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H로 레벨업-54화 (54/199)

54====================

Side유민-그녀의 사연-

이번 편은 번외에 가까운 '유민의 관점에서 본' 유민의 과거와 현재입니다.

"......하아."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난번 최태훈이라는 남자와의 약속을 한 이후로 약속대로 교수들과는 딱히 별다른 관계를 맺지 않았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을 포섭해서 더 이상의 관계를 맺을 필요도 없었지만 내가 지나칠정도로 완벽을 기했던 것은 동생인 송희 때문이었다.

현재 이사장인 송희의 친아버지가 송희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교수들을 비롯해서 학생회장 자리까지 차지하며 어떻게든 내 가치를 증명해냈다.

그 과정에는 몸을 팔거나 뇌물, 그리고 폭력 등 온갖 더러운 수단이 존재했다. 그렇게까지 권력이 갖고 싶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었다.

단지, 내게 남은 유일한 변명거리는 하나 있었다.

내 엄마와 나는 전(前) 아버지라는 작자에게 폭행을 당했다.

단순한 물리적 폭행이 아니라 몸과 정신이 완전히 망가지기 직전까지 가는 그런 끔찍한 폭행이었다.

아버지라는 작자는 몽둥이를 들고 어머니를 개패듯이 팼다. 허구헌날 술타령을 하고 도박판을 전전했다.

과거 사업이 잘 나갈때만 해도 저런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업이 망한 직후, 번지르르하고 기품있던 얼굴에는 탐욕과 증오만이 꿈틀거렸고, 그 분노는 온전히 우리에게로 돌아왔다.

술을 마시고 와서는 엄마를 개패듯이 패고 마음대로 범했다. 섹스가 아니라 강간이라 불러 마땅한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는 바닥에 내팽개치고 집에 남아있는 돈을 긁어모아 떠났다.

나도 몇 번이나 그 인간에게 강간을 당할 뻔했다. 그 작자는 내 얼굴을 잡고는 '애미를 닮아 얼굴을 반반하구만.' 이라고 중얼거리고는 나를 범하려고 했다.

물론 그 때마다 엄마가 달려들어서 어떻게든 말렸고, 나도 도망갔지만 그게 내가 15살때의 일이었다.

그렇게 몇 달 동안이나 더 당하던 폭행이 끊어진 것은 엄마가 아내를 잃은 어떤 재벌남의 눈에 띄고 나서부터였다.

드라마같은 사랑이 이뤄지고, 쓰레기같은 이전의 아버지는 지금의 아버지에 의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아마 지금쯤 어딘가에서 새우를 잡고 있지 않을까. 적어도 몇 년 동안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것은 확실하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송희의 아버지를 새로운 아버지로 받아들이게 됐고, 힘을 추구했다. 무력이 아니라 권력을. 다시는 나와 엄마를 함부로 건들이지 못할 권력을 말이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것도, 맞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바꿨다. 내성적인 성격은 외향적으로, 감정적인 생각은 죽이고 냉철하게, 이익과 손해를 따지며 몸파는 것조차 거리끼지 않았다.

사실 처음으로 몸을 판 그날, 나는 실소하면서 울었다. 여러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야하는 것일까.

과거 아버지에게 강간당할 뻔 했기 때문에 권력을 추구했지만 그 추구하는 과정에 몸을 팔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미 멈추기엔 늦었다. 나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학교를 휘어잡았다.

학생들에게는 냉철하면서도 관대한, 학생들의 말을 잘 듣는 열린 학생회장이 되어 있었고, 교수들에게도 자신들의 목줄을 쥐도록 인정할 수 있을만큼 내가 융퉁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멈출 수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이미 아버지의 친딸인 송희를 지옥 속으로 몰아 넣었었다.

정작 본인은 별로 자각이 없는 모양이었지만 만약 송희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면 나는 금세 어딘가의 바닷가에 꼬르륵하고 가라앉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반쯤은 그런걸 기대하기도 했다. 지금의 내 삶은 너무 무미건조했다. 스스로의 행동에 회한이 들었고, 아무런 죄 없는 송희를 생각하면 약간 죄악감이 들기조차 했다.  그런 결말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를 불러서 입을 열었을 때, 나는 놀랐다.

"...유민아, 송희가 너에 대해 말하더구나."

그 말을 듣고 나는 모든게 끝났다고 직감했다. 그래,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찌보면 자업자득이었다. 스스로를 지키는 힘을 넘어서 권력에 미치기 직전에 끊어서 오히려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나는 반쯤 눈을 감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들려온 말은.

"송희는 학교를 경영하고 관리하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으니 너한테 양보하겠다고 하더구나. 후우, 송희가 내성적이고 이런걸 별로 안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네?"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방금 전 내가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되물었지만 눈앞의 아버지는 정말로 모르는 표정이었다. 적어도 연기에 있어서는 누구도 나를 속일 수 없었다.

"응? 왜 그러니?"

"아니, 송희가 저에 대해 다른 말은 안하던가요?"

"아아. 그러고보니 학교 생활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고 하더구나. 고맙다고 전해달라던데, 고맙다 유민아."

".......네."

"나도 네 능력이야 이미 알고있었으니 맡기는데 아무런 걱정이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네 의지를 존중해주고 싶구나. 혹시 이 자리를 물려받는것이 싫다면 지금이라도 말해주렴."

