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비틀린 시간 속의 무협 소설(1)
남궁서희. 그녀는 내가 이번에 NTL 해야 되는 타깃이었다.
“하하, 이름만큼이나 정말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혹시 연모하고 있는 이가 있으십니까?”
남궁서희는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사랑하는 이가 이미 죽기라도 한 듯한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제가 괜한 말을 꺼내서...정말로 죄송합-”
남궁서희가 자신의 검지를 내 입술 위에 얹으며 쉿하는 소리와 함께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다 괜찮아. 이제는 다시 볼 수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해.”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은 그녀는 어째선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는 나를 뒤로 하고 사뿐사뿐 방을 나갔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비틀린 시간 속의 무협지 세상 속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갔다.
*
점심 시간, 남궁서희가 식사를 마련해 주었기에 우리는 빙 둘러앉아 음식들을 감상했다.
“그... 어제는 미안했다. 내가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
엘레노어는 땀을 뻘뻘 흘리며 남궁서희한테 어제의 일에대해 사과하려고 했다.
“괜찮아요, 언니. 제가 힘들 때면 언제고 언니가 와서 위로해 주고는 했었죠. 뭐 위로가 아니라 그저 내가 힘들어 하는 꼴이 꼴보기 싫어서라나 뭐라나 하면서 츤데레처럼 말이죠.”
또다, 나와 육변기들은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무언가에 관한 이야기. 남궁서희도 신시아처럼 미래에서 돌아온 회귀자인 걸까?
“이제 상황에 대해서 조금 자세히 파악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설명해주지 않겠어?”
남궁서희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저를 내려놓은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길고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
“나는 마신과 결판을 내러 간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결국 싸우는 건 나 혼자야. 그러니까 따라와서 개죽음 당하지 말고 다들 각자 세계로 돌아가.”
일부러 차갑게 밀어내는 나현수의 목소리, 우리 육변기들 중 그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현수님, 저는 이미 백성들 앞에서 현수님한테 범해진 한심한 여왕입니다. 지금 원래 세계로 돌아가봤자 행복한 삶을 살기는 글렀습니다. 현수님이 저를 평생 책임져 주시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아이리스 언니가 그리 말하며 나현수 옆에 당당히 섰다. 목숨까지 바쳐가며 한 남자를 사랑하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멋졌다.
“나현수, 네 혼자 멋있는 척 하지 마. 비겁하게 여자나 범하고 다니는 주제에 지금 와서 가오를 잡고 난리야.”
레이첼 언니가 나현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피식 웃었다. 떨리는 그녀의 두 눈동자는 분명히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하나 둘씩 여자들이 일어서 나현수의 곁으로 다가갔다. 결국 마지막까지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나뿐이었다.
‘그래, 나도-’
나현수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일어서려는 나를 막아섰다.
“남궁서희, 너는 안 된다.”
내 심장이 철렁했다. 대체 왜 나만...?
“장인어른께 부탁을 받았거든. 어떻게든 너만은 살려서 무사히 보내달라고. 나는 그 약속을 어길 수 없다.”
나는 울고 싶어졌다. 아빠는 왜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서는...!
“내가 나중에 장인어른을 뵈러 갈 때 괜히 너를 위험하게 했다는 얘기로 잔소리를 들을 것이 뻔하니까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나현수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결국 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펑펑 터뜨려버렸다. 나현수 뿐만 아니라 그의육변기들이 내게 다가와심심찮은 위로를 건네주었다.
“꼭 기다리고 있어. 자위도 하지 말고. 돌아오면 내가 존나게 박아줄 테니까. 아예 정조대라도 채워 줄까?”
나는 기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는 수십 년간 돌아올 거라는 나현수의 약속을 믿고 정조대를 꽁꽁 싸맨 채로 오매불망 그를 기다렸다.
*
“이제 와서 강해지면 뭐하냐고...”
수십 년간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오로지 무공에만 매진했다. 남궁세가의 수치라고 불리던 나의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천하제일인, 그것이 현재 나를 세간에서 부르는 수식어였다.
“그러면 뭐해... 나는 비겁한 도망자일 뿐이야... 아무리 아빠 때문이라고, 나를 두고 간 나현수 때문이라고, 열심히 핑계를 대봤자 하찮은 변명일 뿐이지.”
나는 그 자리에서 다른 육변기들과 달리 죽음을 각오하지 못했음을 자책했다. 그때 자리에서 일어나 나현수의 곁에 서려는 것도 사실은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분명 다른 차원에서는 마신과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겠지. 수많은 희생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나는 나현수와 육변기들이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을 때 홀로 편안한 삶을 즐기고 있는 쓰레기였다.
“그냥... 죽어버릴까?”
내 눈에 검 한 자루가 들어왔다. 내 목을 벨 검으로 저 천마신검(天魔神劍)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천마신검을 내 목에 들이댔다. 그저 단순한 칼질, 내가 수없이 연마해 온 칼질 한 번이면 내게는 안식이 찾아올 터였다.
“안 돼... 나는 기다려여야만 해...”
눈물을 흘리며 나는 검을 거두었다. 그것이 나현수와의 약속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었으며 내가 비겁하게 도망친 것에 대한 속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
“죽음은 내겐 사치야.”
자조적인 미소를 지은 나는 검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지난 수십 년간 매일같이 해온 것과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궤적을 그리며 검이 우웅우웅 울어댔다.
