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SSS급 용사는 낮이밤져(3)
한진과 아서스가 한창 수다를 떨고 있던 집무실에 한 병사가 매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들어왔다.
“여기 계셨군요. 웬 이상한 사내 한 명이 문 앞에서 용사님을 꼭 만나야 한다며 행패를 부리고 있습니다. 자신을 ‘지구에서 소환된 나현수’라고 전하면 용사님이 아실 거라고 하던데 혹시 지인이십니까?”
지구. 이 얼마나 오랜만에 듣는 단어인가. 애초에 나는 지구에 대한 이야기를 아이리스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다.
그렇다는 것은 필시 문 앞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다는 남자는 자신처럼 지구에서 소환된 이겠지. 이름을 보고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유추한 것이리라.
신이 용사를 소환하는 데에는 반드시 중요한 이유가 있을 터, 자신이 죽인 마왕이 부활이라도 한 것인가?
세계의 위기가 도래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미약하게나마 일었지만 이내 섣부른 걱정을 하기 전에 일단은 그 남자를 만나서 상황을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그 남자를 응접실로 불렀다.
*
대충 지구에서의 내 삶을 간단히 설명한 후 최한진과 지구에 대한 여러 얘기들을 나누며 나는 그와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라고 해서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그는 내가 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들을 하나둘씩 알려줬고, 공략 스킬 치트가 있는 나는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어차피 궁금하면 공략 치트 스킬 쓰면 되는데 뭐 하러 귀찮게 저런 것들을 다 외워?’
별로 영양가 없는 대화가 계속된 지도 두 시간째, 나는 내 거취에 대한 얘기가 나오길 바라며 꾸준히 순수한 대한민국 청년을 연기했다.
“서울헌터아카데미 수능우수자 전형은 전국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애들 몇 명만 뽑히는 전형 아니냐. 대단하네. 지금 여기서 머물 곳은 있니?”
‘이제야 말을 꺼내내, 쓸데없는 수다에 어울려주느라 짜증나 뒤지는 줄 알았어. 어휴, 꼰대 새끼.‘
“지금은 왕궁 앞에 있는 작은 여관에서 머물고 있어요. 제가 기억을 잃었다고 하니까 여관 주인이 절 불쌍하게 여기셨는지 절 직원으로 고용해주셔서... 지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어서 다행히도 청소랑 설거지가 별로 힘들지는 않더라고요.”
“힘들었겠네. 넌 모른다고 하지만 분명히 신이 널 소환한 데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을 거야. 이런 중요한 인재를 함부로 놔둘 수는 없지, 나랑 왕궁으로 가면 훨씬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속마음과 달리 나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힘차게 대답했다.
“왕궁이요?! 정말 제가 가도 괜찮은 건가요? 여기 세상에는 신분 차별 그런 거 되게 심하지 않아요? 저는 형처럼 위대한 용사도 아니고 재수 없이 지구에서 소환당한 별 볼 일 없는 평민으로 보일텐데...”
비 맞은 강아지마냥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움츠리자 최한진은 손사래를 치며 급히 대답하며 나를 일으켰다.
“아냐! 내 말 한마디면 네가 왕궁에서 평생 놀고먹는다고 해도 아무도 반대 못할 걸? 그리고 분명히 신이 널 소환한 데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을 거라니까? 현수, 넌 아주 위대한 사람이 될 거야, 자신감을 가져!”
‘신? 신이 있다면 내가 여기 소환된 이유는 분명 네 여자를 발정난 개처럼 따먹기 위해서겠지.’
속으로 조소를 머금은 나는 그의 격려에도 별로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그의 손에 얌전히 끌려 왕궁으로 가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후후, 기다려라 육변기들! 내가 왕궁으로 간다!’
*
“나는 잠시 아이리스 좀 만나고 올게. 여기가 네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쉬고 있어. 필요한 거 있으면 저기 줄 당기면 시종 오니까 시종한테 부탁하고.”
내가 고개를 끄덕인 모습을 보고 그는 곧장 방을 나섰다. 나는 침대에 누워 주위를 둘러보며 앞으로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레이첼을 따먹을 계획은 대충 그려지는 것 같네. 나도 레벨업 해서 스탯이 좀 높았으면 이런 쓸데없는 고민 안 하고 먼치킨처럼 힘으로 찍어 누르는면서 다 따먹고 다니는 건데. 언젠가는 그렇게 할 수 있겠지? 어우, 목말라.저걸 잡아당기면 시종이 온다고 했지?’
줄을 잡아당기자 시종 한 명이 들어왔다. 뜻밖의 익숙한 얼굴에 나는 비릿한 실소를 머금었다.
‘운이 좋네. 마음껏 따먹으라는 신의 배려인가? 저 폭유에다가 자지를 끼우고 허리를 흔들면 기분이 존나 좋겠지?’
레이첼, 본명은 세피아 클라인, 터질듯한 몸매의 그녀를 보고 있자니 군침이 싹 돌았다.
*
‘우선 왕궁 경비 수준부터 알아볼까요? 적당히 목표를 한 명 골라 실험을 해봐야겠어요. 안 그래도 왕실 시종으로 이번에 같이들어온 새끼가 계속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 불쾌했는데 그 새끼를 죽여야겠네요.’
전대 클라인 공작을 죽였던 작은 소녀는 어느새 암살자 길드 최고의 특급 암살자가 되어 있었다.
세피아는 오래 전 도망치던 자신을 숨겨주었던 암살자 길드장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암살자로써 충실하게 명령을 이행해 왔으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후로는 더러운 과거를 청산하고 그와 함께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졌다.
