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지구에서도 NTL은 이어진다(4)
“자, 여기가 우리 새 집이다!”
한국헌터아카데미에서 가까운 곳에 집을 얻은 우리는 자취방에서 간단한 물건들 몇 가지를 가볍게 챙겨들은 채로 새로운 집을 쳐다봤다.
“현수님, 이 세계 기준으로는 꽤나 큰 집 아닙니까? 돈도 별로 없으실 텐데...”
아이리스가 살짝 걱정되는 목소리로 물어봤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가 큰 집을 사려고 했는데 너무 비싸기에 그 사채업자를 다시 찾아가 돈을 달라고 했더니 걔가 내 사정을 대충듣고는 돈 대신 그냥 이 집을 선물로 주겠다고 해서 넙죽 받아왔어.”
나중에 자신의 부탁 하나를 들어달라는 김영만의 말은 쏙 빼고 내가 전하고 싶은 말만 전한 나는 그대로 집 안을 향해 걸어갔다.
“우와, 여기 집 좋네. 앞으로 여자도 많아질 텐데 방도 많으니 정말 좋-”
싸늘한 레이첼과 아이리스의 시선에 입을 닫은 나는 능청스레 방 하나로 들어가 내 방임을 선언하고는 침대에 드러누웠다.
*
자신들의 방이 있음에도 기어코 내 방으로 기어들어와 밤새 열심히 섹스를 즐긴 우리는 내 의견에 따라 백화점에 가기로 했다.
“이 세상 여자들은 백화점이면 환장을 하는데 너희들은 반응이왜 이렇게 미지근하냐...”
기뻐할 줄 알았던 그녀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시큰둥하자 나는 살짝 가슴을 졸이며 물어봤다.
“원래 입던 옷들이 훨씬 나아서 그렇답니다. 최고의 원단으로 최고의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열심히 만든 옷이 원래 최고랍니다.”
“예쁜 옷들은 꽤나 많은데요, 아무래도 저는 원래 옷에 관심이 없다 보니... 암살자는 활동하기 편한 옷이 최고거든요...”
각기 다른 이유로 백화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녀들을 데리고 식당가로 데려가자 그녀들의 표정이 훨씬 밝아졌다.
일단 한국에 왔으니 한식을 체험시켜 줘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그녀들을 데리고 사람이 바글바글한 비빔밥집으로 데려갔다.
“오, 저기 딱 한 테이블 남았네.”
두리번거리다가 빈 테이블을 발견한 우리는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저기요, 거기 제 자린데요. 잠시 화장실 갔다 온 거예요. 의자에 제 가방 있는 거 안 보이세요?”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낀 수상한 여인이 자신이 테이블의 주인이라고 말하자 우리는 그냥 물러나려고 했다.
“저 혼잔데. 혼자 밥 먹기도 적적하고, 괜찮으시다면 합석하실래요?”
그녀의 제안에 나는 레이첼과 아이리스를 쳐다보았다. 아이리스는 합석에 동의하는 것처럼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레이첼은 뭔가 마뜩찮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배고픈데 그냥 같이 먹자.”
내 설득에 레이첼은 바로 수긍의 의미로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따라 앉은 우리는 종업원을 불러 돌솥비빔밥 3개를 주문했다.
*
나는 분명히 보았다. 저 여자가 마나를 이용해서 가방을 자신의 손에서 의자로 옮겼다. 저 여자에게서 파악되는 마나의 양으로 보았을 때 적어도 소드 익스퍼트 중에서도 완숙한 경지의 강자일 것이다.
작은 기사단에서는 기사단장까지 맡을 수 있을 정도의 훌륭한 인재가 어째서 같이 합석을 하려고 조잡한 속임수까지 썼는지 나는 궁금해져서 테이블에 앉기로 했다.
원래 아는 사이도 아니었기에 테이블의 분위기는 꽤나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와 아이리스와 나현수는 그저 조용히 밥 먹고 어디를 갈지 의논하며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주문했던 돌솥비빔밥이 나왔다. 원래 세상에 있을 때도 쌀을 이용한 요리는 꽤 있었기에 거부감은 별로 들지 않았다. 나현수가 먹는 모습을 따라 나도 나물들과 고추장을 비빈 후 크게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 정말 맛있네요.”
감탄이 절로 나오는 맛이었다. 고추장이라는 양념이 매콤달콤 하면서도 소고기의 고소함을담고 있어 입에 착착 달라붙는 것만 같은 환상적인 맛을 냈다.
