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귀환자의 성인용품점(20)
나현수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 채 그저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우연히만난 인연으로 알고 있지만 진실은 따로 있었다.
“아빠,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어요?”
대한민국 1위 길드인 청룡 길드의 길드장, 한유현. 그는 원래 항상 두 명의 동료와 같이 던전을 돌았었다.
“그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나도 매일같이 악몽을 꾼단다.”
한유현의 비겁한 변명. S급 던전에서 감당할 수 없는 적을 만난 한유현은 자신의 두 동료를 던전 속에 버려둔 채 홀로 도망쳤었다.
진실을 알아버린 나는 너무나도 혼란스러웠다. 동료를 버리고 도망친 비겁한 아버지, 나를 키워준 사랑스러운 아버지, 나는 도저히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지을 수가 없어져 버렸다.
“그 아이는 어디 있어요. 아빠라면 알고 있을 거 아니에요.”
두 눈을 찔끔 감은 아빠는 궁색한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들의 자식을 보면 내 가슴이 찢어질까 무서워 일부러 그들의 아이에 대한 정보는내게 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해놓았다. 너도 쓸데없는 데 관심 가지지 말거라.”
내가 알던 아빠는 저런 사람이 아니었다. 눈물을 흘리며 밖으로 뛰쳐나간 나는 몰래 그 아이에 관한 조사를 시작했다.
*
“저기 저 아이야?”
내 눈에 들어온 건 한 조그만 꼬맹이, 나랑 한 살 차이였지만 아직 2차 성징이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그의 왜소한 체구는 어딘가 불쌍해보였다.
“네, 아가씨. 고아원에서 자라 현재는 나현수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수행비서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계속해서 그 소년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나라도 저 소년을 도와주고 싶지만... 아빠가 알면 혼날 거야...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도와줄 수 있을 때까지 이렇게 지켜보기만 해야 되겠네...”
혼잣말을 중얼거린 나는 힘없는 표정으로 세상 다 산 듯한 한숨을 내쉬는 엉뚱한 소년을 쳐다봤다.
소년은 열심히 손을 꼼지락 거리더니 환한미소를 지었다. 나는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발그레 볼을 붉히며 멍하니 그의 모습을 쳐다봤다.
“흠흠. 가자.”
그 날 이후, 나는 매일같이 소년을 감시하며 지루한 삶을 달랬다.
*
“뭐야, 쟤 뭐하는 거야?”
내 물음에 수행비서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저 통장을 감추는 것 같습니다. 숨겨진 유산 같은 것 아닐까요? 고아원에 통장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성인도 안 된 저 아이가 돈을 지키기는 아무래도 힘들겠죠.”
통장을 다시 땅에 묻은 소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람이 없는 살핀 후 급히 고아원으로 돌아갔다.
그가 파묻은 통장을 꺼낸 나는 흙을 털어내고 그 안을 열어봤다.
“일, 십, 백, 천 만... 삼십 억? 이 정도면 꽤나 많은 돈 아니야?”
수행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안경을 매만졌다.
“이 정도 돈이면저 소년이 성인이 되었을 때 꽤나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군요.”
“뭐야 그럼 내 도움도 필요 없는 거야? 난 쟤가 어른이 되면 짠하고 나타나서 멋진 공주님 역할을 하려고 했는데?”
철없고 상식이 부족하던 나는 해서는 안 될 짓을 해버렸다.
“통장만 슬쩍 고아원장한테 가져다주고 가자.”
그날 이후소년의 얼굴에서 미소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
‘드디어 직접 말을 건네는 거야. 긴장되네...’
어엿한 미녀로 자란 나는 애써 옷을 바르게 정돈하며 카페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네, 여기 번호 한 잔이랑 아메리카노도 좀 주세요.”
긴장해버린 나머지 흑역사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푸흡, 웃기신 분이네요. 아메리카노 한 잔 맞으시죠?”
