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9 병약 소녀 공략을 시작합니다. =========================
그렇게 백령과 손을 잡고 옥상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탄 채 도착한 옥상은 예상보다 훨씬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각양각색의 꽃과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사람들이 제대로 운동할 수 있도록 넓은 강당같은 크기의 정원에 길을 만들어 놓기까지. 거기다가 병원 옆 동과 연결되는 구름다리까지 있는 걸 보니 진짜 제대로 된 복지 시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옥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하거나,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백령의 손을 잡고 정원을 걷기 시작했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고 백령의 손을 이끌고 천천히 정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백령도 내가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리고 에스코트하듯이 걷자 조금씩 가느다란 숨이 본래의 호흡을 되찾더니 살짝 부끄러워하면서도 착실히 내 보폭에 맞춰 걸어주기 시작했다.
향긋한 꽃향기와 함께 풍겨오는 백령의 샴푸 향기에 나도 모르게 멍하니 걸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윤하의 향수가 지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윤하를 잊지는 않았지만 허무함이나 절망감은 어느 정도 잊혀진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백령을 응시했다.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훨씬 혈색이 좋고, 아직 풋풋하게 부끄럼을 타는, 찰랑이는 백발이 무척이나 어울리는 소녀.
그녀가 나를 이때까지 어떻게 생각해왔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솔직히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만큼, 내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소중한 사람이 사라졌을 때의 그 감각만큼은 나도, 그녀도 절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의 온기를 느끼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점도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백령의 어깨에 얹은 손에 힘이 들어갔고, 백령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아, 미안."
내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백령이 괜찮다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어딘가 호기심이 동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하세요, 오빠?"
백령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받으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너랑 이런데를 와보는건 처음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적당히 둘러댄 내 말에 어째서인지 백령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말했다.
"그, 그러네요. 흠흠... 이, 이것도 일종의 데이트..."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던 백령은 결심한 표정을 짓더니 내 팔을 자신의 가슴팍에 슬며시 끼우더니 내 팔을 자신의 양팔로 껴안았다. 그러는 백령은 고개를 휙 돌린채 내 시선을 피하면서도 연신 내 팔을 꽈악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광경을 본 주변 사람들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와 백령을 쳐다보고 있었다.
"후후, 요즘 애들은 참 뜨겁구만."
"여자애가 엄청 적극적이네. 되게 예쁘다."
"우와... 머릿결봐."
주변 사람들의 중얼거림을 들은 것인지 백령은 연신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귀도 살짝 달아오른 걸 보니 어지간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나는 속으로 쿡쿡 웃으면서 백령의 의도대로 놀아주기로 했다. 비록 그녀의 가슴이 무척이나 빈약해서 팔에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다소 유감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백령과 함께 정원을 걸으면서 꽃이랑 나무의 향기를 맡고, 적당한 잡담과 대화를 나누면서 산책을 마쳤다. 그리고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엘리베이터를 탄 백령이 내 팔을 놓으면서 중얼거렸다.
"...죽을 것 같아요."
완전히 기력이 다 빠졌는지 백령은 허물어지듯이 내게 등을 기댔고, 나는 그런 백령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네 생각보다 사람들이 훨씬 호의적이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요."
백령은 방금 전 사람들의 대화를 떠올렸는지 얼굴을 붉히면서도 살짝 미소지었다. 하긴, 여자들 중에서 예쁘다는 칭찬을 듣고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그런 백령을 데리고 16층에 도착하니 백령이 내게 기댄 등을 떼더니 카운터에 있는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내일, 태훈 오빠랑 같이 외출할거니까 아빠한테 말해주세요."
"네? 하, 하지만 아가씨 몸이..."
간호사는 걱정하듯이 백령을 한 번 훑어봤지만 잠시 후 그 눈초리가 의아함으로 바뀌었다.
"아가씨, 방금 전 보다 살도 조금 붙으신 것 같고, 혈색도 돌아오셨네요?"
