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 3레벨 - 너무 무섭긔(8)
"오케이, 이 정도면 이번 주 정리는 마무리된 느낌이네."
아, 이번 주에 묘설아 장비 보러 가기로 했었지.
오늘 가자고 연락해놔야겠다.
"음?"
연락을 넣고 커피를 마시는데 자꾸 구석에서 나를 지긋이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쪽을 바라보자 얼굴을 붉힌 아영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워하긴.
그 옆에 앉아 있던 여유림은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눈치로 나와 아영이를 번갈아 봤다.
하긴 나만 보면 항상 죽일 듯이 노려보던 아영이가, 나를 보며 저렇게 사랑에 빠진 소녀의 얼굴을 하면 황당할 만하지.
근데 여유림 너도 얼마 안 남았어 시발년아.
'다음 주는 네 차례거든'
지금 당장 괴롭히고 싶긴 한데, 지금은 애들 장비 맞춰주는 것이 먼저니까.
오늘은 정아와 묘설아 장비를 보러 나가야 한다.
"매니저님!"
"어, 설아씨는?"
"미리 차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오케이."
나는 아영이에게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
헌터용 밴에 올라타자 왠지 내 시선을 피하면서 궁시렁거리고 있는 묘설아가 보였다.
화났나?
"설아씨 미안해요. 일이 이렇게 밀려서 금요일에서야 나가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것 때문에 화난 거 아니거든요?"
그럼 뭐 때문인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묘설아의 눈초리를 따라가자 그 끝에는 싱글벙글 웃고 있는 정아가 있었다.
아 정아까지 같이 가는 게 불만이구나.
"죄송해요. 원래는 설아씨한테 집중해야 하는데...."
"알면서 그래요?"
"정아가 7레벨로 올라버려서요. 두 분 모두 좀 장비 교체가 급해요."
"...저는 어제 8레벨 찍었는데"
"네?"
이런 미친.
얼마 전까지만 해도 6레벨 아니었어?
갑자기 2레벨이나 올랐다고?
저렙때야 그런 경우가 있다지만 6레벨에서 8레벨이 이렇게 빠를 수가 있나?
"엄청난 속도네요...."
"그러니까 특별 취급으로 혼자 데리고 가셨어야죠."
"죄송해요. 지금이라도 정아 내리라고 할까요?"
오히려 지금 드랍해버리면 정아 본인은 좋아할 텐데.
확실히 아직 7레벨인 정아보다는 8레벨인 묘설아의 장비를 맞추는 것이 우선이었다.
"늦었어요. 대신 이따가 밥 먹기로 한 건 우리 둘끼리 먹어요. 자리를 두 개밖에 못 구했어요."
"어, 음. 정아 너는 괜찮아?"
"네♡"
그래, 괜찮으시겠지.
네가 방치 플레이나 유기 플레이를 거부할 리가 없으니까.
이럴 때 보면 정아의 저런 취향이 편리하긴 하네.
"음, 일단 브래지어부터 살까요?"
"아마 그거부터 사는 게 맞겠지."
마력이 가슴에 모이는 만큼 가장 효과적으로 마력의 사용을 돕고 강화해주는 장비가 바로 브래지어다.
특히 마력을 주 코스트로 사용하는 정아에게는 이 브래지어에 장비 비용의 대부분을 투자할 생각이었다.
"이거 신상인가?"
정아는 전시된 브래지어 하나를 가리키며 설명을 읽기 시작했다.
헌터 장비 브랜드 노조미의 신작인 것 같았다.
B급을 대상으로 잡은 것 같고 가격이 1억이면 평균적인 선이네.
"이거 노조미쪽 신상이죠?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아, 트라비아 H7이요? 이번에 노조미 쪽에서 자신 있다면서 전시해보라고 하더라고요. A급까지도 커버 가능할 거고, 마력 보조회로는 최신식이라고 합니다."
말만 번지르르하지, 특별한 기능이 없었다.
어차피 마력 보조회로는 구형 브래지어에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사양이다.
정 살만한 물건이 없으면 모를까 굳이 선택할 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은혁씨 이거 어때요?"
이번에는 묘설아가 괜찮아 보이는 것을 찾은 모양이다.
예시로 나와 있는 크기도 작은 것이 특수 코스트형 헌터 용으로 보였다.
8천만?
8레벨이면 좀 더 비싼 거 골라도 예산이 나올 텐데.
"처음 보는 회사네요."
"그렇긴 한데 효과가 너무 찰떡이에요."
A급까지 견디는 마력회로 부분이야 당연한 거라 넘어가고, 특수 기능이 처음 보는 형태라 신선했다.
지정한 마력까지 회복될 때마다 자동으로 사용자에게 알려주고 표시되는 기능이라니.
