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비틀린 시간 속의 무협 소설(25)
“너무 걱정하지 마. 넌 꼭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나랑 약속했잖아, 천하제일보지가 되기로. 내가 그 꿈을 꼭 이뤄줄게.”
약간의(?) 날조를 가미한 약속이었지만 다행히도 천소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잘 봐둬, 이게 네가 그렇게 찾으려고 해봐도 못 찾은...”
나는 조잡해 보이는 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남궁세가의 신물 창천검(蒼天劍)이다! 헤헤, 역시 남궁서희를 다른 곳으로 보내둔 건 신의 한 수였어! 하마터면 훔친 걸 걸릴 뻔-”
나를 매섭게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애써 그쪽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재빨리 술법을 완성했다.
“나현수, 이 개새끼야! 내가 아무리 너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온 가보-”
남궁서희의 절규는 어마어마한 마기의 폭풍에 의해 가려졌다.
“휴, 다행이네. 빨리 와라, 마신.”
폭풍이 점점 사그라들면서 천소하의 눈이 점점 시꺼먼 빛으로 물들었다.
“안녕, 마신?”
천소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시리엘! 오늘은 뭐하고 놀 거야!”
나, 마신 카리스는 시리엘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항상 그녀의 옆에 껌딱지처럼 들러붙어서 하루 종일 같이 지내는 것이 유일한 삶의 낙이었다.
‘시리엘한테 부담을 줘서는 안 돼. 나는 여자니까... 레즈비언은 조금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 조금씩 나한테 물들이는 거야, 나 없이는 못 사는 몸으로...’
나는 음흉한 눈길로 시리엘을 쳐다보았다. 시리엘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자 내 보지가 큥큥거리며 애액을 찔끔 뿜어냈다.
“으응... 미안. 오늘은 내가 진짜 급한 일이 있어서...”
시리엘의 표정이 어두웠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한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누가 너 괴롭히기라도 해? 내가 아주 그냥 혼쭐을-”
내가 화난 표정을 짓자 시리엘이 안타까운 미소를 지으며 풋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내가 요즘 고민할 게 조금 있어서... 이만 가 볼게.”
나는 그날 시리엘을 그냥 보내서는안 됐다. 이 순간을 평생 후회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어리석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
“나현수. 너는 모르겠지, 시리엘이 얼마나 힘들어 하고 있는지.”
시리엘? 갑자기 웬 시리엘? 나는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헤이, 시리. 상황 설명 좀연.’
평소 같았으면 칼같이 대답해 줬을 시리엘이 어째선지 내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나는 어딘가 마음이 초조해졌다.
“너 설마 시리엘을 어떻게 한 거야? 걔가 아무리 인성이 밥맛이라 허구한 날 나보고 나이스 보트 이 지랄을 해대긴 했어도 너한테 죽을 만큼 잘못한 건 없다고!”
내 분노어린 외침에 마신은 코웃음을 치며 가소롭다는 듯이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시리엘을 내가 죽여?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시리엘은 네가 죽였어.”
뇌에 과부하가 걸릴 것만 같았다. 아까부터 이 마신이라는 작자와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는 기분이었다.
‘뭔 개소리를 지껄이는지 모르겠네. 원래 계획대로 마신을 따먹어 버린다. 어차피 천소하의 몸에 빙의해 있으니까, 지금 마신은 존나 쉽게 느끼는 암캐 같은 상태겠지.’
마음을 먹은 나는 곧장 천소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다음에 보지. 그때는 기필코 너를 죽일 것이다.”
내가 천소하의 몸에 손도 대보기 전에 짧은 한 마디를 남긴 마신은 그대로 강림을 강제로 해제해버렸다.
“카리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의식이 돌아온 천소하가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사이 불길한 웅웅거리는 환청만이 한동안 비동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현수? 이 새끼야!”
창천검의 원수를 갚겠다며 남궁서희가 날뛰기 전까지는...
*
“야, 두 팔 똑바로 들라고!”
남궁서희의 무공 경지는 이미 인간을 초월한 지 오래, 나는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끊임없이 그녀의 진심 펀치를 견뎌내야 했다.
“허리 똑바로 피고!”
나는 남궁세가에 있는 내 침실로 돌아오자마자 그 화풀이를 주서현한테 하고 있었다. 어차피 도망치려다 걸린 그녀한테 벌을 준다는 명분도 있었기에.
“가슴 똑바로 내밀어!”
크흠, 마지막 한 마디는 순전히 내 욕망에서 비롯된 말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주서현을 온갖 방법으로 괴롭히며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그래, 이제야 좀 반성의 기미가 보이네. 잘못했어, 안 했어?”
내 질문에 주서현은 순한 양처럼 눈을 말똥말똥 뜨면서 대답했다.
“잘못했어! 아니, 잘못했어요! 이제 그만 좀 괴롭혀 주세요!”
쓰읍, 괴롭힘이라... 나는 지금 정당한 벌을 주고 있을 뿐, 괴롭힌다는 생각 따윈 해본 적도 없었다!
“이게 다 누구 잘 되라고 하는 말들인데! 뭐? 괴롭힘? 안 되겠다. 얘가 아직 덜 혼났네. 대가리 박아!”
그렇게 주서현을 이리저리 갖고 노는 것도 슬슬 질려갈 무렵 내 귀에 재밌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성지훈인가 뭔가 하는 애가 대문 앞에서 난리치고 있는데, 어떡할까?”
성예설의 질문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뒤에서 벌을 받던 주서현이 성지훈이라는 이름을 듣더니 안색이 창백해졌다.
