 통해서네요."
"음, 혜은씨랑 친해지신 계기는 일이고요?"
"맞습니다."
그 뒤로 질문받은 것은 우리 팀 소속 헌터들과 어쩌다가 친해졌는지.
이전에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최근에는 그렇게 사이가 좋아졌냐는 거다.
"아직도 이번에 새로 들어온 후배들이야, 처음부터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고요. 아영이는 쌓인 오해가 많았습니다. 최근에는 아영이가 레벨9 찍을 때 같이 있고 그러면서 많이 풀렸죠."
"여유림씨랑은 아직 사이가 별로인가요?"
"원래도 인정할 건 인정하는 사이였지만, 개인적인 친분이 강하지는 않았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네요."
지금도 내 자지를 인정해주는 거지 나를 인정하는 건 죽어도 싫다는 녀석이니까.
그러니까 딱히 거짓말은 아니다.
"음, 이상한 건 딱히 없네요."
그 외에도 자잘한 것 몇 가지를 더 물어본 뒤에야 대화가 끝이 났다.
다행이라면 질문 대부분에 어색하지 않게 그럴듯한 답변을 내놓았다는 점이다.
다른 녀석들이 질문받았을 때 대답할 스타일까지 고려해서 이야기했으니까 대답이 충돌하지도 않겠지.
"고생하셨어요. 보상금은 최대한 빨리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아, 넵."
휴대폰을 돌려받아서 전원을 켰더니 4월 1일이라는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거의 2일을 내리 잤다는 거야?
수면제 효과 진짜 끝내주네.
"어제는 무단결근한 셈이 되었네요."
"그건 다 저희가 처리했어요. 그래도 오늘은 출근하셔야겠지만요."
지각하지 않으려면 집을 들를 생각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출근하면 이번 주 일부터 다 마무리해놔야겠네.
그리고 아마 혜미도 회사에 있을 테니까 능력도 다시 켜고.
'아, 4월 1일이면 묘설아 생일이네.'
출근하는 길에 간단한 선물이라도 하나 살까.
아무래도 다른 녀석들이랑 다르게 나를 정상적으로 대우해주는 몇 없는 헌터다 보니까, 가능하면 챙겨주고 싶었다.
솔직히 고마운 사람이지.
고아원에 기부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심성도 좋은 것 같고.
"너무 부담되지 않으면서 괜찮은 거 없나?"
곧 목돈이 들어올 예정이다 보니, 가격은 크게 부담될만한 부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는 고르는데 시간이 부족하다는 거네.
'그나마 회사랑 가까워서 다행이지.'
일단 뭐라도 사야겠다 싶어서 무인 쥬얼리숍에 들어갔다.
간단하게 목걸이라도 하나 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아, 귀걸이도 괜찮겠다.
"이거로 할까?"
묘설아가 귀를 뚫지는 않았지만, 반지처럼 생긴 이 둥근 귀걸이는 뚫지 않고도 착용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몬스터를 재료로 만든 거라서 투박한 디자인치고는 비싸긴 한데.
원래 귀걸이 입문은 이런 녀석이 좋으니까.
'뭐, 유명한 메이커니까 무난하겠지.'
귀를 뚫는 것도, 귀에 걸치는 것도 아닌 통과시켜서 마력으로 걸치는 특허가 있다고 광고를 오지게 때리는 곳이다.
실제로 그 특성 때문에 가능한 이런 반지랑 닮은 디자인이 매력적이긴 하지.
보석 부분을 누른 다음에 끼우는 거였나?
"아, 시간만 많았어도 더 고민할 텐데."
묘설아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품이라도 하지 뭐.
아마 물건에 문제가 없으면 일주일 이내에 무료 반품이 가능했던 걸로 기억한다.
"다행히 지각은 면했네."
"어, 매니저님!"
"정아야, 오랜만이다. 사실은 어제는 잠만 자서 그리 오랜만인 것 같지는 않아."
"와, 경찰에 잡혀갔다길래 드디어 해부당하시는 건가 했어요."
"무서운 소리 하지 마."
