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귀환자의 성인용품점(6)
“바로 키스하고 분위기 좀 만들어 보려고 했더니 아무래도 S급 아이템 위력이 만능은 아닌가 보네.”
나는 전에 보상으로 받았던 뛰어난 스카우터(S)를 슬쩍 착용하고는 주섬주섬 신문을 주워들어 읽는 척을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화장실에서 돌아온 클로에는 흥분을 많이 가라앉힌 듯 했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계속해서 내 입술로옮겨졌지만 일전에 유설아의 케이스처럼 못 참고 입술을 덮치거나 하려는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슬쩍 손을 움직여 안경을 똑바로 쓰는 척하며 뛰어난 스카우터(S)를 작동시켰다.
『‘자연의 사랑을 받는 궁사’ 클로에 (S)』
□ 레벨 97
□ 능력 [하이엘프 궁술] [바람의 정령술]
□ 가호 [세계수의 가호]
□ 힘 [322] 체력 [134] 민첩 [502] 지능 [91] 정신력 [119] 마나 [341]
‘가호는 처음 보네. 그나저나 S급이라 립밤의 효과를 어느 정도 저항한 건가? 유설아야 뭐 NTL 최적화 때문에 스탯이 좆됐으니까 S급 아이템에 저항조차 못하고 그런 격한 반응을 보였던 거겠지. 아니면 클로에의 정신력 수치가 높아서 저항을 한 건가?’
아이템에 대해 더 연구할 필요성을 느낀 나는 일단 현재 상황을 개선시킬 방안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어쨌든 립밤이 효과가 있긴 하잖아. 그저 키스를 할 만한 분위기를 살짝 만들거나 간단한 계기만 만들어 주면 될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오후 3시가 되도록 나는 아무런 방법도 떠올리지 못했다. 결국 클로에를 따먹지 못한 채 시무룩한 나를 성인용품점으로 돌아온 유설아가 반겨주었다.
“우성씨, 클로에랑은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친구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조금 엉뚱한 면이 있어서...”
나는 그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내 모습을 본 유설아가 잠시 멍하니 서있더니 이내 그녀의 붉어진 볼이 바닥을 향해 푹 내리깔렸다.
“그리고 클로에는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어요! 그냥 그렇다고요...”
유설아의 귀여운 모습에 나는 풋하고 웃음을 내뱉었다. 그녀의 볼이 부끄러움으로 더욱 새빨개졌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는데요? 따로 궁금한 게 있긴 한데...”
내가 뜸을 들이자 유설아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는지 결국 바닥을 향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내 진지한 눈동자를 직시했다.
“설아씨는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나요? 없었으면 좋겠는데...”
유설아의 두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움찔거리는그녀의 입술 사이로 겨우 대답이 흘러나왔다.
“있어요... 아니 있었다고 해야 되나? 대상이 바뀌긴 했지만 지금도 있긴 하니까 결국은 있는 거겠죠?”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하니까 조금 슬퍼지네요...”
나는모태솔로가 아니라 무려 1회의 연애 경험이 있는 예비 하렘마스터.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는 사실은 진즉 눈치 채고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그녀를 놀리기 위해 짐짓 슬픈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그게 아니라! 어우...”
유설아는 입술을 우물쭈물 거리며 쉽사리 말을 내뱉지 못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직설적으로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건 역시 무리였는지 그녀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화제를 바꿔버렸다.
“차 키! 차 키를 고아원에 두고 왔어요. 빨리 누가 훔쳐 가기 전에 가지러 가야겠다.”
차 키는 방금 유설아가 자신의 오른쪽 뒷주머니에 넣었지만 나는 그 점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더욱 웃긴 점은 차 키를 찾으러 가겠다는 유설아는 성인용품점을 빠져나가 차를 타고 고아원으로 직행했다는 점이었다.
*
결국 퇴근 시간까지 유설아는 돌아오지 않았고 부쩍 어색해진 클로에와는 말 한 마디 섞지 못한 채 나는 성인용품점을 나섰다.
혼자 밥을 먹기가 적적해 클로에한테 밥이라도 같이 먹자 권해볼까 했지만 그녀는 이미 성인용품점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계단을 올라가자 나는 우연히 한 남자와 마주칠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준호였다.
어색한 침묵이 우리 사이의 긴장감을 고조시켰다.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정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성인용품점에서 내가 나온 것이 그의 분노를 더욱 고조시킨 것 같았다.
이준호는 가면을 쓰고 상냥한 미소와 함께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 우성씨. 어제는 내가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실수로 해고 통보를 했지 뭐야. 오늘 우성씨가 없으니까 카페 장사가 힘들더라고.”