“내가 공략 치트 스킬을 써서 알아낸 매우 흥미로운 정보가 있단 말이야. 크크큭, 생각만 해도 웃겨 죽겠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촐싹거리며 성지훈이 있는 곳으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빨리빨리 좀 기어와!”
주서현의 목에 여왕님의 밧줄(S)을 묶은 채로 암캐 한 마리를 산책시킬 겸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성예설은 그런 주서현의 엉덩이를 툭툭 치며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아, 너무 재밌어. 역시 한국 드라마 중 재밌는 건 죄다 막장 드라마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
성예설은 사실 성지훈의 친남매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근데 그게 끝이 아니란 말이지.’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친남매를 즐겁게 쳐다보았다.
*
중원에서 사내 중의 사내라 하면 항상 으뜸으로 뽑히는 이가 있었다.
하오문주 성소현.
그의 자지를 한 번 맛본 여자는 절대 그에게서 헤어 나올 수 없다고 하여 그 별호가 ‘마약공자’라고 불릴 정도의 절륜함을 자랑하던 그는 갑작스러운 결혼 소식으로 무림인들을 놀래켰다.
그 상대는 바로 천하제일기녀라고 불리던 신유란.
사람들은 그 둘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고 그들의 음란한 신혼생활은 순탄하게 이어졌다.
한 여인이 그들의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네게는 너무 과분한 자지, 아니 과분한 남자다.”
전대 검마 주설현은 그렇게 한밤중에 성소현을 납치했다. 아직 갓난아기인 그의 아들과 함께.
주설현이 떠난 후 신유란은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갔다.
천하제일기녀 신유란은 뱃속의 딸을 어루달래며 남편을 잃은 슬픔으로 시름을 앓다가 결국 딸 하나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
‘성소현과 신유란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성예설과 성지훈, 그리고 성소현과 주설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바로 주서현이란 말이지.’
공략 치트 스킬에 의해 강제 스포일러를 당한 것이 분할 정도로 지금의 상황은흥미진진했다.
‘팝콘이라도 하나 튀겨올 걸.’
바닥에 개처럼 기어 다니는 주서현, 그런 그녀의 엉덩이를 가지고 놀고 있는 성예설, 남궁세가의 호위무사들한테 붙잡혀 아등바등 몸부림을 치고 있는 성지훈.
‘기적적인 가족 간의 재회도 좋지만 웬 사내새끼를 위해서 그렇게마음써줄 필요는 없지.’
나는 주서현을 성지훈 따위의 한심한 남자한테 넘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검마 주서현을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육변기로 만들 예정이었기에 나는 절대 그녀를 양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성지훈이 가족인 것도 모를 텐데 그냥 죽여 버릴까? 나만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면 뭐 편하긴 하겠네...’
하지만 결정적으로 재미가 없었다. 성지훈을 죽이고 나서 가족이었단 사실을 주서현과 성예설한테 말해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랬다가는 내 소중한 육변기가 망가질 수도 있었다.
‘제일 좋은 방법은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후... 뒤에서 몰래 슥삭- 해치워 버리는 거지. 조금 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려면 약간의 연기가 필요하겠지만...’
매우 좋은 방법이었다. 거기다가 성지훈을 죽인 것이 마신의 수하라고 몰아간다면? 마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주서현은 기꺼이 내 육변기가 될 수도 있었다.
‘좋았어.’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성지훈한테 다가갔다.
*
‘제길! 누님을 가축처럼 다루고 있다니!’
나는 분개했다. 하지만 나는 남궁세가의 버러지들한테 구속당해 누님이 개같은 자세로 멍멍 짖으며 엉덩이를 희롱당하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게 힘이 있었다면... 더 강했더라면!’
두 주먹을 불끈 쥐어봤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나는 허탈한 표정으로 다리를 들고 오줌 싸는 시늉을 하는 불쌍한 누님을 바라봤다.
“잠깐. 실례했네.이 자는 내 손님이야. 아무래도 오해가 있어서 소란을 피운 것 같으니 풀어줘.”
내 말에 수치스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던 주서현이 감동받은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반면 성지훈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나를 노려봤다. 나는 그의 매서운 눈빛에 그저 어깨를 으쓱해주고는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그를 풀어주자 곧장 내 침실로 데려갔다.
성예설이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기어가는 주서현의 등 위에 올라타 엉덩이를 오른손으로 툭툭 치면서 내 뒤를 따랐다.
이윽고 침실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그들을 향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한 가족이야. 피가 섞인 가족.”
세 명은 나를 미친 놈 보듯 쳐다봤다.이해는 했다, 그들에게 꽤나 믿기 힘든 사실이었을 것이었다.
“전대 하오문주 성소현. 그가 너희 셋의 아버지지.”
세 명이 두리번거리며 서로의 표정을 살폈다.
“주서현, 너는 전대 검마 주설현의 친딸이고 성예설과 성지훈은 천하제일기녀라 불리던 신유란의 친자식들이다.”
그들의 경악어린 표정을 보며 나는 속으로 낄낄 웃어댔다.
‘역시 막장 드라마가 최고라니까.’
이복남매라는 말에성예설은 화들짝 놀라 주서현의 등에서 내려 그녀를 일으켜 세워줬으며, 주서현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성지훈만을 응시했고, 성지훈은 언짢은 표정으로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네 말대로라면 나는 성예설과 함께 자랐어야 할 터.어째서 내게는 천마신교에서의 기억들밖에 없는 거지?”
오, 내가 원하던 질문을 바로 해주다니. 이 새끼 꽤나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기특하긴 했다.
‘성지훈과 주서현을 이간질할 좋은 기회가 제 발로 굴러들어오는구나.’
나는 씨익하고 입꼬리를 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