그나저나 아직 혜미는 출근하지 않았나?
뭔가 이상해서 전화를 걸어봤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혜은아. 혜미가 출근을 안 했는데?"
"아까 문자로 쉬겠다고 연락이 왔어. 너 몸은 좀 괜찮아?"
"응, 혜미는 그럼 여전히 우리 집에서 지내는 거지?"
"어, 그래도 퇴근하기 전에 꼬박꼬박 나를 만나줘서 다행이지만."
오, 그래도 언니랑 어느 정도 관계를 유지할 생각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노력하고 있다면 나중에는 관계가 개선되지 않으려나?
그럴 수 있으면 좋을 텐....
"잠시만, 혹시 만나서 뭐 해?"
"그, 그게...."
"솔직히 말해라."
"내 입에 소변 처리하고 가는데...?"
"......."
전혀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혜미가 혜은이를 대하는 태도는 이틀 전이랑 달라진 게 없었구나.
"헉, 그런 포상을 혜은씨만 받는 거예요? 좀 부럽네요."
"정아야, 제발 나가 죽어."
"흣♡ 오랜만에 느끼는 이 매도의 맛♡ 그리웠어요♡"
여기 제일 골 때리는 둘이 모여있어.
혜미가 혜은이 대하는 걸 보면 무섭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 제일 무서운 건 그런 취급을 즐기는 얘네들이 아닐까 싶다.
슬슬 익숙해져서 별생각이 들지 않는 나도 좀 무섭고.
"아영이는 공략 나갔네? 묘설아씨는?"
"오늘 설아 생일이잖아요. 그래서 쉰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선물은 나중에 줘야겠네.
이따 돌아가는 길에 고민해보고 제일 괜찮은 걸로 바꿔야겠다.
당일에 주지 못하는 것은 좀 아쉽지만, 그거까지는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아, 저 8레벨 찍었어요."
"진짜?"
"주말에 어쩌다 보니까 벽을 넘어서.... 이번 하위 특성은 얼음이 완벽하게 투명해지는 거예요."
"얼음은 원래 투명하잖아?"
"음, 이런 거죠."
그녀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더니, 한번 만져보라고 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손을 가져갔다가 갑자기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화들짝 놀랐다.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기습용 기술이네?"
"화력이 오르지는 않아서 조금 아쉬워요."
"그래도 시력에 의존하는 몬스터한테는 엄청나게 유리하겠네. 솔직히 요즘엔 이런 헌터들이 더 부족할걸?"
"그런가요?"
"응, 솔직히 화력은 레벨 올리면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게 오르잖아?"
"마력량이 늘어나니까요."
"그러니까 결국 이런 유틸이 더 중요해지는 거지. 그리고 어차피 7레벨이나 8레벨이나 B급인데, 그럼 같은 급이면 유틸보고 특정 던전 멤버로 들어가는 편이 유리하잖아."
정아는 내 설명을 다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
물론 쟤는 이런 것보다 그딴 쓰레기 특성을 각성하다니 벌을 주겠어!
같은 시츄에이션을 기대하는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특성은 일이랑 관계된 거라서 그렇게 해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매니저님은, 역시 매니저네요."
"그럼 내가 언제 일 제대로 못 하는 거 봤어?"
"그러니까요. 가끔 보면 엄청난 변태인데, 일할 때는 또 일에 진심이고."
"맥이는거야?"
"칭찬이거든요?"
미안, 워낙 유림이가 그런 말투로 많이 맥였었거든.
이제 그런 말을 들으면 맥이는지 의심부터 가는 지경이라서.
그나저나 유림이는 아직도 공략이 안 끝났네?
"이거 월요일에 시작한 공략 아니야? 아직도 끝이 안 났네?"
"아 그거. 채린이도 거기 묶여 있을 텐데.... 음, 한 번 실패했다가 재진입하느라 늦었어."
"유채린이 들어가고 실패를 했다고?"
B급인 여유림이 같이 들어가는 난이도의 던전을?
