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귀환자의 성인용품점(2)
엘레노어는 매우 강했다. 마치 투명한 그 드래곤이 실존한다면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설아, 얘 어떡할까?”
내 멱살을 한 손에 쥔 채 싱글벙글한 미소를 지으며 유설아를 향해 물어봤다. 유설아는 주변에 벗어 두었던 자신의 옷을 입으며 싸늘한 말투로 대답했다.
“쟤가 어떤 방법으로 내 힘을 봉인했는지 알아내줘.”
엘레노어의 황금색 눈동자가 순간 빛이 났다. 그녀가 입맛을 다시며 유설아를 쳐다봤다.
“애초에 널 상대할 자신이 없었으면 내 약점을 말하지도 않았겠지. 우리가 친구긴 하지만넌 항상 나를 노리잖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저 남자를 상대로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더라고.”
평소 유설아의 몸을 여러 의미로 노려오던 엘레노어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날 째려봤다.
“어이, 내가 지금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내 설아한테 어떤 개수작을 부렸는지 불어.”
그러는 와중에 나는 그녀들의 대화를 쳐다보며 재빠르게 상황을분석하고 있었다.
‘엘레노어가 유설아를 노리는 레즈? 그렇다면 지금 상황이 다 설명이 되지. 그럼 난 엘레노어랑 손잡고 유설아를 같이 따먹으면 되는 거야.’
자신만만한 말투로 나는 영화에 나오는 어느 이상한 의사나 할 법한 대사를 외웠다.
“엘레노어, 거래를 하러 왔다.”
내 제안에 블루 드래곤의 표정이 흥미로 물들었다. 나는 지금이 기회임을 직감하고는 열심히 떠들었다.
“너, 유설아가 목적이지? 쟤는 나한테 힘을 못 써. 내가 제압할 테니 우리 둘이 같이 따먹는 거야. 되게 심플하지?”
블루 드래곤의 음흉한 눈동자가 유설아를 응시했다. 이윽고 비릿한 미소를 지은 그녀는 내 멱살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거 같은데, 어떡할래, 설아야?”
유설아는 치욕스럽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두 눈을 찔끔 감고는 최후의 전장에 선 전사처럼 비장한 말투로 엘레노어에게 말했다.
“계약을 이행하면 내 몸뿐만 아니라 클로에의 몸도 마음껏 가지고 놀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엘레노어가 그녀의 말에 다시금 나를 쳐다봤다.
“아니, 내 말을 들으면 가지고 노는 정도가 아니라 평생 소유할 수 있어! 아주 그냥 네 걸로 만들어 줄게!”
물론 육변기로 만들어 내가 먹튀할 생각이었지만 굳이 그걸 밝힐 정도로 나는 멍청하지 않았다.
“미안한데, 나와 설아는 아주 끈끈한 우정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친구가 저렇게까지 부탁하는데 내가 안 들어줄 수가 없잖아?”
애초에 저 씨발년은 유설아에게서 최대한 보상을 뜯어내려고 내게 동조하는 척 연기했던 것 뿐이었다. 그녀는 애초에 유설아를 나랑 따먹을 생각이 없었음이 분명했다.
‘칫, 이렇게 되면...’
나는 마나를 조금씩 끌어올려 위스퍼(Whisper) 마법을 시전하려고 했다.
“쯧, 너 드래곤을 뭘로 보는 거니? 우리는 마법의 종주라고 불리는 종족이야. 감히 내 앞에서 잡스러운 마법을 몰래 쓰려고 하다니. 너 좀 혼나야겠구나?”
아무래도 좆된 것 같았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언어가 엘레노어의 입에서 흘러나오더니 내 눈이 스르륵 감겨왔다.
“애송아 이게 바로 용언 마법이다. 네가 쓰려던 잡스러운 마법 따위와는격이 다르지. 너 따위에게 쓰기는 아까운 마법이기는 하지만 내 친구 설아를 위해서 쓰는 거니까 뭐. 흐흐흥~ 설아네 가게에는 재밌는 도구들이 많네~ 어떤 도구들로 이 애송이를 요리해 줄까나~”
내 의식은 거기서 끊어졌다.
*
[당신의 끝없는 집착이 능력 얀데레의 대상 (나현수)가 위험에 빠졌음을 감지합니다.]
나현수가 떠난 집안, 신시아와 마주앉아 있던 한채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시나요? 이렇게 교양없는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신시아의 말투는 어딘가 차가웠다. 레이첼, 아이리스, 그리고 이시연에게도 살갑게 대하던 그녀의 모습은 없었다.
“현수가 위험해. 현수가 위험해. 현수가 위험해.”
손톱을 물어뜯으며 정신줄을 놓은 채로 정처 없이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한채린의 꼴사나운 모습에 신시아는 한숨을 내뱉었다.
“하, 이번만 특별히 보내드리죠. 대신 다음에는 저랑 꼭 깊은 대화를 나누도록 해요.”
