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1화 〉아스트리아(1) (61/120)



〈 61화 〉아스트리아(1)

좌절, 그리고 새로운 각오. 나는 두 주먹을 꽉 진 채로 다른 차원에 격리된 한채린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서있던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 유설아인가 그 분은...”

분위기를 살피고는 상황 파악을 완료한 한채린은 바로 입을 다물고는 가만히 있었다. 나는 축 처진 어깨로 그런 그녀를 지나쳐 뚜벅뚜벅 걸어갔다.

육변기들을 전부 한 자리에 모은 나는 곧바로 지구로 이동했다.


*


“아빠, 돌아왔네요?”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신시아가 나를 반겨주었다.

“목욕부터할래요? 밥부터 먹을래요? 아니면....나.부.터?”

저번 회차에서는  엄마들을 먹겠다며 장난으로 응수해 줬었지만 지금의 나는 너무나도 저기압이었다.

신시아도 그런 낌새를 눈치 챘는지 장난을 그만뒀다. 내게 걱정이 된다는 듯 위로의 눈길을 보내는 신시아의 모습에 나는 왠지 모르게 울컥해졌다.

육변기들을 잠시방으로 보낸 나는 그녀와 긴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시아야...”

나는 차근차근 신시아한테 사정을 설명했다. 신시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말을 경청해 주었다.

“으, 순애충들...진짜 세상에서 없어져야 하는 해악 같은 존재들이라니까요. 아빠, 그냥 순애충 새끼들 콱 다 죽여 버리죠?”

몸서리를 치는 신시아의 모습에서 나는 그녀가 얼마나 순애충들을 혐오하는 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순애충 새끼들을 전부 족치는 건 나중에생각하고. 일단 설아를 찾는 게 먼저야. 좋은방법 없어?”

신시아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이내 손가락을 탁하고 튕기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아직 제 엄마는 육변기로 만드셨다고 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좋네요. 아스트리아로 넘어가면 제 엄마를 따먹고 영혼 텔레파시로 설아 엄마의 위치를 찾을  있을 거예요.문제가 있다면 설아 엄마가 있는 세상의 시간은 여기와 다르게 흐르고 있을 테니 설아 엄마가 어떤 세상에 있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하루라는 시간이 설아 엄마한테 1초가  수도, 1년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죠.”

좋은 생각이었다. 유일한 문제라면 아스트리아 세계로 넘어가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뿐... 다행히도 그 해결책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에이, 제 엄마가 사는 곳이 아스트리아인데 설마 제가 한 번도 안 가봤겠어요? 제가 한채린씨를 아빠한테 보낼  있었던 비법이 뭐겠습니까... 바로  귀염뽀짝한 신시아의 머릿속에는 아스트리아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차원들의 좌표가 찍혀 있다는 사실!”

나는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애교를 한껏 부리는 신시아의 말을 손쉽게 납득했다. 그런데 이상한 부분에서 갑작스레 의문이 들었다.

“왜 다른 육변기들은 엄마라고 꼬박꼬박 붙여 부르면서 채린이만 한채린씨라고 불러?”

신시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 그래도 아빠랑 그 문제에 대해서 얘기해 보려고 했어요.”

비장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한시아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귓가에 자신의 입을 천천히 갖다댔다.

츄릅-

내 귓속을 유린하는 신시아의 혀에 나는 깜짝 놀라 그녀를 밀어내려 했다.

“아빠, 이건 장난이고...”

그 말에 흥분을 가라앉힌 나는 신시아의 입이 다시금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신시아 나름 내 심각한 분위기를 풀어주기 위해 장난을 쳤던  같았기에 나는 그녀를 기특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한채린씨는 내가 있던 미래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원래 청룡 길드장 한유현은 평생을 솔로로 살았거든요, 그것도 모태솔로로. 찾아보니까 지금 시간대의 한유현도 결혼한 적이 없던데 갑자기  딸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수상하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한채린의 모친에 관한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언론에서도 한유현이 결혼을 했다거나 자식을 낳았다는 소식은 없었는데 어째선지 이 세상 사람들은 한유현에게 딸이 한명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세계의 그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는 거지? 엄마가 없는데 갑작스레 딸이 생기면 이상하잖아?’

신시아한테서 진실을들은 나는 이내 이상함을 느꼈다.

‘그래, 신시아한테서 이 사실을 듣기 전까지는 나조차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었어.’

뭔가 구린 냄새가 났다. 한채린에게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그래도 일단 유설아부터 구하는  먼저니까.’

고개를절레절레 흔들며 호기심을 떨쳐낸 나는 곧바로 육변기들을 불러 모았다.


*

“마음 같아서는 너희들 모두를 아스트리아로 데려가고 싶지만 아무래도 채린이는 여기 남아서 조건우 그 새끼를 처리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해. 내가 위험해지면 어차피 신시아를 통해 바로 우리가 있는 쪽으로 넘어올  있잖아.”

내 말에 육변기들은 쉽사리 수긍해 주었다. 한채린이 번뜩거리는 눈빛을 띄며 내게 물어봤다.

“조건우를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어? 가족들을 그냥 싹 다 죽여 버릴까?”

한채린의 말투에서는 진심 어린 분노가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너무 쉽잖아. 네가 해야 될 일은 조건우와 그 새끼 가족들이랑 친구들에 관한 정보를 모두 수집해 놓는 거야. 대충 다 마쳤는데도 내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면 가족들과 친구들 중에 여자들만  다 납치해놔.”

그렇다, 나는 조건우 주변의 모든 여자들을 따먹을 예정이었다. 그가 보는 바로 앞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한채린을 뒤로 하고 나는 신시아한테 눈짓을 주었다. 신시아의 입에서 용언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가자.”