그런 상냥한 아버지의 말에 나는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그 이후로도 몇 마디 말을 더 했지만 별로 기억에 남지는 않았다. 내 기억에 남는 것은 오로지 송희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간단한 대화를 마치고 아버지의 방에서 나오자마자 송희의 방에 찾아갔다. 노크조차 하지 않고 벌컥 문을 열었는데 송희의 방은 책으로 가득차있었다. 당장 발에 채이는 책만해도 수백권, 거디가 책장에 꽂힌 책까지 합친다면 수천권은 될 것이었다.

그리고 책의 무덤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곳에서 송희는 담담히 책을 읽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왜?"

그렇게 말하는 송희의 눈에는 증오나 적대 같은 감정이 조금도 없었다. 정말로 순수한 의문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송희의 눈을 바라보자 묘한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아빠한테 뭐라고 말한거야?"

"...그냥, 언니가 나보다 더 잘할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다시 책에 얼굴을 파묻으려는 송희의 얼굴을 붙잡고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송희는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이전에는 차갑고 고독한 눈빛이었다. 책을 읽는 것은 고독함을 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생기가 돌고 어딘가 동정하는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송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질투난다.'

나는 이렇게 허무하고 허탈한데 송희는 오히려 굴레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있었다. 분명, 그 남자와 만났기 때문이겠지. 나는 그 남자가 싫었다.

쓸데없이 정의롭고, 내가 얻으려고 했던 권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적대하는 나한테 뜬금없이 살갑게 구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섹스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는 내가 이때까지 만났던 그 어떤 남자보다 섹스를 잘했다. 아니, 잘했다기 보다는 큰 쾌락을 선사해줬다. 형편없는 테크닉과 물건의 크기가 큰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남자와 할 때 나는 이전에 없을 정도로 느꼈다.

궁합이 잘 맞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와 이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와 나는 첫만남부터 잘못된 단추를 꿰었기에. 송희가 공주님이라면 나는 사악한 마왕의 역할이었기에, 그 남자가 송희대신 나를 택할 확률은 한없이 적었다.

그도 나와 간간히 만나서 섹스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에 가까운 관계였다. 섹스를 할 때는 격렬하고 정열적이었지만 끝난 순간 사랑이니 뭐니 하는 단어가 끼어들 곳은 없었다.

'...그러고보니 사랑이란 것도 한 번 못해봤네.'

생각해보면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거칠게 송희 방의 문을 닫고 자리를 나섰다. 그리고 내 방의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생각했다.

과거 전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할 뻔한 이후로 남자들과 섹스를 할 때 의도적으로 자신은 감정을 억제했다. 일부러 작위적인 목소리를 연습하고, 정말로 느낄때도 일부러 작위적인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섹스에서 자꾸만 주도권을 잡으려 들었다. 대부분이 늙은 교수들이었기에 내가 먼저 허리를 움직이거나 하면 좋아했기에 눈치채지 못하고 넘겨왔지만 그건 내 본능이었다. 남에게 강제로 당하고 싶지 않다는 본능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지난번 태훈이라는 남자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계속해서 가버렸을때는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묘한 안도감과 충족감이 들었었다.

그렇게 나는 침대에서 한참을 파묻혀있다가 결심했다.

최태훈. 그 남자에 대한 내 감정을 확인해보자고. 나도 송희처럼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이 굴레를 집어던지고 싶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내가 그를 사랑한다면...

"첫사랑일까."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던데, 그런 실없는 말을 떠올리면서 나는 피식 웃었다. 그 남자에게 있어서 내 첫인상은 최악일 것이다. 과연 내가 내 매력으로 그를 사로잡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렇게 잘생기지도, 화술이 뛰어난 것도 아닌 남자였다. 오히려 약간은 어수룩하고 소심한 남자였지만...

묘하게 상냥하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합격점을 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상냥함과 사랑이라는 감정이 자신을 향할 것이냐는 거였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고개를 저으려다 멈추고 고민했다. 어차피 학교를 물려받는 것은 확정됐다. 내게는 권력이 있었고, 더 이상 무언가를 두려워할 필요도, 쫓기듯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면 한 번쯤은, 딱 한 번 정도는 내가 하고싶은대로, 감정이 이끄는대로 해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고민하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적어도 지금 이 감정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깨닫기 전까지는 그 남자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리고, 나를 동정하는 눈길로 쳐다보는 송희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이전과는 달리 유치하고, 사적인 감정이 이끌리는대로 행동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슴 부분이 약간 따뜻해진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

(후원, 원고료 쿠폰은 연재 속도나 연참 확률을 대폭 상승시킵니다.)

1. 생각해보니 히로인들 중에서 가장 주인공에게 사랑을 하지 못할 것 같은 유민이었기에 이해를 돕기 위해 짜놨던 설정으로 유민 편을 써봤습니다.

2. 사실 유민은 가장 걱정이 많았던 히로인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처녀성'이 없는 히로인의 경우 욕을 먹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죠. '창부'라는 설정도 굉장히 고민했었습니다. 그래도 독자분들이 이렇게나 사랑해주시는걸보니 괜한 걱정이었나 싶습니다.

3. 부디, 유민이 진정한 사랑을 찾았기를 빌면서 다음화를 쓰러 가봅니다. 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