“아뇨. 번호도 주셔야죠.”
핸드폰을 내미는 내 모습에 나현수는 꽤나 당황한 것 같았다. 수줍게 핸드폰을 받아든 그는 그의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오늘 일 끝나고 시간 되요?”
내 물음에 나현수의 고개는 미친 듯이 끄덕거렸다. 나는 그의 귀여운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래 과거에 철없던 행동을 했던 만큼, 앞으로 더욱 잘해주면 되는 거야.’
그렇게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며 나는 해맑은 얼굴로 커피를 홀짝였다.
*
“뭐 하여튼 그런 일까지 전부 알고 있다는 거죠.”
얄미운 조건우의 표정에 주먹이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지금 내 처지는 꽤나 참담한 수준이었다.
“이야, 한채린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 아마 꽤나 경멸하겠죠?”
나는 아랫입술을 씹으며 두 눈을 치켜뜨고 그의 말에 반박했다.
“용서를 구하면 돼. 현수라면 용서해 줄 거야.”
조건우는 내 말에 흥미롭다는 듯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화이트 와인을 홀짝였다.
“뭐 그럼 일단 당신이 나현수씨에게 한 잘못들은 여기까지 얘기하도록 하고... 이 영상들 좀 봐주시겠어요?”
영상을 재생하자 나현수의 몸에 올라타 열심히 허리를 흔드는 음란한 암캐같은 내 모습이 흘러나왔다.
“나현수씨와는 아주 만약에라도 잘 해결될 수 있겠지만... 이 동영상들이 공개되면 한채린씨와 나현수씨는 물론이고 청룡 길드 전체가 휘청거리지 않겠어요?”
나는 죽일 듯이 조건우를 노려봤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내 시선을 가볍게 받아넘겼다.
“청룡 길드장 한유현의 유일한 여식, 한채린. 남자를 수면간하는 걸레년으로 밝혀져...성폭력 범죄자의 부친이 이끄는 청룡 길드, 이대로 괜찮은가. 뭐 다양한 기사들이 각양각색으로 쏟아지겠네요.”
“나현수한테 말하고 모든 걸 용서받으면 그만이야.”
“물론 용서를 받았을 때는 그렇게 희망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글쎄요. 도박을 하기 보다는 저와 거래를 통해 확실하게 넘어가는 게 훨씬 안전하지 않을까요?”
“무슨 거래.”
“어차피 쓰레기 같은 당신에게 나현수 같은 순수한 남자는 좀 아깝다고 생각하시지 않나요? 원래 유유상종이라고 당신 같은 쓰레기는 저 같은 쓰레기랑 만나야죠.”
“지금 현수랑 헤어지고 너 같은 저질이랑 만나라는 거야? 들어볼 가치도 없네. 내가 너 따위를 사랑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조건우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그는 재빨리 자신의 표정을 수습했다.
“사랑이라... 저는 그딴 건 신경 쓰지 않아요. 그저 당신이 제 뒷배로 있어주면 제가 한영그룹의 차기 회장이 될 수 있겠죠. 그리고 여차하면 청룡 길드까지도 노려볼 수 있고요. 그저 계약뿐인 결혼이에요.”
내가 망설이자 조건우는 나를 벼랑 끝으로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당신의 죗값을 치룬다 생각하고 평생 저와 계약 결혼으로 묶인 채 혼자 속죄하시면 됩니다. 그 편이 나현수씨에게도한채린씨에게도 좋을 겁니다. 설마 나현수씨한테 죄를 고백해 자신의 마음의 짐을 덜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내가 나현수에게 내 죄를 고백한다. 결과가 좋든 안 좋든 누군가는 상처를 받아야 하는 잔혹한 일이었다.
내가 혼자 모든 죄를 끌어안는다. 현수가 살짝 마음의 상처를 입겠지만 그래도 전자의 경우보다는 덜 받을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위한 길이기도 했고...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계산을 마친 나는 어쩔 수 없이 조건우의 거래에 응했다.