내 진지한 모습에 모두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우리를 감싼 빛무리가 순식간에 파앗하고 사라졌다.


*


“여기가 아스트리아인가.”

이질적인 중세 유럽풍의 분위기에 대기 중 가득한 마나, 처음 들어보는 언어. 완벽한 소설  판타지 세상의 모습이었다.

“클로에, 안내해 줘. 너라면 엘레노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겠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클로에가 앞장을 섰다. 우리가 전이된 곳은 거대한 왕궁 앞의 커다란 광장, 아무래도 드래곤의 레어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릴 듯 싶었다.

“어라? 저거 설마... 풉!”

광장 한가운데 우뚝 서있던 어마어마한 크기의 황금색 동상, 그 모습은 다름 아닌 아스트리아의 구원자 유설아였다.

“이야, 대단하네.”

심각한 분위기가 어느 정도 풀어졌다. 유설아의 얼굴을 보니 하루 빨리 그녀를 구출해 따먹고 싶어졌다.

나는 뻐근할 정도로 발딱 서버린  자지를 매만지며 클로에를 따라 광장을 걸었다.

갑옷을 입은 수상한 무리가 다가와  수 없는 언어로 내게 말을 걸었다. 클로에는 그 말을 이해했는지 이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현수, 상식은 지켜야지... 자지를 만지면서 걸으면 어떡해. 경비병이 따라오래.”

아차, 판타지 세상이라도 공연음란죄는 성립하나 보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경비병을 묵묵히 따라갔다. 마음의 상처를 입을 정도로 내 육변기들의 표정은 차가웠다.

“현수님, 그냥 그 좆을 잘라 버리는 어떻습니까? 그럼 이런 불미스러운 일도  생길 것 같습니다.”

“나현수 병신 새끼. 나도 자르자에 한 표.”

“그... 그래도 잘라 버리면 박히지를 못하는데...”

이시연의 마지막 한 마디 덕분에 어느 정도 육변기들은 경멸의 시선을 거두어주었다. 여전히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날 쏘아보긴 했지만 다행히도 내 좆을 자를 생각은 더 이상 없어 보였다.

*


경비병을 따라 경찰서비슷한 곳에 끌려온 지도 벌써 한 시간 가까이가 지났다. 한시라도 빨리 유설아를 구하러 가야 되는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져갔다.

클로에가 높아 보이는사람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육변기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열심히 견뎌내며 클로에를 주시했다.

대충 얘기가 끝난  보였다. 클로에와 그 사람은 악수를 했고 클로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현수, 저 사람이 원래는 감옥에서 조금 지내야 된다고 했는데 내가 하이엘프임을 밝히고 왕국을 날려버리겠다고 협박하니까 대충 눈감아 주겠다고 하더라고. 잘했지?”

음, 화기애애한 대화는 아니었나 보다. 칭찬을 바라듯 머리를 내미는 클로에의 모습에 나는 기꺼이 그녀를 쓰다듬어주었다.

‘엘프가 여기서는 존나 약한 육변기의 종족까지는 아닌가 보네. 보통 고압적인엘프가 협박하면 따먹어서 굴복시키는게 진리인데.’

애초에 마나와 정령을수준급으로 다루는 엘프들은 이 세상에서 강자에 속하는 것이었다. 어쨌든우여곡절 끝에 사건을 잘 해결한 우리는경찰서 비스무리  곳에서 빨리 떠나려 했다.

“저기 저들이다! 잡아라! 왕국을 테러하겠다고 선전포고한 것으로 보아 반역자들의 무리가 분명하다!”

아까 클로에와 대화하던 높은 직위처럼 보이는 사람이군대를 이끌고 우리의 앞을 막아섰다. 인상을 팍 쓰며 클로에를 쓰다듬던 내 손은 그녀의 머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하... 네가 나보다  사고뭉치인 것 같다, 클로에.”

우리를  둘러싼 채 칼을 들이미는 병사들의 모습에 결국 우리는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넌 나중에 크게 혼날 줄 알아.”

내 말에 시무룩해진 클로에가 화풀이를 위해 활의 시위를 가볍게 당겼다.

바람의 정령이 바람의 화살을 만들어 그녀의 활에 걸어주었다.

피슝-

단 한 발만에 군대는 초토화가 되어버렸다.

‘어우, 내가 하도 SS급이랑 SSS급을 따먹다 보니까 강함의 기준이 이상해져버렸나 보네. S급이어도 지구에서는 손에 꼽는 강자잖아.’

다시금 S급의 위력을 실감한 나는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었다. 당당한 걸음걸이로 건물을 나서는 클로에의 뒤를 별 감흥 없다는 듯 지들끼리 놀고 있는 육변기들과 함께 따라 나갔다.

“저기다! 잡아라! 반역자들을 처단하라!”

귀찮은꼬리를 잔뜩 붙인 채로 우리는 엘레노어의 레어가 있는 블루 마운틴을 향해 매우 귀찮은 여정을 계속했다. 중간에 기사단을 만났을 때는 조금 시간이 지체됐지만 육변기들의 막강한 전력을 막을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와, 저기 봐봐. 우리 현상수배범이 되었는 걸?”

왕국의 곳곳에 우리의 몽타주가 그려진 현상수배지가 붙어 있었다. 마치 셀럽이 된 것만 같아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현수님은 관종이십니까?”

물론 아이리스의 일침에 금방 자괴감을 느끼며 우울해졌지만...

*

“저기가 블루 마운틴이에요. 사실  이름조차도 엘레노어가 블루 드래곤이라 지멋대로 산 이름을 바꿔버린 거지만요...”

클로에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아주 높은 산이 보였다.

“등산 싫어.”

육변기들의 매서운 눈초리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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