‘이번 일만 끝내면 길드장이 제 과거를 깨끗하게 정리해 주기로 했으니 전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고요. 상대가 상대인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하고 완벽해야 하겠지만요.’
그녀의 이번 암살 대상인 이사벨 아이리스는 무려9서클의 대마법사이자 한 나라의 여왕이었다.
하지만 엄청난 위력의 마법들은 일반적으로 캐스팅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마법사는 정면 대결에서 거의 힘을 쓰지 못했다. 그렇기에 세피아는 아이리스와의 전투를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세피아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세계 최강의 존재인 용사가 아이리스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용사는 분명 여왕이 죽는다면 흉수를 찾기 위해 미쳐 날뛸 게 분명해요. 아주 사소한 흔적이라도 남기는 날에는...’
용사의 분노를 상상한 그녀는 두려움에침을 삼켰다. ‘아마 곱게 죽지는 못하겠지-’라고 생각하며 피식 미소를 짓는 순간 띠리링하고 벽에 걸려 있는 종이 울렸다.
그녀가 왕실 시종으로써 맡은 역할은 여왕의 남편이 될 분을 모시는 개인 시종, 즉 용사의 개인 시종이었다.
저 종소리는 왕궁으로 돌아온 용사가 시킬 일이있어 자신을 부르는 것임이 분명했다.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는 순간 마치 사형 선고를 받는 것만 같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녀는 애써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신경이 예민해서 그런 것이라 치부하며 간단히 넘겨버리고는 용사의 방으로 걸어갔다.
*
‘왕실 시종 면접에서 떨어진 남자가 왜 용사의 방에 있는 걸까요?’
예상 밖의 인물을 마주한 그녀는 살짝 놀랐지만 특급 암살자답게 순식간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암살자 길드에서 조사한 용사의 주변 인물 목록에는 저런 남자가 없었는데요. 나이를 보아하니 용사보다는 젊은 것 같고... 그러고 보니 한때 용사가 비밀리에 제자를 키운다는 소문이 돌아다녔죠. 설마 정말로 숨겨둔 제자가 실존했던 것일까요? 그런 것 치고는 기세가 너무 볼품없는데요.’
남자의 입이 열리길 기다리며 여러 가능성들을 추측해 보며 정보를 수집하던 그녀는 이내 노골적인 시선에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절 바라보는 눈이 음습한 욕망으로 흘러넘치네요. 쓰레기 같은 남자임이 분명해요. 정의로운 용사와 비열한 쓰레기라, 정말로 안 어울리는 조합이네요.’
“목이 마른데 물 좀 갖다 줄 수 있나?”
“오늘은 날씨가 더우니 냉수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대답을 하고 뒤돌아 방을 나간 그녀는 뒤에서 느껴졌던 불쾌한 시선에 몸서리를 쳤다.
*
“아이리스, 당신은 언제나 아름다워.”
“용사님은 언제나 멋있어요.”
“대체 어떤 드레스기에 그렇게 꽁꽁 숨기고 나한테는 절대 보여주지도 않는 거야? 난 결혼식까지 도저히 못 기다리겠어. 살짝 귀띔이라도 해주면 안 될까?”
“제가 오직 용사님만을 생각하며 만든 특제 드레스에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그 누가 봐도 엄청 매력적일 테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더더욱 궁금한걸! 이렇게 하면 알려주려나?”
최한진은 자신의 손가락을 바삐 놀려 아이리스의 옆구리를 공략했다. 꺄르르 웃으며 얼굴이 새빨개진 아이리스는 이내 숨을 가쁘게 내쉬며 삐진 표정을 하고 최한진을 노려봤다.
“제가 간지럼 태우는 건 싫다고 했죠!”
“삐진 아이리스가 너무 귀여운 걸 어떡해.”
“흐... 흥! 아무리 그래도 싫은 건 싫다고요!”
아이리스는 짐짓 삐진 척을 하며 최한진의 품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었다. 최한진은 자연스레 아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맞다, 내가 전에 내가 원래 살던 지구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 해줬었지? 오늘 지구에서 소환된 또 다른 사람을 발견했어.”
최한진은 자신이 들은 나현수의 이야기들을 아이리스에게 들려주었다.
“지금 내 방에서 쉬고있는데 같이 보러 갈래? 예의 바른 착한 청년이더라고.”
“시간이 꽤나 늦었는데 아마 자고 있지 않을까요? 당신이 지구를 많이 그리워하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도와줄 방법이 없어서 힘들었었는데 그래도 지구에 대해 터놓고 수다를 떨 수있는 사람이 생긴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편해지네요. 나중에 그 분한테 감사의 인사라도 전해야겠어요.”
“하하, 그렇게 티가 났나? 당신도 이만 자러 가야겠네. 내일 아침에 다시 올게.”
아이리스의 이마에 옅은 키스를 남긴 최한진은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모두가 잠에 든 사이, 은밀한 인영 하나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복면을 쓴 괴한은 눈으로 쫓기도 힘들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지만 놀랍게도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마치 전설로만 내려오던 어쌔신 마스터의 재림같았다.
이윽고 남자 시종의 숙소에 도착한 괴한은 창문을 거리낌 없이 열고 들어가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이내 시선이 한 남자에게 고정되었고 괴한은 쏜살같이 움직여 그 남자의 목을 베어냈다. 검의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그 잔영만이 달빛을 받아 하얀실선을 이루어 낼 뿐이었다.
임무를 완수한 괴한은 유유히 자리를 빠져 나가려고 했다, 갑자기 불이 켜지지만 않았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