물론 주기적으로 마력을 써서 코스트를 만들어 줘야 하는 헌터들에겐 있으면 좋은 능력이었다.
하긴 특수 코스트 쓰는 헌터들은 어차피 마력쪽 사용을 강화하는 것보다는 이런 편의성을 늘리는 것이 맞겠네.
그리고 신선한 방식임에도 가격은 비슷한 장비들보다 살짝 저렴한 수준이라서 경쟁력도 좋았다.
머리를 잘 썼네.
"그럼 설아씨는 이거로 하죠."
"네. 문제는 정아네요?"
"그러게요."
마력을 주로 사용하는 원소계는 이런 브래지어가 장비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그래서 좀 비싸더라도 제대로 된 이득을 볼 수 있는 효과를 구현한 녀석을 사야 하는데....
"음, 이건 아무래도 정아한테 안 맞겠네."
"아, 그거 아영 선배가 쓰는 거죠?"
"엉."
현재 아영이 사용하고 있는 프레이아 009이다.
몸을 회전하는 불속성 마력을 식혀줘서 특성을 통해 낼 수 있는 불의 온도를 더 올리게 해주는 녀석.
아쉽지만 얼음 계열인 정아와는 반대의 상성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좀 따뜻하게 해주는 건 없나."
"저 근데 굳이 그렇게 온도 안 맞춰도 괜찮은데."
"왜?"
내가 되묻자 정아가 주변을 살피더니 내 귀에 속삭였다.
"가슴에 살짝 동상 걸릴 것 같아서 기분 좋아요."
"미친년아...."
얘는 이미 전투 효율이 아니라 자해 효율을 따지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내 눈에는 하나의 장비가 들어왔다.
그럼 저걸 쓸 수 있겠네....
"이건 어때?"
"브래지어, 가 아니네?"
"가린 면적이 작아서 그렇지 보디슈트야."
브래지어와 팬티가 하나로 합쳐진 종류의 장비다.
이것도 노조미사의 작품인데 판매율은 완전히 망했지.
"대상은 B급인데 이거 하나가 무려 5억에 출시됐었지."
"오, 근데 3억인데요?"
"안 팔려서 재고로 남은 거야. 그래서 이건 주문 제작이 안될 거라 사이즈 확인해야 해."
노조미사의 블랙페더 X다.
일반적으로 헌터들이 자주 사용하는 장비인 브래지어와 팬티를 합치기 위해 보디슈트라는 특별한 디자인을 채용했다.
그 덕에 실질적으로 두 장비가 서로 연계되며 고효율을 발휘한다는 건데....
'문제는 저게 좀 미친 장비란 거지.'
난 처음에 설명보고 생각한 새끼가 또라이인가 싶었다.
누가 보지에 거대 딜도를 끼워 넣어야 하는 보디슈트를 장비라고 팔아?
하지만 저딴 디자인으로 내놓았는데도 3억이나 되는 가격대라도 유지하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압도적인 성능.'
이딴 짓거리를 하면 성능을 여기까지 올릴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듯한 미친 물건이었다.
딜도 내부에 들어있는 수많은 마력 회로는 브래지어 부분과 연동해서 엄청난 수준으로 출력을 증폭시켜준다.
대신 몸에 걸리는 부하가 가슴 뿐에서 질 내부까지로 늘어나는 커다란 단점이 생긴다.
근데 그 단점이 마조인 정아에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정아라면 그 정도 고통은 즐기면서 싸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내 설명이 대충 끝나자 정아는 눈을 반짝거리며 구매를 확정했다.
"그럼 무조건 이거요. 사이즈는 나중에 늘릴 수도 있대요!"
"그럴 줄 알았다."
"으, 저건 좀...."
묘설아는 흉악해 보이는 딜도의 크기를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저거 성능만 생각하고 사용자 배려는 전혀 하지 않은 것이 레전드네.
누가 저런 걸 넣고 싸워.
"헤헤...."
"그런 애가 여기 있구나."
이게 왜 진짜로 있어.
대충 브래지어 구매가 끝난 뒤에는 팬티가 모여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이제 가장 중요한 묘설아의 팬티를 구매할 차례였다.
"한 5억까진 땡길 수 있으니까 좋은 걸로 사요."
물론 정말 5억짜리를 사면 상부에서 나를 호출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걸 무마시킬 자신이 있었다.
묘설아가 지금 무려 8레벨인데 겨우 이까짓 장비를 못 사주겠어?
그렇게 우리는 꽤 열심히 팬티를 둘러봤지만 괜찮아 보이는 것을 찾지 못했다.
대부분 원거리용인 방어 기능을 가진 팬티였다.