대충 상황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내가 유설아 곁에서 일하는 게 못마땅하므로 나를 다시카페에 취직시키려는 개수작 같았다.
“새삼 우성씨가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깨닫게 됐지 뭐야. 내일부터 다시 카페에 나와, 내가 시급도 특별히 두 배나 쳐줄게.”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또박또박 대꾸했다.
“새로운 직장을 구해서요. 여기지하에 있는 성인용품점인데... 점장님이 절 많이 아껴주셔서 다시 카페로 나가기는 힘들 것 같네요. 오늘도 점장님이 저를 위해 아주 특별한 서비스를 해주시더라고요. 완전 지극정성으로. 점장님 혀놀림부터 해가지고 스킬들이 쫙 이어지는데 아주 혼까지 쏙 뽑혀 나가는 것 같았다니까요?”
이준호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소설 속 현재 시점에서 유설아와 이준호는 당장 섹스하고 결혼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썸을 몇 년 동안이나 오래 탄 사이, 당연히 나라는 불청객이 유설아를 가로채려고 나타났으니 아니꼽게 보였음이 분명했다.
‘NTL이 내 운명인 걸 어쩌라는 거니? 꼬우면 나한테이런 능력을 준 존재한테 찾아가서 따지던가.’
나는 부들부들 떠는 이준호의 모습을 즐겁게 감상하며 휘파람을 불어주고는 유유히 그를 향해 다가가 어깨에손을 얹고 그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에휴, 참 불쌍하네. 나중에 설아씨랑 섹스하는 영상이라도 보내줄 테니까 그거 보고 딸이나 쳐.”
참지 못한 이준호가 괴성을 지르며 내 얼굴에 주먹을 날리려고 했지만 그는 힘없는 일반인, 당연히 헌터인 내 손에 의해 가볍게 가로막혔다.
나는 가볍게 이준호의 이마에 딱밤을 날려주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준호는 2m를 날아가 바닥에 쿵하고 떨어졌다.
‘헌터는 일반인을 핍박하면 안 된다? 그런 법이 있긴 했었지. 꼬우면 헌터관리국에서 이 세계까지 와서 날 잡으러 오겠지.’
나는 손을 툭툭 털었다. 퉤하고 가볍게 이준호의 옷 위에 침을 뱉은 나는 느긋하게 자리를 떠났다.
“아 맞다,나 집 없지? 이 육변기들은 대체 뭐 하느라 집을 날려 먹은 거야?”
‘헤이, 시리. 공략 치트 스킬로 육변기들이 뭐 하느라 자취방 부셔 먹었는지 좀 알려줘.’
[한채린의 능력 ‘얀데레’가 아이리스와 레이첼과 이시연을 공격하자 아이리스가 ‘서클 마법’ 중 디바인 필드(Divine Field)를 전개. 공격이 분산되어 자취방 벽면을 폭격함. 레이첼이 ‘클라인 검술’의 제7식...]
전투의 과정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무래도 밤새 말할 것 같아 나는 잠시 시리를 중단하고 다른 질문을물어보기로 했다.
‘헤이, 시리. 공략 치트 스킬로 내 육변기들이 지금 어디서 뭐하는지 좀 알려줘.’
[육변기 아이리스는 현재 ‘서클 마법’ 중 홀리 스트라이크(Holy Strike)를 사용해서 한채린을 공격 중, 육변기 레이첼은 현재 ‘클라인 검술’ 중...]
‘24시간이 넘도록 싸우고 있다는 거네. 이게 세계관 최강자들의 싸움인가? 가슴이 웅장해진다.’
아무래도 힘이 약한 찐따 같은 나는 현재로서는 함부러 그녀들을 찾아갈 수 없을 것 같아보였다.
결국 찜질방에 도착한 나는 맥반석 계란과 바나나 우유를 마시며 평온한 밤을 즐기기로 했다.
*
“현수는~ 뚠뚠~ 오늘도~ 뚠뚠~ 열심히 일을 하네~ 뚠뚠~”
노래를 흥얼거리며 성인용품점 앞에 도착한 나는 이상하게도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눈앞이 일렁이는 것만 같은 착시 현상이 일어날 정도로 머리가 어질어질 했다.
“이게 뭐시여. 버그 걸렸나? 맵 로딩이 이상하네.”
말 그대로 건물의 절반이 날라가 있었다. 카페비네가 있던 자리에는 빈 공간이 떡하니 있었다.
“살다 살다 건물들이 날아다니는 게 보이네... 꿈인가?”
아포칼립스가 이러할까? 모든 게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무질서와 혼돈, 세계가 멸망해 가고 있었다.
이 기괴한 꿈에서 깨어나기를 바라면서 나는 내 볼을 꼬집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다.
‘헤이, 시리. 혹시 들리니?’
