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페미헌터-38화 (39/289)

EP.38 5레벨 - 나 머리가 띵했어(10)

미지근한 액체가 이마를 때린다.

입고 있던 옷은 축축해져서 기분 나쁜 감촉으로 몸에 달라붙고, 달짝지근하면서 비린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언니?"

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으로 눈앞에서 변태적인 몰골을 한 언니를 불렀다.

아직은 아이를 가지기에는 이를 터인 그녀의 유방에서는 새하얀 모유가 봇물 터지듯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그녀의 표정은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혼이 빠진 것처럼 쾌락만을 탐하고 있었다.

역겹다.

역겨워서 토가 쏟아질 것만 같다.

저런 건 우리 언니가 아니야.

'역시, 너였구나.'

박은혁.

이 빌어먹을 소설 'FFF급 페미헌터'의 주인공.

그 주인공은 역시 내가 예상했던 대로 저 남자였구나.

그가 우리 언니를 괴롭히고, 타락시키고, 음란한 것에 손대게 했구나.

분명히 생긴 것은 충분히 잘생기고 모난 것이 없는 엘리트 매니저다.

그것은 분명 분하게 느껴지는 점이지만, 이곳은 소설 속 세계다.

당연히 주인공이 얼마나 쓰레기에 변태이던, 외모 자체는 훤칠하고 잘생겨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멍청했어.'

박은혁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의심했다면, 당연히 이 소설의 히로인인 언니를 보호하려고 해야 했다.

나는 동생 실격이야.

언니한테 그렇게 많은 도움을 받아놓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언니를 구하지 못했잖아.

멍청한 년. 쓸모라고는 한 톨도 없는 년.

환생하기 전이랑 달라진 게 하나라도 있어? A급 헌터라고?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라고?

아니, 너는 그 시절 그대로잖아.

뭐라도 하나 바뀐 게 있긴 해?

"우욱...."

속이 울렁거린다.

언니의 꼴사납고 가축 같은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안일해 빠진 자신의 과거 행동들이 너무나 역겨워서 속이 울렁거렸다.

"아, 그러니까요. 혜미씨 이건...."

"혜으은♡ 가축의 삶 최고♡"

"야, 넌 좀 조용히 해봐!"

가축, 자기 자신을 가축으로 비유하는 언니의 모습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내가 언니를 저렇게 만들었구나.

분명히 기회가 있었을 텐데.

그냥 저 녀석이 의심스럽다고 신고 하나만 넣었다면 해결될 문제였을 텐데.

기회는 단 한 번뿐이라며, 혹시 신고를 넣었는데 주인공이 박은혁이 아니면 다음 신고가 어려워진다며.

그래서 좀 더 확신할 때까지 시간을 질질 끌었잖아.

제정신이야?

소설을 제대로 읽지 않은 과거의 나도 원망스럽지만, 겨우 그게 무서워서 망설이던 현재의 나도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혜은이가 스트레스가 좀 많아 보여서. 오늘은 좀 컨셉으로...."

"......."

뭐라고 해야 하지?

자칫하면 나도 최면에 당할 거다.

정확히 어떤 최면을 거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에 마력을 소모하기 때문에 고민 중이라는 사실 자체는 인지할 수 있었다.

'진짜, 그 소설을 제대로 읽었으면 별것도 아니었을 텐데.'

내가 환생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지도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성인이 되는 것과 동시에 각성하고, 능력의 코스트로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으니까.

내가 각성한 것은 전생의 기억을 회복하고 그걸 다시 지우면서 정령과 계약을 맺는 특성이었다.

사실 처음에 떠올린 기억 속 자신은 굉장한 쓰레기였다.

자신의 아버지를 애비충이라고 부르고 오빠에게는 한남충이라며 매도하지만, 정작 본인은 일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는 백조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물론 그 과거가 쪽팔린 것은 어차피 쓸모없는 남성들 따위를 매도한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 자신이 아무런 발전이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이 세계에서 각성조차 하지 못하는데 빌빌거리는 남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기억 속의 자신은 누구보다 남자를 혐오했지만, 현재의 자신이 보기에 그녀는 누구보다 '남성'에 가까운 인간이었다.

그것이 너무나 혐오스러웠다.

'웃긴 일이지.'

그 혐오스러운 모습을 기억에 남겨두고 싶지 않아서, 기억이 쌓일 때마다 곧바로 정령과 계약을 하는 것으로 지워버렸다.

계약을 강화해서 기존에 계약한 정령을 키워주는 것, 새로운 정령을 만나서 신규 계약을 맺는 것.