혜은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아무런 조사 없이 채린이 화력으로 밀려고 했는데, 내부가 너무 넓고 환경 부분에서 소모하는 마력량이 심해서 복귀했어."
"아, 그래서 환경에 맞춰서 싹 재정비해서 들어간 거야?"
"그렇지. 그래도 채린이가 있는 공략이니까 금방 해결하고 나올 거야."
다만 유채린으로 국뽕 채우고 민심 회복하려고 각 잡은 공략이었는데, 그게 계획이 틀어지면서 난리가 나긴 했단다.
맨날 유채린으로 꿀 빨더니 꼴좋네.
"와, 혜은아. 고맙다...."
"네 상황이 그런데 돕고 살아야지. 같은 매니저끼리."
컴퓨터를 켜서 확인했더니 꽤 많은 일을 혜은이가 해치워 놓은 상태였다.
이러면 남은 건 금방 처리하고 쉴 수 있겠네.
이틀이나 일을 밀려서 어쩌면 좋나 했는데, 이걸 혜은이가....
"나중에 포상만 제대로 준다면 이 육변기는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오케이, 날 잡아서 제대로 놀자."
레벨도 올랐으니까 특성을 좀 팍팍 사용할 수 있을 거다.
최소한 특성 두세 번 쓰면 마력이 동나던 5레벨보단 나아졌겠지.
"와, 이틀을 내리 자서 그런 건지 머리가 맑네."
"그래도 밥은 먹으면서 해. 배 안고파?"
"아까 아침에 죽을 먹어서 방금까지는 괜찮았는데, 죽이라 그런지 금방 꺼지네."
벌써 점심시간인가?
밀려있던 일을 처리하다 보니까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나가서 먹고 오기에는 시간이 애매할 것 같아서 먹으면서 하려고 피자라도 주문하기로 했다.
"어, 이거 신메뉴 시켜볼까?"
"아무거나 시켜. 하와이안만 아니면 괜찮아."
"오케이."
그나저나 쟤는 왜 아래층에서 안 하고 여기서 불편하게 노트북으로 일하고 있담.
평소였으면 뭔가 변태 같은 짓이라도 하나 싶었을 텐데, 그것도 아니고 그냥 열심히 일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긴, CCTV가 있으니까.'
아래층의 경우에는 혜미를 괴롭히려고 혜은이가 일부러 치웠었는데, 이번에 경찰들이 와서 걸리는 바람에 다 새로 설치해놨다고 했다.
그럼 어차피 아래서도 변태 짓 하면서 일하는 건 불가능하구나.
그래서 그냥 나라도 있는 여기서 하는 건가?
"아, 정아야. 피자 먹을래?"
"먹어도 괜찮아요? 매니저님 먹으려고 시킨 거 아니에요?"
"어차피 남을걸? 그치 혜은아?"
"아마도?"
나는 피자를 우물거리면서 계속 일에 집중했다.
이건 저번에 올렸던 거랑 공략이 거의 똑같은 거 아닌가?
아마 정리해뒀던 파일이 있었을 텐데....
"매니저님."
"응?"
"혹시 설아랑 있다가 트럼프 카드 본 적 있으세요? 최대한 최근에요."
"음, 어. 저번에 네가 하트7이 어쩌고 물어봤던 날에 봤네. 우연히 만났거든."
"무슨 카드였는데요?"
"다이아5였나?"
정아는 내 대답을 듣더니 가만히 앉아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왜 피자를 먹다 말고 저런 질문을 하는 거지?
혹시 설아랑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왜? 뭔가 이상한 일이라도 있어?"
"확실한 건 아니고요.... 어제 본 게 하트8. 예전에 내가 봤던 게 하트7이면서 매니저님이 다이아5일때.... 와, 잠시만. 매니저님 지금 레벨 몇이죠?"
"레벨? 지금은 6이야. 이틀 전에 올랐어."
"아, 이제 알겠네. 저 반차처리 좀 해주세요!"
"뭐? 야, 정아야!"
정아는 자기 혼자서 뭔가를 막 중얼거리더니 혼자서 뛰쳐나갔다.
쟤는 또 왜 저러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