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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공략을 시작합니다.
나는 모처럼 오랜만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최근 서연에게 하도 휘둘리며 다녔기 때문에 학교에서 미친듯이 섹스하고, 집에가면 피곤해서 쓰러지는 것이 일상이었던 것과 달리 서연은 교수님의 사정으로 인해 빈 강의 시간을 이용해서 친구들과 3박 4일로 여행을 갔다.
물론 서연의 의지가 아니라 서연의 친구들에 의해서였다. 서연과 계손 다니다보니 학과 내에서 서연과 나는 사실상 연인 사이로 굳어진 수준이었고 서연의 친구들도 딱히 나를 싫어하지 않았기에 평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됐다.
물론 거기에는 몇 번 밥을 사거나 내 주변의 지훈같은 엄친아 녀석들을 몇 명 소개시켜 주는것도 한몫했다. 내 인맥이 넓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아는 몇 안되는 녀석들은 상당히 괜찮은 녀석들이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었다.
아무튼 녀석들과 꽤나 잘 돼서 행복해하는 서연의 친구들은 불쌍한 나를 잠시라도 구제해주기 위해서, 그리고 오랜만에 여자들끼리 여행을 가고 싶다는 이유를 겸해서 떠났다.
"으아아...이게 얼마만의 여유야."
나는 기지개를 켜면서 공원을 걸었다. 최근에는 너무 정신없이 돌아다녔으니 말이다. 지금 같은 때 좀 쉬어둬야한다. 수,목,금에 토요일 일요일이 있으니 적어도 5일간은 서연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럼. 뭘 한다."
그렇게 학교를 적당히 돌아다니던 나는 건물들 중 동아리관을 발견했다.
'그러고보니 작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작년에는 동아리나 학교 행사같은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필수적인 것에만 참여 했기 때문에 몰랐지만 우리 학교는 꽤나 동아리에 대해 지원이 풍족한 편이라 들었다.
다소 이상한 동아리라고 해도 인정해주고 취지만 맞다면 예산도 배분해준다고 지훈이 말했던 것 같다.
적당히 건물을 한 번 둘러보기로 한 나는 동아리관에 있는 동아리실들의 입구에 적혀 있는 공지를 읽으며서 피식 웃었다.
[절찬리에 신입생 모집중! 만화부!]
[사이클링부 신입생 모집중입니다!]
[스펙에 도움이 되는 스터디가 하고 싶다면 오라!]
이런 문구들에 다소 정신 사나울 정도로 화려한 그림을 넣어 어떻게든 새로운 부원을 모집하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몇몇 동아리들은 나도 흥미가 동했지만 그런 동아리의 경우 더 이상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는다는 공지가 붙어 있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2층으로 올라간 나는 다른 동아리들을 둘러보던 도중 제일 끝에 있는 동아리 방에 붙어 있는 공지를 보고 움찔했다.
[도서부]
이게 끝이었다. 신입생들에게 입부를 권고하는 메모나 더 이상 신입생을 받지 않는다는 메모도 없이 그저 덜렁 동아리 이름만이 적혀 있는 부실에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도서부라고 하면 어떤 활동이지? 고등학생 때의 도서부는 사서 선생님과 함께 책을 정리하고 봉사시간을 받거나 적당히 읽고 싶은 책을 읽는 곳이었는데.
'대학생이 부실에서할만한 행동은 아닐 것 같다만.'
단순히 책을 읽을 뿐이라면 학교 도서관을 이용해도 될 테니 말이다. 어지간한 책이라면 거의 다 학교 도서관에 있을 정도로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만큼 일개 동아리에서 책을 읽는 것보다는 훨씬 좋으리라.
"어?"
자세히보니 문의 손잡이 부분이 제대로 닫혀 있지 않고 풀려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간 뒤 문을 천천히 열었고, 나는 문 너머의 광경을 본 순간 작은 탄식을 터뜨렸다.
그곳에는 목까지 머리가 오는 짧은 단발을 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책들의 무덤'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많은 책들을 밑에 깔아둔 채 책들의 위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흡사 숭고함과도 가까운 그 분위기에 나는 말을 잇지 못했고,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그녀가 날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내 상황을 정리했다.
무단침입+엿보기. 음, 할 말이 없네.
"........"
그런데 그녀는 경찰에 신고를 하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책들의 무덤 사이에 끼워져 있는 종이를 한 장 뽑더니 천천히 다가와서는 종이를 내게 내밀었다.
종이를 받아들고 확인해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입부 신청서'
그 밑에 신상정보 기입란이 적혀 있었지만 나는 멍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도서부에 입부하려고 온 거라고 착각한건가? 하긴, 생각해보면 남의 동아리 문을 열고 들어올 일은 입부할 때 빼곤 없나.