그 도피와도 같은 행동은 점점 자신이 제대로 된 헌터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해주었고, 어느새 나는 기억을 지우는 것보다는 더 강해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높은 자리에 서서 홀로 나를 키워온 언니,

누구보다 존경하는 유혜은 헌터의 옆에 설 수 있기를 기도하며, 매일 정령사로서의 능력을 갈고닦았다.

그 덕분에 지금은 언니의 옆에서 함께 헌터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꿈을 이뤄서 행복하던 찰나, 나는 이 세계의 정체와 관련이 있는 기억을 떠올려버리고 말았다.

FFF급 페미헌터.

제목만 보면 여성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는 헌터의 멋진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 소설은 실은 여성만 헌터가 될 수 있는 사회에서, 유일하게 남성 헌터가 된 주인공이 최면 능력으로 여자들을 강간하고 다니는 무시무시한 여혐 소설이었다.

물론 내용을 자세히 읽지는 않아서 주인공에게 정확히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모른다.

애초에 나는 그 소설의 존재도 누가 보력지원을 원한다며 링크를 올린 걸 보면서 알게 된 것이었으니까.

공지에 있는 변태적인 일러스트와 더러운 내용으로 가득한 프로필, 캐릭터 하나를 능력으로 강간하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프롤로그.

딱 거기까지가 내가 아는 이 작품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런데도 이 세계가 그 작품의 세계라고 확신하는 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아까 그 더러운 내용의 프로필에서 본 히로인 하나가 지금의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친언니이자, 최고의 매니저로 유명한 유혜은 헌터가 거기에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부정하고 싶었지. 근데....'

머리를 묶고 있는 흰색 H모양의 액세서리.

능력 때문이기는 하지만 새하얗게 물들어있는 긴 머리카락.

내가 아는 언니의 브래지어 크기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가슴 크기까지.

평소의 언니가 보여주는 외모 그대로가 그곳에 표현되어 있었다.

이걸 보고도 확신하지 못하면 바보였다.

심지어 그 소설의 프롤로그에서 주인공이 강간하던 유채린 헌터는 우리 공략팀의 리더이기까지 하니까.

'문제는 주인공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거였지'

그나마 이 작품은 주인공이 온갖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작품은 읽지 않았지만 리뷰 같은 건 눈팅으로 본적이 있으니까.

주인공은 자신이 각성했다는 것을 밝히지 않고, 주변 여성들을 능력을 사용해서 범하고 타락시켜 자신의 소유물처럼 만든다.

당연히 각성했음에도 밝히지 않는 것은 불법이다. 심지어 각성 능력을 이용해서 주변인을 강간하기까지 했다면?

내가 신고만 넣어서 각성자 범죄자로 처리된다면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이 세계의 주인공인 거다.

하지만 만약 신고했는데 그 대상이 주인공이 아니라면?

아마 나는 신뢰를 잃어버리기 시작할 거고, 안 그래도 민감한 각성자 범죄에 관련된 허위 신고로 인해서 내가 법적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아니, 처벌이 무섭진 않았다. 진짜 주인공을 잡지 못하는 게 무서운 거지.

나는 그게 무서워서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 결과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이었다.

머릿속이 텅 빈 것만 같다.

지금 뭐라도 해서 박은혁이 최면을 걸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그것과 관련된 아무런 것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도망쳐야 한다.

언니를 구해내려면, 나라도 일단 살아남아서 신고해야 했다.

유혜미, 생각해, 생각해. 생각하란 말이야!

"야, 유혜은. 정신 좀 차려봐. 동생 앞에서 꼴이 진짜.... 어울려준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혜, 혜미야.... 오늘 늦게 온다고 하지 않았어?"

"으, 응. 조금 일찍 일이 마무리돼서."

"정말 못 볼 꼴 보여줘서 미안해요 혜미씨. 혜은이랑 컨셉으로 이상한 거 하다가...."

컨셉?

지랄하고 있네.

언니를 그렇게 이상한 상태가 되도록 최면을 걸어놓고 강간할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그, 미안해 혜미야! 나, 진짜 이제까지 이런 건 창피해서 몰래몰래만 하고 있었는데...."

"...어?"

...아니지 언니?

드디어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신했다고 생각했는데, 언니가 저렇게 정상적인 표정과 얼굴로 말하니까 혼동이 되기 시작했다.

설마 그냥 박은혁은 언니의 남자친구고, 그냥 질펀한 컨셉 섹스라도 하고 있었던 거라고?

"이 모유는 뭐야? 임신이라도 했어?"

