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지구에서도 NTL은 이어진다(1)
지구로 돌아온 나는 레이첼과 아이리스를 데리고 내가 살던 조그만 자취방으로 향했다. 낮이밤져> 세계에서 8일을 있었는데 지구에서는 8시간이 지나있었다.
지나갈 때마다 그녀들의 아름다운 미모에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쳐다봤지만 정작 본인들은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주위를 신기하듯이 둘러볼 뿐이었다.
남자란 허세의 동물이 아니었던가. 나도 레이첼과 아이리스한테 커다란 집과 멋있는 스포츠카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아카데미 등록금도 못 내 하루하루 아르바이트를 전전긍긍 이어나가면서 돈을 벌던 나로서는 사치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내 자취방 앞에 도착하자 한숨과 함께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으리으리한 왕궁에서 살다가 나 때문에 이런 초라한 곳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하니 마음이 아파왔다. 내 근심어린 표정을 본 아이리스와 레이첼은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저, 내가 사실 고아거든. 어려서부터 겨우겨우 돈을 벌면서 살아서 사정이 넉넉지가 못해. 내가 책임지겠다고 너희들을 데려왔는데... 정말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네.”
의외로 조금은 실망할 줄 알았던 아이리스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앞으로 많이 벌면 될 것이라며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나를 격려해 주었고, 나를 쓰레기라고 매도할 줄 알았던 레이첼은 안되면 죽여서라도 재산을 훔쳐오면 된다는 섬뜩한 소리를 지껄였다.
기분이 좀 나아진 나는 그녀들에게 밖에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한 후 자취방에 들어가 급히 청소를 시작했다. 수많은 냄새나는 휴지들과 약간 불건전한 책들을 치운 나는 그녀들을 방 안으로 들였다.
“자, 오늘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지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얘기를 해보자. 일단 집은 내가 대출을 받아서라도 하나 구할 테니까 너희들은 이 세계에 적응하는 것부터 최우선으로 생각해.”
침대 위에서 꽉 껴붙은 채로 우리는 밤이 깊어질 때까지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는 동이 틀 때까지 몸의 대화를 나눴다.
*
여러 얘기들을 나눠본 결과 1차적으로는 집을 구하고 3명이 함께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방향으로 정해졌다. 아카데미는 나 같은 성적우수자 말고도 능력이 뛰어난 이들을 특별모집전형을 통해 항시 모집 중이었기 때문에 입학 자체가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문제는 돈이랑 신원 확인인가. 그냥 최면 포스트잇(SSS)을 확 써버려? SSS급 아이템이니까 저번에 만났던 한유현한테 확 써버리면 적당할 것 같은데.’
뭔가 물질적인 이유 때문에 최면 포스트잇을 쓰기는 조금 아까웠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참신한 암캐를 만들 수 있는 고성능 아이템을 돈에 쓰는 건 낭비 같았다.
돈에 대해 고민하던 나는 저번에 빌어먹을 한채린이 아카데미 등록금으로 쓰라고 던져주고 간 돈 봉투가 떠올랐다.
“일단 그 년이 돈 준은 다시 돌려줘야지. 나중에 결혼식 날을 노려서 범해주마. 결혼식 날 공개적으로 따먹어 암캐로 만들면 되겠어.”
복수심으로 이글거리는 두 눈과 함께 나는 잠들어 있는 아이리스와 레이첼에게 잠시 나갔다 올 테니 얌전히 기다리라는 메모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
*
‘제길, 뭔 놈의 부잣집 딸은 만나기도 쉽지가 않냐.‘
전화를 해보아도 문자를 해보아도 모두 씹힌 나는 평소 한채린의 루틴을 떠올려 그녀가 있을 법한 곳에 가서 대기를 탔지만 경호원들이 나를 제지했다.
멀리서 한채린의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다. 그녀를 보자 내 심장이 약간 욱신거렸다.
“이봐요, 경호원 아저씨. 그러면 이 돈 봉투만 전해줘요. 나도 마음 같아서는 직접 만나서 쌍욕 내뱉고 이걸 확 얼굴에다가 집어던지고 싶긴 하지만 내가 워낙 바빠서 저딴 년한테 시간 낭비하기는 아깝네요.”
경호원이 충심으로 가득해 나를 한 대 패기라도 할까봐 조금 무서웠지만 다행히도 경호원은 얌전히 돈 봉투를 받아들고 안에 위험한 물건이 있는지 살펴봤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다시 자취방으로 향했다.
*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들고 자취방에 들어간 나는 내 흑역사가 가득한 내 졸업앨범을 쳐다보고 있는 레이첼과 아이리스를 발견하고는 급히 뛰어가 책을 덮어버렸다.
아이리스와 레이첼이 풋하고 귀엽다는 듯이 웃음을 내뱉고는 새로운 책을 꺼냈다. 커피 이름과 똑같은 그 책은 내가 어제 방을 정리하며 숨겨두었던 책이었다.
“그 책은 너희들이 볼 책이 아니야. 이리 줘.”
나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그녀들을 압박해 보았지만 그녀들을 그저 흥미롭다는 듯이 계속해서 책을 구경했다.
자포자기 해버린 나는 그냥 컵라면이나 끓였다. 맛있는 냄새에 흥미가 동한 레이첼과 아이리스가 내게 달라붙어 이 음식은 뭐냐면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물어봤다.
“너희들의 세계에 마법과 연금술이 있다면 지구에는 과학이 있지. 과학 발전의 궁극 집합체이자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인 컵라면이라고 하지.”