[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 좀.’
[<회귀자의 성인용품점> 세계의 메인 히로인 유설아가 사망함에 따라 세계의 비틀림이 발생 중입니다.]
씨발, 메인 히로인이 죽었단다.
*
“설아, 문자로 어딘지 보내줄게. 빨리 와, 네 힘이 있어야만 멈출 수 있어.”
애당초 무슨 일이란 말인가. 지구에는 마나를 쓸 수 있는 존재가 나와 클로에를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았어야 한다.
‘내 힘은 대체 이런 중요한 때 왜 봉인되어 있는 거냐고!’
얼마 전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봉인된 내 힘,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강자들. 이 모든 건아마 지구를 노린 한 거대 암중 세력의 음모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시기가 공교로웠다.
“금방 갈게. 상황 파악하고 있어.”
내 힘은 쓸 수 없었지만 어쨌든 지구는 내가 지켜야만 하는 내 보금자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성씨를 지켜야 해.’
나는 그대로 집을 나서서 클로에가 문자해 준 미지의 위험이 도사리는 장소로 차를 끌고 갔다.
*
“현수씨는 당신의 물건이 아닙니다!”
분명 저건 9서클 대마법사들만 쓸 수 있다는 헬 플레임(Hell Flame).
“나현수 그 새끼는 왜 이런 골치 아픈 년을!”
심지어 저건 소드마스터들만 쓸 수 있다는 오러 블레이드(Aura Blade).
"백만 볼-, 아 이건 표절이지. 음... 뭘로 할까. 대충 찌릿찌릿 쏴!“
화룡점정으로 번개의 정령왕까지.
“현수는 내 거야. 네들이 뭔데 현수의 육변기를 자처해! 현수는 나만 보고 나만 먹을 거야!”
알 수 없는 힘으로 세 명의 합공을 버텨내는 미지의 여인.
‘좆 됐네.’
힘이 정상이었다면 힘들기는 해도 저들을 제압할 수 있었겠지만 힘을 잃은 자신은 그저 무기력하게 그녀들의 싸움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클로에, 엘레노어 불러줄 테니까 같이 아스트리아로 넘어가. 저 여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이 세계는 끝인 것 같네. 미리미리 대피해 있어.”
“설아 너는? 갈 거면 너도 같이 가야지.”
“미안, 나는 저 여자들이 지구를 공격한다고 해도 끝까지 버틸 거야. 우성씨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너도 알잖아 내가 신한테 직접 추방당한 거. 너도 알잖아 내 능력, 오랜만에 쓸 일이 생긴 것 같네.”
비장한 각오를 다짐한 나는 엘레노어를 향해 텔레파시를 보냈다.
‘엘레노어, 계약에 따라 내 부름에 응답하라. 너의 현현을 내가 허하노라.’
대기가 일렁이더니 유설아 바로 옆에 파란 머리의 여자가 나체로 나타났다.
"크아아아아... 크아아?"
드래곤중에서도 최강의 블루드래곤이 울부짓다가 갑자기 이상한 목소리를 내었다.
모두의 시선이 엘레노어에게 집중되었다. 유설아와 클로에는 물론이고 아이리스, 레이첼, 이시연, 그리고 한채린까지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블루드래곤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이 년! 잘 만났다! 그때 날 도마뱀이라고 부른 그 새끼는 어디 갔느냐!”
엘레노어가 한채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드... 드래곤?”
일전에 마계에서 넘어온 마룡을 상대한 적이 있는 아이리스와 레이첼, 흑룡 칼데아를 토벌한 적이 있는 이시연, 그리고 저 블루드래곤을 직접 상처 입힌 적 있는 한채린.
그녀들은 알 수 있었다, 엘레노어가 인지를 초월한 지고한 영역의 강자라는 것을.
자연스레 네 명의 여인이 힘을 합쳐 엘레노어를 상대하는 그림이 만들어졌다.
“저... 저기? 난 엘레노어가 그냥 클로에만 데리고 아스트리아로 넘어가면-”
엘레노어의 화끈한 브레스가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
이 모든 전투를 인공위성으로 발견하고 드론을 보내 구경 중이던 대한민국 비밀 첩보 기관 KSA(Korea Secret Agency)의 요원들.
“난 파란 여자한테 걸겠어. 몸매가 쌔끈하잖아?”
“저 미녀 4인방을 봐. 아까 지들끼리 싸우는 거 봤잖아. 존나 세대니까?”
“야, 4대1로 싸운다는 게 뭐겠어. 원래 쫄리는 애들이 다구리 까는 거야. 진정한 강자는 저렇게 홀로 싸우지.”
지구 역사상 유래가 없는 스케일의 전투를 두고 치킨값 내기가 벌어지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