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아스트리아(10)
『‘조금은 치명적인 카사노바’ 나현수 (A)』
□ 레벨 34
□ 능력 [NTL]
□ 힘 [150]체력 [150] 민첩 [150] 지능 [150] 정신력 [150] 정력 [836]
□ !‘엘레노어’의 능력 [마나의 군주]와 [드래곤 블러드]의 효과가 반감됩니다.
‘드래곤은 능력부터가 사기구나. 효과가 반감되었는데도 스탯 짱짱해진 것 좀 봐. 후덜덜 하네...’
레벨 34에 A급 헌터라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얼떨결에 달성한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정력에 스탯이 몰빵되어 있는 게 찜찜하긴 하지만... 뭐, 앞으로 생길 수많은 육변기들까지 감당하려면 어쩔 수 없지.’
레이첼과 아이리스가 옆에서 소세지를 싹둑싹둑 자르며 장난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자 살짝 식은땀이 나기는 했지만 나는 애써 불안감을 지워냈다.
“다들 준비 됐지? 엘레노어, 마법진을 구동해줘.”
나와 육변기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허공에 생성되는 찬란한 금색의 게이트를 쳐다보았다.
‘언젠간 다시 오마. 프레이야, 너를 따먹기 위해서라도.’
그대로 우리는 빛무리 속에 몸을 던졌다. 이내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속이 울렁거리더니 여태 본 적 없는 새로운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무협?’
분위기만놓고 보면 완벽한 무협 소설 속 세상 같아 보였다.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검을 하나씩 차고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에 나는 가슴이 웅장해졌다.
[!에러. 현재 시간대에서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세상입니다. 시간의 비틀림이 감지되었습니다.]
뭔지 몰라도 에러라는 시리엘의 말에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별로 달갑지 않아졌다.
‘언제나 내가 생각지 못하는 변수는 마음에 들지않지.’
[!세계가 질서의 유지를 위해 창조주인 당신한테 임무를 부여합니다.]
‘에? 와타시가... 창조주?’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나는 얼떨결에 임무를 받게 되었다. 그 임무란 것은 내가 흔히 보던 타깃창이었다.
『타깃: 남궁서희
!(남궁서희)를 NTL에 최적화하기 위해 시도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실패했습니다.
!(남궁서희)가 사랑하는 대상 (???)를 NTR에 최적화하려고 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실패했습니다.
보상: ???
Tip: 불가능한 임무입니다. 어서 도망치세요.』
아주 불길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타깃창의 글귀들에 나는 살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순애충 이 새끼들은 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니는거야?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나는 일단 이 골치 아픈 일들을 잊어버리고 재빨리 유설아나 구해서 도망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엘레노어, 유설아한테 텔레파시 보내서 위치라도 좀 알아내봐.”
엘레노어는 내 말을 순순히 따랐다. 두 눈을 찔끔 감은 그녀가 텔레파시를 보내기 위해 정신을집중했다.
“결계 비스무리 한 힘이 더 세져서 아무래도 직접적인 대화는 불가능한 것 같아. 그래도 위치는 어느 정도 감이 오니 일단 그 근처까지는 직접 가봐야 할 것 같네.”
나와 육변기들은 엘레노어의 뒤를 얌전히 따랐다. 우리를 주시하는 몇몇 인물들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채로...
*
“방주님, 대낮에 기이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요. 글쎄, 아무 것도 없는 푸른 하늘에서 사람들이 뚝하고 떨어졌다니까요?”
방주는 별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대충 그 소식을전해준 거지한테 동전을 한 냥 던져주며 비아냥거리듯 물어봤다.
“뭐, 개방도 모르는 화경의 고수들이 갑자기 나타나 허공답보(虛空踏步)의 묘리를 이용해 그 시골구석까지 소흥주(紹興酒) 한 잔 하러 놀러갔다는 소리냐?”
거지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젓고는 해맑은 미소로 대답했다.
“소흥주는 아니고 여아홍(女兒紅)을 마시던데요?”
방주는 그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대충 이마를 짚으며 손을 휙휙 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에휴, 뭔 말도 안 되는 소문을 저렇게 해맑은 얼굴로 전한다냐.”
혀를 쯧쯧 찬 방주는 뒷주머니에서 은근슬쩍 아침부터 보던 춘화집을꺼내 헤벌레한 얼굴로 읽었다.
*
“문주님, 화음현에 있는 한 기루에서 특급 전보가 날라 왔습니다.”
문주라고 불린 여인, 하오문주 성예설은 그 말을 듣고는 표정을 굳혔다.
“이리줘 보거라.”
서신을 탁자에 펼친 그녀는 한 글자 한 글자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이 무슨... 이것이 정녕 사실이라면 이들은 강호의 세력 구도를 바꿀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실력자들임이 분명하다. 우리의 정보망에 여태 단 한 번도 이런 이들이 드러난 적이 없었거늘...”
분명 황당무계한 내용이었으나 성예설의 감, 그녀를 하오문주의 자리까지 올려주었던 그녀의 본능은 이 서신에 무언가 큰 비밀이 있음을 직감했다.
“화음현으로 간다. 내가 직접. 무림맹 근처라는 점이 조금 꺼림칙하긴 하다만 어쩔 수 없지.”
아마 나현수가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면 두 팔 벌려 환영했을 것이다. 성예설은 천하삼미(天下三美)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는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니.
*
“누가 내 얘기를 하나. 귀가 왜 이렇게 간지러워.”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나는 계속해서 엘레노어의 뒤를 따라갔다.