아이리스 역시 꽤나 놀란 표정을 지으며 비빔밥을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결국 마지막 밥알 한 톨까지 싹싹 긁어먹은 나는 그제야 비로소 다시금 수상한 여자를 주시할 수 있었다.
그녀는 뭔가 이해가 가지 않는듯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는 비빔밥을 깨작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의 식사가 거의 끝난 것을 보더니 대충 수저를 내려놨다.
“혹시 입맛에 안 맞으세요?”
“아니요. 원래 먹는 양이 좀 적어서요. 이미 배가 부르네요.”
의례적으로 걱정해주는 나현수의 질문에 그 여인은 대충 변명을 지어낸 것 같았다. 그녀의 소매에 묻어있는 샐러드 소스가 아직 덜 말라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분명히 식사를 하다가 모종의 이유로 우리에게 접근하기 위해 후다닥 이 식당으로 달려와 허튼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했다.
“저기... 혹시 세 분은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되게 친해 보이시는데...”
수상한 여자의 질문에 나현수는 퍽 난감하단 표정을 지으며 우물쭈물 대고 있었다. 대체 뭘 망설이고 있단 말인가? 나현수의 모습이 답답해서 내가 대신 대답해 주었다.
“저희 남자친구에요. 곧 남편이 될 사람이기도 하죠.”
수상한 여인의 얼굴에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뒤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따라일어난 아이리스와 나현수의 손목을 붙잡고 나는 계산대로 향했다. 뒤에서 그 수상한 여인이 우리를 붙잡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깔끔하게 무시해 주었다.
“총 3만 6천원입니다.”
나현수가 결제를 마치자 우리는 바로 가게를 떠났다. 뒤에서 수상한 여인이 재빨리 우리를 뒤쫓으려 했지만 점원이 계산을 요구하며 그녀를 붙잡았고 우리는 그 틈에 가게에서 멀어졌다.
*
나는 뭔가 서두르는 레이첼의 행동에 의문을 느끼고 있었지만 이유가 있는 행동일 거라 믿고 그녀의 의견에 따라 주었다.
“레이첼, 무슨 일인데?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야?”
레이첼의 발걸음이 느려지자 나는 그녀에게 물어봤다. 아이리스 역시도 궁금한 표정으로 레이첼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까 합석했던 그 여자는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강자에요. 지구에 강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몰라도 그런 강자가 아무 이유도 없이 우리랑 합석하고 마나 탐지 술식을 전개해서 우리 마나의 총량을 파악하려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대충 합숙했던 여인이 뭔가 개수작을 부리려고 했던 것 같았다. 아이리스도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레이첼의 말을 믿기로 한 나는 그녀에게 내 궁금증을 물어봤다.
“소드 익스퍼트면 얼마나 강한 거야? 그 여자는 지금의 너하고 비교하면 얼마나 강한 사람이었는데?”
“소드 익스퍼트면 어지간한 기사단에서는 기사단장을 맡을 정도에요. 그 여자는 소드 익스퍼트 중에서도 최상급이었으니까 불완전한 오러 소드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일 거예요. 아마 깨달음만 얻으면 환골탈태를 통해 소드 마스터가 되겠죠. 제가 소드 마스터의 벽을 깬 것이 2년 전이었으니 대충 2년 전의 제 경지와 동일하다고 보면 될 거예요.”
그녀의 상태창을 확인한 나로서는 매우 놀랄 수밖에 없었다.
‘레이첼보다 한 단계 아래의 강자라... 적어도 S급 헌터를 말하는 건가? 대한민국의 여자 S급 헌터라면 단 한명 뿐인데... 그녀가 레이첼의 강함이라도 알아본 걸까?’
세계 랭킹 1위, 이시연. TV 속으로 보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자 내 자지가 발기해 버렸다.
‘언젠간 먹고 말거야.’
입맛을 다시며 훌륭한 목표를 다짐한 나는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을 뒤로 한 채 불룩 튀어나온 내 우람한 자지 때문에 어정쩡한 자세로 천천히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
백화점 고급 레스토랑에서 여유롭게 식사를 즐기던 이시연은 나현수 때문에 순간 흥분해 버려서 레이첼이 실수로 짧게나마 내뿜은 마나의 파동을 느끼고 급히 그 근원을 찾고 있던 것이었다.
레이첼에게 가까이 갈수록 익숙한 마나 파동이 느껴져 이시연은 그녀를 시험해 보기 위해 마나로 싸이코키네시스를 살짝 운용해 가방을 그녀가 향하던 테이블로 움직였다.
‘분명 이 여자야. 가까이 갔을 때 느꼈던 그 마나의 파동은 분명 정체불명의 SS급과 동일했어.’