한채린의 발 밑에 거대한 마법진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채린은 주변을 둘러볼 겨를도 없어 이러한 현상을 눈치 채지도 못한 채 그저 하던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다음에는 제정신이기를 바래요.”
이윽고 한채린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
“현수가 위험해. 현수가...?”
이상한 기분이 들더니 주변의 광경이 휙휙 바뀌고 있었다. 뭔가 온갖 뒤죽박죽이 되버린 세계 속을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 광경을 멍하니 구경하던 나는 순식간에 나현수의 앞으로 전이됐다.
나현수가 갑자기 나타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저 눈동자. 저 머리카락. 저 눈, 코, 입. 모두 내 거야.’
황홀한 눈빛으로 나현수를 쳐다보자 그가 짜게 식은 얼굴을 하고는 내게 일갈했다.
“꺼져. 아무리 꿈속이라도 네 얼굴만 보면 화가 난다.”
‘아, 역시 현수는 꿈속에서도 내 생각을 할 정도로 나를 사랑해. 부끄러워서 어떡하지? 이렇게 열렬한 구애를 그저 무시할 수도 없고.’
대체 저게 어딜 봐서 구애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는지 일반적인(정상적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현수는 말 하나하나마다 항상 나를 사랑하는 게 느껴졌으니까.
“나도 사랑해 현수야.”
“미친년.”
“그래, 나 미친년이야.”
“개또라이년.”
“그래, 나 개또라이년이야.”
“니엄-”
“선은 넘지 마. 아무리 내가 사랑하는 현수라도 선은 지켜야지?”
귀여운 현수가 말실수를 할 뻔한 것 같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저렇게 오로지 온전히 나만을 눈동자에 가득히 담고 있는 현수의 모습을 보면 난 뭐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패드립만 빼고.
“뭐지, 꿈이 아닌가?”
“당연히 꿈이 아니지. 그렇게 나랑 만나는 상황이 꿈같이 느껴졌어?”
“엉, 여기는 지구가 아니거든.”
“상관없어. 현수 네가 있는 곳이라면 난 어디든 갈 수 있어.”
“엉, 나중에 지옥에서 같이 만나기로 하고 지금은 빠이빠이 하자.”
“싫어. 지옥까지 평생 함께 같이 갈 거야.”
“뭐지 씨발? 슬슬 무서운데.”
사랑스러운 현수가 갑자기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아, 아플 텐데.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뺨을 정성스레 핥아주었다.
“흐미, 씨부레. 진짜 꿈이 아니잖아?”
“몇 번을 말해. 앞으로 나랑 평생 여기서-”
방해꾼이 문을 열고 밀실로 들어왔다. 파랑 머리 년, 여기 오기 전에 현수의 집에서 만난 자칭 딸과 꽤 많이 닮아 있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뭐냐 넌? 이 애송이만 잡아왔는데 웬 귀신 한 마리가 따라붙었네.”
“귀신아닌데?”
“맞아, 얘 귀신 아니야. 멀쩡한 사람보고 왜 귀신이라 그래? 사과해.”
“미안... 이 아니라 귀신이 아니면 왜 여기 있는 거지?”
“현수는 내 거거든.”
“뭔지 몰라도 여기서 나갈 수만 있다면 잠시 네 거 해줄게.”
“저기, 그런 말은 속이려는 당사자 앞에서 하는 게 아니지?”
말장난이 슬슬 질렸는지 여자는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오른손으로 문지르며 내게 말했다.
“그냥 나가. 곱게 보내줄 때. 여기 이 남자는 내가 볼 일이 좀 있어서 말이야.”
그녀는현수의 몸을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나를 명백히 도발하고 있었다.
[당신의 끝없는 집착이 능력 얀데레의 대상 (나현수)를 위하는 마음에 힘을 보태줍니다.]
내 몸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들끓어 올랐다. 헌터는 아마 이런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사람들이겠지. 나는 최대한 내 힘을 통제해 보려고 했다.
“훗, 꽤나 몸이 탄탄한데? 가지고 놀기 좋겠어.”
나도 아직 맨살로는 만져 본 적 없는 나현수의복근! 저 여자가 감히 나보다 먼저 그것을 만지고 있었다. 나는 저 여자에게 어떻게든 한 방을 먹이고 싶어졌다.
통제 하에 간신히 억누르던 힘이 폭발해 버렸다. 나는 그저 힘의 흐름에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자연스레 오른팔을 앞으로 뻗었다. 불길한 검은 빛이 맴도는 붉은 색 기운 덩어리가 내 오른손에 모여들었다.
위험을 감지했는지 장난을 치던 그녀도 뒤로 물러나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앱솔루트 배리어(Absolute Barrier)."
9클래스, 지고한 경지에 들은 자들만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절예가 펼쳐지자 주변의 마나가 소용돌이치더니 그녀의 몸을 반투명한 막으로 감쌌다.