대충 거추장스러운 소개를 해서 정말 훌륭한 음식인 양 그녀들을 놀려보려고 시도했지만 그녀들은 속지 않았다. 돈이 없는 가난한 처지에 놓인 내가 사온 음식이면 분명 서민들이 먹는 싼 음식일 거라고 결론지은 그녀들은 자신의 앞에 놓인 컵라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젓가락은 처음이겠구나. 이렇게 잡는 거야.”
내가 젓가락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자 그녀들은 곧잘 따라했고 우리는 즐거운 식사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
“현수님, 아까 그 컵라면이라는 음식은 맛이 꽤나 훌륭했습니다. 집에 갈 때 몇 개 더 사가심이 어떠하십니까?”
“맞아, 아까 그거 엄청 맛있던데요? 뭐랄까 원래 저희 세상에는 없던 종류의 자극적인 맛이랄까?”
MSG의 맛에 길들여 져버린 그녀들의 집착은 내 자지의 맛에 길들여졌을 때보다 심해 보였다. 마치 천상의 맛을 음미하듯 군침을 가시며 내게 라면을 사달라고 요구하는 그녀의 모습에 내 자지는 의문의 1패를 경험했다.
조금은 슬퍼진 나는 터벅터벅 걸어가며 그녀들에게 말했다.
“일단 라면을 사든 핸드폰을 사든 집을 사든 물질만능주의인 우리 세상에서는 돈이 필요하다니까.”
내 염세적인 발언에 그녀들은 그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돈이 중요하긴 하지만 지킬 무력이 없으면 쓸모가 없는 것 아닙니까?”
“맞아요, 돈은 그냥 뺏으면 그만이잖아요.”
나는 그녀들을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직 이 법치주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귀여운 여인들에게 한국의 사회가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명해 주었다.
‘뭔가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 같은 모습인데 별로 상관없겠지?“
*
“우리 평화적으로 해결하자. 응?”
사채업자를 자신의 발로 밟으면서 하찮다는 듯이 내려다보는 레이첼과 뭐가 그리 좋은지 나를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칭찬해 달라고 머리를 내게 내미는 아이리스.
이마를 짚은 채로 한숨을 깊게 내쉬며 아이리스의 이마에 딱밤을 날리자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 나를 원망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내가 어제 설명했지. 법이 중요하다니까. 이렇게 함부로 협박하고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똑똑한 레이첼은 내 말뜻을 이해할 수 있겠지?”
명석한 레이첼은 애석하게도 내가 바라는 모법답안의 정반대로 매우 훌륭한 오답을 보여주었다.
“살인멸구. 역시 이게 제일 깔끔하지. 법이 중요하니까 걸리면 안 된다는 거잖아?”
자신의 정답을 확신하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골치가 아팠다. 그때, 사채업자가 엉엉 울며 빌기 시작했다.
“돈 드릴게요! 신고도 안할게요!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집에 여우같은 아내와 토끼같은 딸들이 저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요. 뭐든지 할 테니 살려만 주세요!”
안쓰러운 사채업자의 모습에 칼을 목에 들이민 채로 내게 허락을 구하는 레이첼의 모습에 나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나는 이 정신 나간 범죄에 동참하기로 결정했다.
“일단 저 새끼 좀 의자에 앉혀봐. 우리가 원하는 건 일단 돈뿐이잖아?”
마뜩찮은 표정으로 사채업자를 일으켜 의자에 앉게 한 레이첼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안겨왔다.
“20억. 갚아는 줄게. 1년 내로 원금상환. 1억은 보너스로 줄게.”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후한 제안인지 표정이 밝아진 사채업자는 바로 계약서를 가져와 내용들을 작성했다.
계약서를 꼼꼼히 읽은 나는 싸인을 하면서 그에게 조용히 언질을 주었다.
“신고는 할 테면 해봐, S급 헌터가 와도 우리를 잡지 못하거든.”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 치는 사채업자의 모습에 나는 그자가 우리를 신고할지 안할지 모르겠어서 살짝 불안했다. 최대한 담담한 척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근면성실한 모범시민인 나로서는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참담함이 내 온몸을 휩쓸고 있었다.
“아, 그리고 불법 신분증 같은 거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아나?”
“저희 쪽에서도 유통을 하고 있습니다. 던전 내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위조 신분은 요즘 구하기 쉬운 편입니다.”
“그럼 내 뒤에 있는 여자 걸로 2개 준비해 줘. 혹시 이름도 내가 원하는 걸로 할 수 있나?”
“여기 목록에 있는 이름들 중 고르시면 됩니다. 생년월일이 얼추 맞아야 할 테니 그 부분도 고려하셔야 합니다.”
내게 종이 뭉치를 넘긴 사채업자는 공손한 자세로 내가 이름을 고르기를 기다렸다. 이름을 고른 나는 먼저 아이리스와 레이첼한테 의견을 물어봤다.
“일단 아이리스는 여기 영국 25살 여자애 ‘아이리스 캠벨’. 그리고 레이첼은 여기 미국 20살 여자애 ‘레이첼 하스웰’. 괜찮지?”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들의 모습에 나는 사채업자에게 물어봤다.
“2개다 해서 얼마지?”
“10억입니다. 원래 20억인데 제가 할인해드리겠습니다.”
“싸다며? 이게 대체 뭐가 싼 거야?”
이해할 수 없다는 내 표정을 바라보며 사채업자가 다시금 그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공짜로 해드리겠습니다. 제 신의의 증표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신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십시오, 김영만입니다.”
사채업자의 호의를 거절하기에는 10억이 너무나도 큰 돈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레이첼과 아이리스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레이첼에게 한 대만에 떨어져 나간 자신의 경호원, 이철우는 A급 헌터 중에서도 최상위를 다투는 실력자였다.
뒷골목을 지배하는 사채업자, 김영만은 방금 자리를 떠난 일행을 떠올리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급 용사는 낮이밤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