*
“그러던 찰나에 설아 언니를 필두로 한 너희들이 내 앞에 나타난 거지.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아마 마신과의 싸움에서 진 나현수가 모종의 방법으로 회귀를 하지 않았을까 싶네.”
나는 표정이 굳었다. 내 어깨 위에 갑자기 무거운 짐이 얹어진 기분이었다. 어째서 신시아는 내게 이런 중대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알았다면 조금 더 경각심을 갖고 행동하지 않았을까?
‘어쨋든 신시아의 말에 따르면 순애충들이 그 마신이라는 새끼의 수하란 말이지... 일단 순애충들을 죽이다 보면 그 대가리가 튀어 나오겠지.’
생각을 마친 나는 이내 궁금했던 점을 남궁서희한테 물어봤다.
“뭐,일단 너랑 나랑 잘 알고 지낸 사이인 듯 하니까 편하게 반말로 할게. 일단 상황은 대충 알겠는데 처음부터 설명해줄 수는 없어? 예를 들어 너와 나의 첫 만남이라던지아니면 너를 어떻게 내가 육변기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그런 얘기들.”
남궁서희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도리도리흔들었다.
“그때의 나현수와 지금의 나현수는 명백히 다른 인물이야. 솔직히 나는 나현수가 회귀를 한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도조금 의문이 가. 어쩌면 평행세계 뭐 그런 걸 수도.”
나는 그녀의 추론을 곱씹으며 계속해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하여튼 그때의 너와 지금의 너는 명백히 다른 사람이란 말이지. 나는 네게 이전의 나현수와 경험했던 추억을 강요하고 싶지 않아.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 두고 나는 앞으로 나아갈 거야.”
나는 남궁서희의 말에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너를 향한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아니 변하지 못해. 평생 너만을 기다려 왔으니까. 단지 그 감정이 사랑보다는 의무에 가깝다는 점이 문제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남궁서희가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게 부탁했다.
“앞으로 나랑 새로운 추억들을 만들어 나가줘. 내가 다시 한 번 너를 사랑할 수 있도록. 이번에는 절대로 도망치지 않도록.”
그녀는 결연한 눈빛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두 눈 가득 차있는 의지를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양 손을 붙잡아 주었다.
“네가 꼭 나를 사랑하게 만들어 줄게. 그러니까 일단...”
나는 껄떡이는 내 자지를 남궁서희를 향해 내밀며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섹스부터 할까?”
남궁서희의 번개보다 빠른 주먹과 함께 나는 머리가 띵해졌다.
“바보. 여전하네, 나현수. 다행이야... 다행이야, 정말로...”
흐려져 가는 내 시야 속으로 눈물을 흘리는 남궁서희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온갖 생각들을 하던 나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
“낯선 천장이다.”
원래 의식을 잃어다가 깨어나면 낯선 천장이 국룰이지. 대충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는 한 중년 남성을 발견했다.
“낯선 아저씨다.”
그 정체불명의 아저씨는 내게 다가와 딱밤을 날렸다.
“예끼, 이 놈아. 기억이 온전치 않다더니 정말이구나. 너 때문에 우리 서희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알고 있느냐?”
나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이 남자는 모든 남편들의 천적이라 불리는 전설의 장인어른!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서희를 챙겼어야 하는데 보시다시피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장인어른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쯧하고 혀를 차더니 나를 향해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전했다.
“역시 문제가 많아 보이는구나. 내 평생 네게 존댓말을 들을 날이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거늘. 이런 부족한 네게 내 딸은 너무나도 과분하다. 헤어지거라.”
압도적인 무력과 미모의 남궁서희를 포기하라고? 나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아버님! 아니 반말을 썼다고 했으니까... 아저씨! 거 참 요즘 세상에 젊은 남녀가 마음이 맞아서 정분이 나고 뭐 그런 거지, 어른이 어딜 끼어들어! 라떼는 말이야-”
장인어른의 남궁제왕딱밤이라는 어마무시한 기술과 함께 나는 다시금 정신을 잃었다.
*
“낯선... 아니 이제는 익숙한 천장이다.”
기절해 있을 뿐이었는데 어째선지 하루가 흘러가 있었다. 남궁제왕딱밤의 소름 끼치는 위력을 다시금 떠올린 나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낭군~ 일어났어?”
그래, 이거지. 자랑스러운 남궁서희! 역시 무협 세상에는 조강지처가 있어야 제맛-
“...? 뭐 하냐, 엘레노어?”
나는 못 볼 꼴을 본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내 반응에 엘레노어는 볼을 뾰루퉁하게 부풀리며 가시적인 연기를 집어치웠다.
“흥! 내가 어제 서희의 방 안에 있는 책을 하나 읽었는데 거기서는 분명히 구미호가 이렇게 하면 낭군이 어흥하고 잡아먹던데 말이야. 아주 짐승같이...”
남궁서희, 대체 엘레노어한테 어떤 책을 읽인 것이란 말이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한테 물어봤다.
“다른 육변기들은 뭐하고 있어?”
엘레노어는 내 말에 퉁명스레 대답했다.
“어제부터 서희한테 다양한 얘기들을 듣느라 아주 정신이 팔려있다. 여자들만의 얘기니까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나는 그녀의 반응이 수상했다. 마치 내게 뭔가를 숨기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너네... 설마 지금 모여서 내 뒷담 까고 있어?”
엘레노어가 황급히 방에서 나갔다. 나는 이를 갈며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