그렇게 나와 나현수 사이에 걷잡을 수 없는 오해가 생겨버렸지만 나는 그게 모두를 위한 옳은 길이라고 여겼다, 정확히는 자기합리화를 한 것뿐이지만...
*
“그냥 전부 다 변명이었어. 내가 내 죄를 고백했는데도 네가 용서하지 못하고 날 경멸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두려웠어.”
“말이 되냐? 네가 다른 남자랑 바람을 펴도 내가 널 경멸의 시선을 볼 건 명백하잖아. 네 말대로라면 적어도 좋게 헤어졌어야지.”
“나는 원래 최대한 좋게 좋게 끝내려고 했어. 그 문자 메시지를 보낸 건 조건우 그 새끼야. 이미 문자는 보내졌고, 돌이킬 수 없는 것을 알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새끼의 계획에 어울려줬던 거야.”
나를 가지고 논 거였다던 그문자 메시지, 그것이 조건우가 보낸 것이었다니.
“개새끼,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물론 그래도 널 용서한 건 아니야, 한채린. 네가 나한테 저지른 일들이며, 네가 날 위한답시고 이기적인 선택들을 한 건 명백한 잘못이야.”
한채린이 애처로운 눈으로 날 쳐다봤다.
“네 잘못들은 어떤 방법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어.”
한채린의 표정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그러니까 너도 평생 내 곁에서 육변기로 살면서 속죄해. 그게 진정 나를 위하는 길이니까.”
나는 한채린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표정이 환히 밝아진 한채린은 열심히 혀를 움직여 내 입 안을 탐했다.
“다시는 내 곁을 떠나지 마. 다시는.”
나와 한채린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우리의 키스는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레이첼이 급히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기 전까지.
*
“그래요? 그러면 곧 원래 세계로 떠나겠네요? 마나가 담긴 물품은 가져갈 수 없다고 했지만... 성인용품점에서 챙겨올 것들이 몇 개 있긴 하네요. 클로에, 넌 챙겨야 할 거 없어?”
클로에의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지는 것을 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빨리 갔다 올게요.”
그렇게 나는 택시를 타고 성인용품점으로 향했다.
*
“형님, 가게에 아무도 없는데요? 정보가 잘못된 거 아입니까?”
문신 깡패 돼지 1은 형님을 향해 건들거리는 말투로 물어봤다.
“좀만 기다려보자. 정 안 오면 내일 아침 출근할 때 확 덮쳐버린다.”
그때 문신 깡패 돼지 2가 헉헉대며 달려왔다.
“형님, 저기 그 사진 속의 여자가 오고 있습니다. 방금 택시에서 내렸습니다.”
한껏 폼을 잡은 형님이라고 불리던 사내는 머리를 스윽 매만지고는 비장한 말투로 말했다.
“가지.”
*
‘제길. 힘만 있었어도 저딴 양아치들은 한 주먹거리도 안 될 텐데, 아니 그냥 콧바람만 살짝 내쉬어도 날아가 버릴 텐데.’
안타깝게도 원인 모를 이유로 내 힘은 봉인되어 있었다. 나는 세 명의 건장한 남성들의 협공에 속절없이 붙잡히고 말았다.
“이야, 형님. 이 년 반반한 것 좀 보이소.”
“상품은 건드리는 거 아니다. 우리가 받은 돈이 얼만데. 프로의식을 좀 가져라, 프로의식을.”
멋진 척 허세를 부리는 양아치 새끼 때문에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이윽고 어느 집 앞에 도착한깡패들이 문을 똑똑 두드렸다.
“배달 왔습니다.”
문이 열리고 보인 익숙한 얼굴의 남성은 나를 향해 더러운 눈빛을 보내며 느끼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설아씨, 기다렸어요. 안으로 들어와요.”
결국 구역질을 참지 못한 나는 토를 거하게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