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4 레베카와 데이트 =========================
그렇게 레베카와의 데이트가 끝난 뒤, 레베카는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이 되어서야 돌아갈 수 있었다. 다음에 또 오겠다고 했는데, 그 때는 조금 더 오랫동안 같이 있자고 말하는 레베카를 나는 한 번 안아준 뒤 꼭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레베카의 풍만한 가슴...이 아니라, 떠나가는 레베카를 아쉬워하면서 나는 인사를 했고, 레베카는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은 나도 꽤나 피곤 했기에 곧바로 집에 들어가서 루시가 차려놓은 점심 겸 저녁을 먹고 그대로 잠들었다.
다음 날, 개운한 기분으로 눈을 뜬 나는 옆에서 다소곳이 누운 채 잠든 루시가 깨지 않도록 침대에서 빠져 나온 다음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아침 일찍 근처 강가를 따라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운동이 끝난 뒤 나는 루시가 차려놓은 아침을 먹은 뒤 학교로 갔고,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꾸벅꾸벅 졸면서 간신히 수업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요즘 들어 너무 수업이 지루하게 느껴진단 말이지...'
스텟이 올라간 덕에 과제나 시험이 어렵긴커녕 너무 쉬워서 문제지만 '일상'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나름대로 문제였다. 요즘들어 하도 스펙타클한 인생(여자 관계에 관해서만)을 살았더니 이런 일상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졌다.
"...일종의 등가교환인가."
뭐, 애초에 이런 능력을 얻었으니 따라붙는 어쩔 수 없는 패널티라 생각하면 되리라. 애초에 수업 듣는걸 즐거워하는 변태도 아니였고 말이다. 그저 인생의 긴장감이 약간 사라진 것 뿐이다.
아니, 긴장감의 난이도가 올라갔다고 해야 하려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학교를 빠져 나왔고, 시간을 확인한 뒤, 과외를 하기 위해 수연과 수빈의 저택으로 향했다. 평소처럼 문을 열고 들어오자 그곳에는 수연과 수빈, 그리고 어째서인지 임정은이 같이 있었다.
세 사람은 정원에 나란히 서서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 태훈 씨. 오늘은 조금 일찍 오셨네요?"
"그냥 시간이 남아서 일찍 왔습니다만..."
사실 수빈의 상태가 궁금해서 온거였다. 자위봉인까지 걸어놨으니 과연 어떻게 되어 있을지 궁금해서 말이다.
나는 힐끔 고개를 돌려 수빈의 상태창을 확인했고, 수빈의 흥분도가 82인걸 보고 생각을 그만뒀다. 저거 완전 폭발 직전이다. 임정은만 없었으면 여기서 날 덮쳤을지도 몰라.
슬쩍 보니 수빈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 치마를 잡고 있는걸보니 어지간히 스스로를 절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오늘은 공부 대신 저희를 조금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네?"
내가 되묻자 임정은이 특유의 포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팔짱을 끼면서 걷기 시작했다. 다시 문을 넘어 저택 밖으로 나온 우리는 거리로 나갔고, 사람들의 이목을 잔뜩 끌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미녀 한 명과 미소녀 두 명이 이렇게 거리를 걸어다니면, 그것도 미녀는 옆에 남자를 끼고 있으면 당연히 그렇게 보이겠지만 말이다.
"사실, 내일 수빈이랑 수연이의 수업참관일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바빠서 내일 참가할 수가 없어서요. 간단한 학부모님들과의 면담도 있는데......대신 가 주실수 없을까요?"
그녀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그건 가족만 갈 수 있는 거 아니었나요? 외부인인 제가 가도 괜찮은겁니까?"
내 말에 임정은이 약간 삐진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외부인이라뇨. 태훈 씨가 저희 집안이랑 얼마나 깊~은 관계인데요."
그녀의 말에 더 이상의 반박은 용납치 않겠다는 기색이 담겨 있었기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임정은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내게 말했다.
"저도 사실은 정말 참관하고 싶었지만... 내일 있는 일이 도저히 뺄 수 없는 일이라서요. 잘 부탁해요. 태훈 씨."
"저야 뭐 딱히 상관없습니다. 마침 내일 듣는 강의들도 일찍 들어 있어서 수업 참관하는데는 지장도 없고요."
"그거 다행이네요. 수업 참관은 6교시와 7교시니까요. 부디 잘 부탁드려요."
어라, 그러고보니 정작 중요한 걸 못들은 것 같은데.
나는 임정은에게 다시 말을 걸어서 물었다.
"그건 그렇고, 수빈이랑 수연이 다니는 학교는 어딥니까? 이때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아, 그랬죠. 저도 참."