"그, 진짜 이건 꼰지르기 싫었는데. 얘가 이거 컨셉플레이 하고 싶다고 몬스터용 약물을 자기 몸에 놨대...."

"언니!? 몸 괜찮아? 어디 이상하진 않고? 그런 걸 왜...."

"어, 음...."

"너도 동생 앞에서는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구나. 솔직히 쪽팔리지?"

"조용히 해봐.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 중이니까."

진짜로 헷갈리기 시작했다.

물론 언니가 저런 언동을 취하는 것까지 전부 최면의 영향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신고를 하는 게 맞는데....

'만약 얘가 아니라면?'

언니가 이런 상태인 것은 물론 이상하다.

하지만 이미 다른 녀석한테 당해서 이런 성격으로 개변당한 거라면 어쩌지?

얘는 그냥 순진한 언니의 남자친구고, 진짜 주인공은 따로 존재한다면?

"알았어. 그리고, 그 은혁씨...."

"네?"

"알았으니까 옷 좀 입으세요."

"아.... 죄송합니다."

솔직히 이제까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긴 했지만....

잘생긴 얼굴에 다부진 체격, 그리고 보는 것 자체가 무서울 정도로 덜렁거리는 커다란 물건까지.

딱히 최면 능력이 없어도 여자가 잘 꼬일 것 같은 사람이었다.

'정신 차려, 유혜미. 그딴 술수에 속지 마.'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해.

주인공의 외모나 평소 행태는 중요하지 않아.

그리고 언니가 하는 말들은 전부 무시해, 그것들도 전부 최면의 산물일 수도 있어.

언니를 구하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제가 오해할 뻔했네요. 언니, 또 그런 위험한 짓 하면 정말 화낼 거야."

"으, 응. 미안."

"...의외네. 너도 동생한테는 약하구나."

"은혁아, 어쩌지? 나 쪽팔려 죽을 것 같아."

"너, 쪽팔린다는 감정도 가지고 있었어!?"

왜, 혹시 언니의 쪽팔린다는 감정을 네가 지워버렸니?

이 더러운 강간범 새끼야.

머릿속에 차오르는 분노의 감정과 불안, 두려움을 최대한 억누른다.

지금은 아니야.

최대한 모른 척 멀어지는 거야.

빨리 집 밖으로 나가서 조용히 신고하자.

"저, 잠시 편의점 좀 다녀올게요. 그동안 정리하고 계세요...."

"그, 잠시만요? 저기요?"

빨리 나가서, 휴대폰,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자.

각성 범죄 신고센터 번호가 몇 번이었지?

'실프, 주변에 녀석 있어?'

나는 이마에 올라온 뿔을 매만지며 정령에게 물었다.

혹시 그 녀석이 따라왔을지도 모르니까 확인해야 한다.

'없구나. 고마워.'

미미한 바람이 불면서 별것 아니라는 답을 내온다.

나는 실프의 답을 듣자마자 각성 범죄 신고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각성 범죄 신고센터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미신고 각성 범죄자를 신고하려고요. 이름은 박은혁, 아유팀의 매니저입니다. 능력 계열은 정신 조작으로 보이구요."

"알겠습니다. 접수.... 어라? 이분은 남자분이인데? 신상 정보를 잘못 주신 것 같거든요?"

그래, 이 세계에서 남자는 각성하지 않는다는 상식이 있었지.

주인공만큼은 그걸 벗어나서 각성했기 때문에 걸리지 않았고.

하지만 내 이름을 대고 강경하게 부탁한다면....

"아, 정말 위험할 뻔했어."

"저는 유채린팀 소속의 A급 헌터 유혜미입니다. 신상 정보는 맞고, 각성자가 남...."

"장난 전화라고 말『해줘』"

입에서 내 통제권이 사라진다.

남자가 맞으니까 그대로 접수해달라고 말해야 한다.

그거면 주인공은 끝일 거다.

"죄송, 합니다. 장, 장난...."

싫어.

장난 전화가 아니야.

그 녀석이 범죄자라고 말해야 해!

"장난 전화였어요."

띠리링.

내 말이 끝나자마자, 휴대폰을 빼앗아간 박은혁이 통화를 종료해버렸다.

역시, 네가 주인공이었구나.

"우리 오늘 아무것도 못 본 거로 하자. 이런 일이 있었다니 『너무 무섭긔』"

조금 전에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지워져 간다.

익숙한 감각이다.

정령과 계약하기 위해서 전생의 기억을 소모할 때와 비슷한 감각.

"싫어, 싫어...."

"미안해.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나도 살아야 하잖아?"

아.

아아?

내가, 왜.... 여기에 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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