애석하게도 레이첼은 알면서도 모른 척을 했고 이시연은 이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자신이 실수로 사람을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하, 이렇게 SS급을 놓치고 마는 건가...’
식사를 마친 이시연은 실의에 빠진 채 서치 마법을 운용해 다시 의문의 SS급을 찾아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마나의 움직임은 벽에 막힌 듯 레이첼에 의해 가로막혀버렸다.
‘......!! 이 여자가 SS급이 확실해!’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순간 이시연은 저 멀리 도망가는 SS급을 붙잡기 위해 재빨리 뒤쫓아 가려고 했다.
“손님, 계산은 하고 가셔야죠.”
뜻밖의 난관에 봉착한 나는 서둘러 계산을 끝마쳤지만 안타깝게도 SS급을 놓쳐버렸다.
‘어떻게든 찾아야 해. SS급이 되는 방법을 어떻게든 알아내겠어.’
이시연의 두 눈이 집착으로 물들었다.
*
백화점 카페에 앉아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눈 우리는 자취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순도순 걸어가던 와중에 레이첼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어색한 연기를 펼쳤다.
“우... 우와! 성인용품점? 저기는 뭐하는 곳일까나? 정말 궁금하다. 하하하...”
애초에 레이첼의 핸드폰 검색기록이 성인용품들로 도배되어 있는 것을 본 나는 한숨이 절로 나오는 그녀의 발연기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아이리스는 정말로 성인용품점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저 내가 레이첼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자고 하자 천진난만한 미소를 유지할 뿐이었다.
“어서 오세요! 어머 예쁜 여자 분들이시네! 이 언니가 잘 알려줄게요. 여기 이 제품은...”
들어가자마자 우리를 반겨준 여자 직원이 열심히 다양한 제품을 홍보했다. 레이첼은 흥미롭다는 듯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들었고 아이리스는 그저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괜히 어색해서 주변을 둘러보나 보네. 부끄러울 만도 하지. 레이첼이 물건 몇 개 살 동안 내가 아이리스 곁에서 말동무나 해줘야겠다.’
결심을 하며 아이리스에게 다가가던 그때 아이리스의 표정이 환해지더니 종종걸음으로 뛰어가 수갑과 채찍을 집었다. 나는 순간 멍해져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물건들을 한 아름 품에 안은 아이리스는 점원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다시금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뛰어간 곳에는 남성용 정조대가 위치했다.
‘좆 됐네. 저건 어떻게든 못 사게 해야지.’
창백해진 내 얼굴을 간신히 돌려 레이첼을 쳐다봤다. 레이첼은 그나마 평범한(?) 애널 비즈와 로터를 들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은근슬쩍 평소에 궁금했던 오나홀들을 구경했다. 샘플에 손가락도 살짝 넣어봤지만 아무래도 진짜 보지랑 섹스하는 게 훨씬 기분이 좋을 것 같았기에 금방 흥미를 잃었다.
여러 코스튬들과 함께 그녀들이 구매할 물건들을 전부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나는 계산을 하는 척하며 은근슬쩍 남성용 정조대를 계산대 밑으로 떨어뜨렸다.
괜스레 찔려서 아이리스의 표정을 힐끔 쳐다보니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가소롭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또 다른 남성용 정조대가 들려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지었고 다행히도 그녀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정조대를 내려놓았다.
*
“백화점보다 성인용품점이 훨씬 재밌네요. 종종 들려서 재미난 물건들을 사가도록 하죠.”
“좋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다음번에는 꼭 현수님을 위한 정조대를 꼭 구매해야겠습니다. 정조대를 안 차고 계시면 함부로 좆을 놀리고 다니시다가 언젠가 현수님의 자지가 싹둑하고 잘릴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다시는 성인용품점에 아이리스를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그녀들이 사온 물건들을 찬찬히 훑어봤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평소보다 매우 재밌을 것 같았다.
‘내가 S나 M은 아니지만 호기심은 있으니까 채찍도 살짝 써서 레이첼 엉덩이를 찰싹 해줄까? 흐흐흐, 기대 되는구먼.’
내 기대가 박살나기 전까지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
“장난하는 거지? 나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 좀 풀어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려던 순간 아이리스의 기습적인 슬립(Sleep) 마법에 당해버린 나는 순식간에 잠이 들어버렸다.
눈을 떠보니 나는 의자에 꽁꽁 묶여있었고 레이첼과 아이리스는 성인용품점에서 사온 도구들을 내 앞에 가지런히 늘어놓고 있었다.
좆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