“언제쯤 도착해? 설마 저 으리으리한 성채 같은 곳 안에 있는 건 아니지?”
안타깝게도 엘레노어의 눈빛은 내 말이 정답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저 넓은 데서 어떻게 찾아... 그냥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소리나 질러볼까?”
당연히 농담이었다, 그랬다가는 유설아의 목숨이 위헙해지거나 순애충들이 그녀를 다른 데로 옮길 수도 있었다.
“그거 좋은 생각이내. 내가 금방 끝내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엘레노어는 폴리모프 마법을 해제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무협과 드래곤의 기묘한 콜라보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하... 인생...”
체념한 나는 그저 저 멀리 날아가는 파란색 바보 드래곤을 쳐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
“설아야~ 어디 있니~”
나는 무림맹이라는 한자가 쓰여진 거대한 성채 위를 마음껏 누비며 유설아를 찾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밑에서하찮은 인간들이 나를 올려다 보는 것이 느껴졌다. 날지도 못하는 한심한 인간들 따위 내 브레스 한 방이면...
그때였다. 강렬한 기운의 덩어리가 내게 쏘아졌다.
“제왕검형(帝王劍形), 제1초. 제왕현신(帝王現身).”
나는 가까스로 앱솔루트 배리어(Absolute Barrier) 마법을 전개해 내게 날아오는 무수히 많은 검강들을 막아냈다.
‘소드마스터!’
지상을 내려다보자 내게 오러 블레이드(Aura Blade)를 쏘아낸 중년의 남성이 보였다. 그는 갓소드마스터가 된 풋내기가 아니라 꽤나 완숙한 경지에 이른 강자였다.
‘흥, 방심해서 그런 거야. 소드마스터 따위 열 명을 데려와도 나를 못 잡는다고.’
나는 내 입 안에 주변의 모든 마나를 응집시키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나가 모여 하나의 불덩이가 된 순간 나는 드래곤 브레스(Dragon Breath)를 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엘레노어 언니! 멈춰!”
난생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의 여인이 내 이름을 울부짖으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설아 언니도 그렇고, 다들 왜 이렇게 이상해진 거야?”
그녀의 입에서 기어코 유설아의 이름까지 나왔다. 나는 맹세코 살면서 저런 여인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여인은 나를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것일까?
‘일단 제압하고 천천히 심문을 해서 알아내면 될 터. 일단 빠르게 제압한다.’
나는 입 안에 모아놨던 드래곤 브레스를 그녀를 향해 발사했다.
캉-
그저 위로 올려 베는 단순한 일검이었다. 내 브레스는 그 형체를 잃어버리고 공기 중으로 허무하게흩어져 버렸다.
“문답무용, 뭐 그런 거야? 알았어, 언니. 원하는 대로 해줄게.”
잠깐이라는 말을 외칠 틈도 없이 뒷통수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감각과 함께 나는 의식을 잃었다.
*
“나... 나현수? 네가 어떻게... 네가...”
나는 모든 상황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단 일검에 제압된 엘레노어를 보며 나는 순간 타깃창이 내게 해주었던 경고를 떠올렸다.
“보고 싶었어... 정말로 보고 싶었어...”
어마무시한 무력을 지닌 여인이 내게 안겨들었다. 나는 혹시라도 그녀의 기분을 거스르면 목이 날아갈까 무서워 얌전히 얼어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너도 어딘가 이상하네... 설아 언니도, 엘레노어 언니도, 너도, 그리고 옆에 있는 플레어 언니랑 아이리스 언니, 레이첼 언니까지! 전부 이상해져버렸어!”
당최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슬쩍 육변기들을 돌아봤지만 그녀들도 이해할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있을 뿐이었다.
괴물 같은 여인은 우리 표정을 보더니 돌연 시무룩해졌다. 그녀의 기분이 안 좋아지면 우리의 목숨이위험했기에 나는 애써 그녀를 달래보려고 했다.
“저기... 괜찮으세요?”
내 말을 들은그녀는 상처 받은 눈을 하더니 기어코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나와 육변기들은 그저 가만히 그런 그녀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설아야!”
위기의 히로인을 극적으로 구해낸 주인공과의 감동적인 재회... 라고 하기에는 너무 쉬운 재회가 아닐까 싶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녀를 꼭 껴안아주었다.
유설아는 내 품에 안겨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그리고는 내 귓가에 조심스레 입술을 갖다대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현수씨, 저 여자 뭔가 이상해요. 막 저를 다 안다는 듯이 행동하고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초콜릿들까지 막 갖다 주고... 그래서 일단 말을 못하는 벙어리인 척 지내고 있었어요.”
유설아의 말에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산책을 나갔다가 멀리서 설아 언니의 기운이 느껴지기에 반가움을 안고 바로 달려갔지. 그랬더니 그 순애충 새끼들이 누나를 꽁꽁 묶고 있는 거 아니겠어? 그래서 내가 짜잔하고 바로 구해줬지.”
나는 여전히 저 정체불명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유설아를 구해준 사람이 그녀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나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하마터면 설아가 심한 고초를 겪을 뻔했습니다.”
평소 존댓말을 거의 쓰지 않는 나였지만 그녀가 보여주었던 압도적인 무력을 생각해 본다면...
나는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혹시 은인의 성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내 말에 그 여인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뭔가를 열심히 중얼거리더니 내 질문에 해맑은 미소로 대답해 주었다.
“남궁서희. 성이 남궁이고 이름은 서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