고작 몇 시간 사이에 이렇게 변한게 이해가 되지 않는지 의아한 표정을 짓는 간호사였지만 백령이 생각보다 몸 상태가 괜찮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병원장님한테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대신, 너무 늦게 돌아오시면 안 돼요? 그리고... 태훈 씨라고 하셨죠? 저희 아가씨 잘 부탁드릴게요."
"물론입니다."
생각보다 융퉁성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말에 화답하듯이 백령의 어깨를 끌어당겨 내게 안기도록 했고, 그녀를 뒤에서부터 끌어안은 채 백령과의 친밀감을 그녀에게 과시하니 그녀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정작 내 품에 안긴 백령은 연신 얼굴을 붉힌 채 부끄러워하는 중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병실로 돌아온 백령은 곧바로 내게 베개를 던졌다.
"으으, 정말! 뭐하는 짓이에요! 아까 언니 앞에서 왜 그런짓을 한거에요?!!"
백령이 얼굴을 붉히면서도 내게 베개를 던져대자 나는 날아오는 베개를 쳐내며 말했다.
"아니, 그 정도는 해야지 그 분도 나를 믿을 것 같아서."
"말도 안 돼는 소리를...!"
그렇게 말하면서 베개를 잡아 휘두르려던 백령은 어느새 지쳤는지 헥헥 거리면서 침대에 주저앉았다.
"내일, 쇼핑하러가요."
"응? 나야 상관없지만 갑자기 왜?"
"그냥 오랜만에 거리를 돌아다니고 싶어요. 옷도 사고 싶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고. 영화도 보고 싶어요."
한동안 병원에만 있어서 아무것도 못했거든요. 그렇게 말하면서 투덜거린 백령을 침대에 눕힌 나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내일 아침 9시에 데리러 오기로 한 뒤에 백령과 손가락 약속까지 해야했다.
"...알았죠. 다음부턴 사라지기 전에 꼭 말하고 가야돼요."
"알았어.알았어."
몇 년 전의 일이 그렇게 한이 맺혔는지 백령은 연신 내가 자신을 버리고 갔다는 어투로 투덜거렸고, 나는 그런 귀여운 백령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달랬다.
"그럼, 오늘은 이만 갈게. 집에서 가족도 기다리고 있고."
지금쯤 빈이가 돌아왔을 시간이니 슬슬 돌아가봐야 하리라. 저녁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말이다.
"...내일 9시에요. 잊지마세요."
"알았어.알았어."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백령의 부드러운 백색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백령은 내게 안긴 채 내 가슴팍에 얼굴을 비벼대면서 킁킁거리는게 꼭 강아지가 자기 어미의 냄새를 맡는 것 같았다.
묘하게 간지러운 느낌이 들기도 하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백령에게 주의도 줄 겸 나는 그녀를 부드럽게 끌어안은 뒤 그대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달콤한 향기와 함께 그녀의 가냘픈 몸이 내 품에 모두 들어왔다.
새하얀 이마에 입을 맞춘 시간은 3초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내 품에 안긴 백령의 몸이 완전히 정지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작해야 이마에 키스 정도로 이렇게 될 줄이야.
그렇게 나는 짧은 입맞춤을 끝으로 황급히 백령에게서 떨어져서 그대로 병실을 벗어났고, 뒤에서 백령이 지르는 비명이 들려왔다.
"꺄아악! 이 벼, 변태에!"
아니, 안아달라고 할 때는 어제고 고작해야 이마에 키스한 것 가지고 변태라 하다니. 여자 마음은 참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8시 50분. '나 삐졌어요'라고 대놓고 시위를 하듯이 볼을 부풀리고 있는 백령을 보면서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어제 기습 키스(고작해야 이마인데 말이다)를 당한게 어지간히도 마음에 안 들었는지 연신 고개를 휙휙 돌리고 있었다.
"미안하다니까."
"뭐가 미안한데요."
아, 이거 들어본 적 있어. '오빠는 내가 왜 화를 내는지 모르지?'랑 똑같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럼 앞으로는 이마나 다른데에도 키스 안할게."
내 예상대로 내 말을 들은 백령은 갑자기 어딘가 실망한 듯한 표정과 함께 우물쭈물거리기 시작했다.