내가 그렇게 머릿속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하는데 침묵하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입부, 아니야?"
차갑고도 정제된 목소리에 정신을 되찾은 나는 그녀의 얼굴을 슬쩍 바라봤다. 그리고 느낀 감상평은 간단했다.
'인형같다.'
서연이 새하얀 우윳빛 살결이라면 이 여자는 창백한 쪽이었다. 육감적인 서연의 몸과 다르게 툭 치면 부러질 것처럼 가는 몸이었다.
"맞아요."
이 상황에서 아니라고 했다간 정말로 경찰을 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잽싸게 그녀의 손에 들린 신청서를 받아 볼펜으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 작성하고 그녀에게 넘겨주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도서부에 온 걸 환영해. 읽고 싶은 책이나 만화는 마음대로 읽어도 돼. 대신 책을 빌려갈 때는 이름이랑 빌린 책을 기록해놓고."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는 다시 책들의 무덤 위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실로 쿨하다고 생각하면서 문득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이 어떤 것일지 궁금해 슬쩍 본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어?'
어릴 때는 판타지 소설이나 무협, 라이트노벨 같은 가벼운 책들을 읽곤 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는 거의 그럴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들고 있는 책은 내가 중학생 때 읽었던 판타지 소설 중 한 권 이었다.
'저거 수위가 꽤 셌던것 같은데.'
참고로 히로인이 나중에 주인공을 배신하게 되는데 남자 주인공이 오열하면서 여자 히로인을 죽이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히로인을 얻는다. 실로 정신나간 스토리였지만 당시에는 야한 부분이 꽤 많은 몇 안 되는 판타지 소설이었기에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그 때는 그런 사소한 거에도 발정날 나이였으니 말이야.'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상당히 쑥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어째서 그런걸 읽고 있는 것일까? 풍기는 분위기로 봐서는 고전 문학이나 시같은 걸 읽을 줄 알았는데.
나는 조심스레 구석에 앉아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책들의 제목을 확인했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모르는 책이 거의 없다!'
옛날부터 유명한 만화나 판타지 소설이 있었고 인터넷에서 자주 거론되는 제목의 소설들도 많았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 대부분이 전부 어느 수준 이상의 수위가 있는 관능소설이라는 것이다.
"헤에..."
적당히 책을 뒤적이면서 오랫동안 보지 못한 만화를 읽어보려고 쌓는데 사람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코앞에 와 있었다.
"우왓!"
쭈그려 앉은 채 책을 챙겼기에 놀란 나는 뒤러 자빠졌지만 그녀는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는지 내게 다가와서는 말했다.
"이 책들, 알아?"
"....뭐, 그렇지. 그런데 그렇게 갑자기 앞에 나타나진 말아줄래? 적어도 인기척이라도 내줬으면 좋겠는데."
순간 귀신인 줄 알았다고. 아니, 정말로.
"이건 타고난 거라서 어쩔 수가 없어... 존재감이 흐릿하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하긴, 확실히 그리 눈에 띄는 타입의 여자는 아니었다. 그렇게 활발하지도 않고, 자신을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가 싫지 않았다. 정제되고 가라앉은 분위기가 그녀의 개성일 순 있어도 잘못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이름."
그녀는 그제서야 기억났는지 날 가리키며 말했다.
"최태훈이야. 방금 전 신청서에 적었을텐데."
"확인 안 했거든."
"아, 그래."
확인 안 했다고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는데 뭐라고 말하겠는가. 왠지 내가 잘못한 기분인데.
"내 이름은...하송희."
나긋나긋한 그녀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하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보다... 저 책들, 다 읽어본거야?"
"다는 아니어도 대충은 아는 것 같은데. 한동안 안 봐서 최근 줄거리는 모르겠는데."
"그럼, 이 작품에서 좋아하는 히로인은 누구야?"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꺼내든 책은 내가 중학생 때 인터넷에서 봤었던 소설이었다. 그러고보니 정식 출간된다고 했었지.
"내가 아는 내용대로라면 거기선..."
그렇게 말하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와 나는 꽤나 핀트가 잘 맞는 조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름대로 즐겁게. 서로의 취향에 대한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어릴때 꽤나 책을 많이 읽고 리뷰도 몇 번 적어본 적 있었기에 대화하는데 그리 큰 문제가 없었다. 다른 문제라고 한다면 내 눈 앞의 그녀에 관한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하아.......'
겉으로는 송희와 즐겁게 이야기하면서도 속으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창을 확인했다.
============================ 작품 후기 ============================
자아, 과연 한 편 더 갈 수 있을 것인가...(선작 270 달성시 오늘 한 편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