물론 이런 것도 괜찮지만 묘설아는 항상 원거리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서 굳이 이런 형태를 구매하긴 애매했다.
"어, 이쪽은 어때요?"
"아, 마술도구를 수납하면 되겠네요?"
근접용 팬티는 원거리처럼 방어 능력을 주진 않는다.
어차피 팬티로 막을만한 공격은 근접 계열이라면 직접 막거나 맞아서 버틸 유지력이 되니까.
대신 무기를 저장할 수 있는 수납 기능의 팬티를 쓰는 경우가 많다.
"오, 이거 4.5억이긴 한데 수납량이 엄청나네요."
"와...."
원래 무기 한두 개 정도 넣을 수 있는 확장이 기본인데, 이건 거의 100개까지는 수납이 가능한 것 같았다.
무슨 원리로 이게 가능한....
"아?"
"......."
그럼 그렇지.
물리적으로 공간이 많으니까 그랬구나.
시발 이제 물건 수납한다고 딜도까지 처박고 싸우는 시대야?
'물론 딜도라기엔 되게 귀여운 수준이긴 한데....'
훨씬 짧고 귀여운 형태였다.
딜도라기 보다는 보지 끝에 살짝 삽입되기만 하는 수준이었다.
아마 마력회로와 저장공간 자리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정도만 사용한 정도겠네.
이 정도면 전투할 때도 괜찮겠지.
...괜찮으려나?
"역시 이건 좀 아닌 것 같죠? 다른 걸로...."
"이, 이걸로 할게요."
묘설아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상태로 말했다.
부끄럽긴 해도 저게 전투에 도움이 된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이즈 측정 좀 부탁드릴게요."
"네."
우리가 구매한 3개의 장비는 모두 현재 둘의 사이즈에 해당하는 물건의 재고가 있어서 바로 수령할 수 있었다.
나는 법인카드로 결재를 마친 뒤에 헌터 밴에 장비들을 실었다.
"정아 너는 여기서 알아서 가라."
"흣♡ 그럼 장비라도 주고 가시면 안 될까요?"
"어림도 없지."
"저, 정말 놓고 가요?"
묘설아가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지만 나는 정말로 출발했다.
아니 쟤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알아서 돌아가겠지.
"음식점이 어디라고 했죠?"
"아, 네비에 검색기록 있을 거예요."
와, 여긴 또 어디야.
뭔가 딱 봐도 존나 비싸 보이는데.
평소에 이런 곳에 돈을 쓰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신기했다.
"이런 데가 근처에 있었구나."
"모르셨어요? 여기 되게 좋은데."
"...귀찮아하는 편이라서요."
딱히 돈이 모자란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럴 돈으로 고아원에 기부하면 애들이 맛있는 거 많이 먹을 수 있단 말이야.
행복이 복사가 된다고.
"은혁씨도 월급 꽤 많으시지 않아요? C급인 저희랑 비슷한 걸로 아는데?"
"아, 대부분은 아는 고아원에 기부해버려서요. 거기 애들이 가족처럼 따르다 보니까 멈출 수가 없네요."
묘설아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휴대폰을 꺼내서 두드렸다.
나는 네비에 적힌 음식점의 주차장에 밴을 멈춘 후에야 그녀를 다시 봤다.
"왜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왜 저렇게 뚫어져라 본담.
하여튼 우리가 음식점에 들어가서 예약 사실을 알리자 창문가 자리로 안내받았다.
아무래도 저녁을 먹기에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빈자리가 조금 있었다.
"오, 분위기 좋다."
"그러게요."
슬슬 저녁이 되면서 주황빛으로 변하기 시작한 도시의 전경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음식점은 이상한 건물에 시야가 가려지지도 않는 엄청 이상적인 위치의 자리에 있었다.
예쁘다.
"여긴 뭐가 맛있어요? 추천받아도 되죠?"
"저는 B세트를 좋아하는데. D도 꽤 호평이에요."
B는 까르보나라와 스테이크.
D는 맥앤치즈와 비프스튜.
대충 고기 요리 하나랑 면 요리 하나로 이루어져 있는 건가?
"그럼 B랑 D를 하나씩 시켜서 나눠 먹는 건 어때요?"
"아, 좋아요. 그렇게 해요."
그렇게 주문을 넣고 요즘 훈련에 불편한 점은 없는지 물어봤다.
"없어요. 오히려 너무 걱정해주셔서 귀찮을 정도거든요?"
"너무 확확 실력이 좋아지시니까 그렇죠."
"칭찬으로 들을게요."
칭찬 맞거든?
어이가 없어져서 웃음을 흘리는데 그녀가 말없이 테이블에 뭔가를 올려뒀다.
'카드?'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걸 꺼냈던 품속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 카드에 적힌 것은 분명히 '다이아4'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