"...아, 아니... 그렇다고 싫다는 건 아니고... 그, 뭐라고 할까..."
애초에 이마 말고 다른 곳에는 키스한 적도 없었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백령은 얼굴을 붉히면서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웃고 있는 나를 보고나서야 내가 장난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으으! 또 장난친거지!"
"아아, 미안미안. 너무 귀여워서."
나는 쿡쿡 웃으면서 백령을 끌어안았다. 내 품에 안긴 작은 체구의 백령은 어릴 때에 비하면 무척이나 큰 것일지 몰라도 내게는 여전히 꼬맹이처럼 느껴졌다.
어제와는 다른 달콤한 로즈마리 향을 맡으면서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백령은 투덜거리면서도 나를 밀어내지는 않고 내게 안긴 채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10여 분 정도 서로를 끌어안은 채 달래기가 끝나고, 나는 백령의 부드러운 손을 잡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거리에 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백령에게 집중되는게 느껴졌다.
수십, 수백명의 사람들이 백령을 쳐다보고 있자 백령은 몸이 잔뜩 움츠러 들어서는 내 등 뒤로 숨어버렸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내 옆으로 끌어낸 뒤 당당하게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처음에는 끈적하게 따라붙었지만 금세 사라졌다. 다만 사람들의 중얼거리는 말들은 내 귀에 생생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와... 쟤 봐. 백발이야."
"남자도 엄청 잘생겼네. 근데 여자애는 병이라도 있는건가?"
"나도 흰색으로 염색해볼까...?"
끈적하게 달라붙은 시선들을 두려워하던 백령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헐뜯기보다는 신기함과, 부러움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조금 더 자연스럽게 내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긴 백발이 햇빛에 비쳐 은빛 호수처럼 찰랑였고, 다소 마른 체구와 귀여운 외모는 다른 남자들에게 보호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다만 내가 그녀와 손을 잡은 채 걸어서 그런지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지만 내가 없었다면 곧바로 작업을 걸었을 분위기였다.
"인기 많네. 안 그래?"
"...나중에 두고 봐요."
백령은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붉히면서 내 옆구리를 꼬집었고, 별로 아프진 않았지만 나는 일부러 과장된 리액션을 하면서 웃었다.
백령도 이런 상황이 영 싫지만은 아닌지 처음의 초조함과 부끄러움을 떨쳐내고 꽤나 당당하게 걷기 시작했다. 백령과 내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경탄과 부러움 섞인 말들을 뱉어냈고, 그 말을 들은 백령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내 팔을 끌어안았다.
동시에 주변 남자들한테서 저주 섞인 탄성들이 터져나왔다. 으음, 백령이 고등학생이라는 것을 안다면 저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졌다. 아니, 그 전에 내가 먼저 원조교제로 잡혀가려나?
나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백령을 에스코트했고, 어느새 우리는 백화점 앞까지 와 있었다. 그렇게 백령을 데리고 백화점으로 입장하려는 순간, 정장을 차려입은 한 남자가 나와 백령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실례합니다만,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정중하게 말한 남자는 나와 백령을 번갈아보더니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뉴월드 백화점 부장'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눈앞의 남자가 새삼 대단하게 보였다.
나보다 고작해야 두세살 많아 보이는 나이에 이런 대형 백화점 부장이라니. 혹시 부모가 이쪽업계에서 일하는 것일까. 백령도 그렇게 내 주변에는 금수저가 너무 많았다.
나는 명함을 확인하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백령도 날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남자는 감사 인사를 한 뒤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설명을 듣던 나는 점점 입가에 웃음이 걸렸고, 백령은 정반대로 창백해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
(후원, 원고료 쿠폰은 연재 속도나 연참 확률을 대폭 상승시킵니다.)
(추천해주시면 연참 확률 UP!)
1. 요즘 슬럼프라 해야할지 글이 잘 안써지네요. 조금 막막하다 해야할지... 좀 있으면 시험도 있고. 당분간은 연재주기가 뜸해질 것 같습니다. 양해해주시길.
2. 선추코는 사랑입니다. 쿠폰도 감사합니다. 최대한 빨리 컨디션 회복해서 글쓰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