임정은이 얼굴을 붉히면서 살짝 부끄러워 하더니 수빈과 수연이 다니는 학교의 이름을 말했고, 나는 그 이름을 듣고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렇게 어제는 하루 종일 임정은과 수빈, 수연의 에스코트를 하면서 쇼핑을 도와주며 짐꾼 노릇을 했는데, 나는 아직도 머릿속이 멍한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게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내가 매일 같이 교문 앞을 지나가는 '빈이'가 다니는 고등학교였으니까. 참고로 내 모교이기도 하다.
그렇게 교문 앞에 선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세상 참 좁구만. 설마했는데 그 둘이 빈이랑 같은 학교일줄이야. 설마 같은 반은 아니겠지. 나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학교 안으로 들어갔고, 과거 내가 다닐 때도 있었던 선생님들 중 몇 분이 나를 알아보고는 인사를 하셨다.
"어, 이거 태훈이 아니야? 무슨 일로 온거야?"
"아... 동생 수업 참관 때문에요."
나는 적당히 둘러대고 가려고 했지만 선생님들은 나를 붙잡고 위로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태훈아... 설화 일은 괜찮니?"
"네가 설화랑 소꿉친구라고..."
"힘들었겠다. 이제 좀 괜찮니?"
'설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욱씬거렸다. 한동안 외면하고 있었던 사실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으니 정신이 멍해졌고, 왠지 모를 분노가 치밀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들은 나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일 뿐이고, 결코 악의는 없었으리라. 하지만 인간은 그런것과는 별개로 얼마든지 분노할 수 있는 존재였다.
나는 누구를 향해서도 토해낼 수 없는 분노를 천천히 집어삼켰다. 사실 내가 느낀 분노는 '원망'과'절망'이 뒤섞인 감정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었다.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여서 그런 분노를 일으킨 것이었다.
'...설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리가 차가워졌다. 그래, 지금 내가 이런 짓을 하면서 다른 여자들과 관계를 맺고 다니는 것도 결국은 설화를 되살려내기 위해서였다. 나의 하나 밖에 없는 소꿉친구. 누구보다 내가 사랑했고, 나를 아껴줬던 소중한 친구였다.
그리고, 더없이 억울하게. 타의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내게는 그런 그녀를 살릴 '의무'와 '권한'이 있었다. 그녀에게 누구보다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나였으며,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한 사람도 나였다.
그리고 나는 '신'한테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물론 이 게임을 클리어해야만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앞에는 날 걱정하듯이 쳐다보고 있는 세 명의 선생님들이 있었고, 나는 조금 힘들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웃는 표정을 연기할 수 있었다.
"...네, 이제 곧 괜찮아질 거에요."
곧 설화가 내 곁으로 돌아올테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테니까. 나는 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선생님들은 내 말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의문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대로 선생님들의 곁을 떠나서 수빈과 수연이 있는 반으로 향했다. 더 이상 설화와 관련된 대화를 했다간 나도 나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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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정말 끔찍한 일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푸념 비슷한거라 넘어가셔도 무방합니다.
마침 오늘 사촌들을 비롯한 친척들이 집에 오는 날이라 점심 먹고 조금 지나서 수위가 거의 없는 이번편을 쓰면서 사촌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사촌 남동생 하나가 와서는
"엄마 아빠가 지금 내가 입는 옷들을 다 버려도 좋으니까 키만 제발 커라고 말했어."
라고 하면서 자신의 작은 키가 콤플렉스라고 하더군요. 저도 과거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기에 저도 반쯤은 농담으로.
"나도 지금 사놓은 브래지어 다 버려도 좋으니까 가슴 좀 커졌으면 좋겠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연히 그 녀석이 부끄러워하거나, 웃을 줄 알고 말했는데, 이 빌어먹게 순진한 녀석(중1)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걸로 끝난 줄 알았는데 좀 있다 친척들 다 모인 거실에서 엄청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갑자기 방에 들어온 아빠가 절 부르시더라고요.
저는 영문을 모른 채 거실로 끌려 나갔고, 그리고 갑자기 고모가 말씀하시길. "OO아, 너도 가슴이 콤플렉...크흐흡."
이러면서 말을 잇지 못하시고 자지러지게 웃어대시더군요. 순간 무슨소린가 하던 나는 잠시 후에야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 사촌동생 녀석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를 못해서 자기 부모님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제가 한 말을 그대로 전했고, 거실에서 다 같이 이야기하시던 친척분들이 그 말을 전부 들은겁니다.
그렇게 저는 한참동안이나 친척 분들 앞에서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했습니다. 쥐구멍이 있다면 정말로 숨고 싶었어요.
진짜 죽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죽을 것 같아요. 저녁 시간에 친척들 얼굴을 어떻게 볼지 고민중입니다. 그냥 피시방가서 시간이나 때우고 올까요..?
누구라도 좋으니 살려주세요. 이 흑역사를 누가 지워주세요. 제 인생에서 이런 수치플레이는 또 없었단 말입니다.
.....울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