나는 마법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지만 뭔가 되게 굉장해 보였기에 살짝 긴장을 하고 있었다.
‘무슨 힘인지는 몰라도 지금 내 손에 모인 에너지는 주변의 공기가 떨릴 정도잖아? 내가 이길 수도 있는 거지.’
나는 오른손에 모인 에너지 덩어리를 내 눈 앞의 보호막을 향해 발사했다.
쨍그랑-
단번에 깨져버린 보호막을 뚫어버린 내 공격은 그대로 그녀의 몸을 강타했다.
“크윽... 쿨럭... 쿨럭...”
그녀가 정신을 잃은 틈에 나는 재빨리나현수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크흑... 내 위대한 용언 마법을 쓰게 만들다니... 드래곤을 상대로 용언을 이끌어 내는 건 최고의 명예지. 각오해라!”
자칭 드래곤의 입에서 인지의 영역을 초월한 언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진 나는 안전부절하며 떨고 있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네. 한채린은 왜 여기 있고 저 용가리는 왜 그 한채린한테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거야. 저거 드래곤이 아니라 도마뱀이네, 도마뱀.”
빠직하는 소리와 함께 드래곤의 이마에 힘줄이 솟아났다. 매우 빡쳤는지 드래곤이 정체불명의 언어를 읊조리던 것을 이어나가지도 못할 정도인 것 같았다.
“도마뱀? 지금 이몸에게 도마뱀이라고 한 것이냐? 감히!”
길길이 날뛰는 드래곤을 뒤로 하고 나현수가 내게 무언가를 속삭여 왔다.
“야, 너 아까 그거 쏜 거 어떻게 한 거야? 그런 힘 더 못 써?”
나는 곰곰이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 봤다. 문득 이상한 점이 생각났다.
“이상하게도 내가 한 방 먹이고 싶다고 생각 하니까 진짜 그 힘이 한 방 먹여주더라고.”
“그럼 혹시 네가 바라는 대로 네 힘이 알아서 움직이는 거 아닐까?”
그럴싸한 나현수의 생각에 나는 ‘이 밀실에서 나가고 싶어.‘라고 생각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예의 그 붉은 기운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오, 되는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도심의 한복판에 놓여졌다. 아무래도 나현수를 놔두고 온 것 같았다.
*
“어우 쉣. 판단력 오지네. 딸피 되니까 나 버리고 바로 빼는 것 보소.”
게임 얘기였으면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현실이었다. 저 풀피 드래곤은 나를 보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야! 어디 갔어, 그 년! 감히 이 몸에게 상처를 입히고 도망가? 내가 어떻게든 찾아낼 것이다!”
저 자존심 덩어리는 다행히도 나보다는 한채린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어떡하지? 그냥 미친 척하고 확 들이받아?’
고민을 하던 그때 내 몸을 한채린이 사용하던 붉은 기운이 감싸기 시작했다.
‘오오, 역시 나도 데려가 주는구나. 한채린이 아무리 밉긴 해도 지금은 목숨이 걸린 일인데 뭐. 고맙다, 한채린.’
살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세상과 타협을 할 수 있는 약간은 비굴한 남자, 그게 나였다.
“잘 있어라, 멍청한 도마뱀아! 난 이만 간다!”
내가 열심히 손을 흔들자 길길이 날뛰던 엘레노어가 내 쪽을 쳐다봤다.
“안 돼! 네가 가면 설아가-”
“내가 없어져 볼게, 하나 둘 셋 얍!”
이윽고 붉은 기운이 완전히 내 몸을 감쌌다.
“...? 좆 됐네, 씨발.”
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나는 절규하던 엘레노어와 눈이 마주쳤다.
“하하, 안녕? 나 얌전히 있을 테니까-”
씨알도 안 먹히는 개소리였다. 엘레노어가 나를 향해 흉신악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다행히도 그녀가 내 멱살을 쥐기 직전에 내 몸은 한채린의 앞으로 전이되었다.
“서버 렉 오지네. 이것이 핑 차이인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자, 이제 얘기를 좀 해볼까? 네가 왜 이 세계에 왔는지부터 말해봐. 어차피 우리가 반가운 사이는 아니잖아?”
“얘기? 해야지. 이 세계는 너 찾아 온 거야. 반가운 사이는 아니지, 사랑하는 사이지!”
대화가 뭔가 어긋난 것 같았다.
“나를 어떻게 찾아왔는데? 그리고, ‘사랑하는‘이 아니라 ’사랑했던’ 사이겠지.”
한채린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현수는 나 사랑 안 해? 날 사랑하지 않는 현수 따위 필요 없-”
씨발, 아직 나이스한 보트에 타기에는 내가 즐겨야 할 하렘 라이프가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아직 한채린의 상황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은 지금 이 위기(?)를 넘기는 것이 급선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