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17일차
정신이 들자 슬며시 상체를 일으켰다.
주변에는 이미 다들 일어나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깬 것이 나였다.
혼자 잔뜩 받았으니 당연한 거겠지.
내가 일어난 인기척을 느꼈는지 하나 둘 근처로 온다. 부담스러운데 그냥 할 일들 하면 안 되나?
혹시 몰라서 먼저 선수치듯 말했다.
"오늘 게임에 대해서 사과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어? 어."
줄리는 바로 사과하려 했는지 얼떨결에 대답했다.
"앞으로 게임 한 두번 남은 것도 아닌데 하나하나 사과하면 끝도 없어요."
내 말을 들은 마리가 슬쩍 웃으며 내게 가까이 왔다.
"헤헷. 저는요?"
"너도 사과 안해도 돼."
그러자 마리는 엄청 좋아했다. 그렇다고 아까 한 짓을 바로 용서하겠다는 뜻이 아닌데.
그녀에게는 하나씩 천천히 물어봐야 겠다.
"너한테는 물어볼게 많아. 솔직하게 대답해 줄 수 있어?"
"그럼요."
그녀는 즉각 대답했다. 대답을 시원시원하게 해줘서 고맙긴 한데 애초에 나와 대화하기를 바란 것 같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
나와 마리가 대화를 시작하자 다들 슬쩍 비켜줬다. 어차피 같은 방이긴 해도 이런 작은 배려가 고마웠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다.
"앞으로도 게임 할 때 계속 나를 방해할거야?"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저도 1등 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이예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진실성이 있는지 살폈다. 마리는 내 눈을 쳐다보다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너 죽고 나 죽자는 안 해서 다행일까?
그녀가 우물쭈물 대더니 솔직히 말했다.
"아까 말 한 것 처럼 세리아와 같이 있고 싶은게 목적이예요. 미움 받는건 저도 싫어요."
"그럼 그런 말은 왜 한거야?"
솔직히 3라운드 내내 궁금하긴 했다. 그런 이유면 끝까지 숨기는게 이득 아닌가?
"그건 진짜 충동적으로 했어요. 죄송해요! 진짜 상처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진심을 숨기면 세리아에게 더 큰 상처가 될까봐요."
"..."
"제가 세리아였으면 나중에 이런 목적을 들으면 화가 날 것 같아서. 솔직히 다 말해야 겠다는 생각만 났어요. 겁이 나서..."
이게 이유가 되나? 그건 그렇다 쳐도 웃은건 말이 안 된다.
"그러면 왜 웃으면서 말 한 거야?"
"심각하게 말하는 것 보다는 밝게 말하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기분 나쁘셨다면 이것도 죄송해요."
얘가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인지 둘러대는 건지 감이 안 온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바라보자 마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
"마지막에 그 선택을 한건 어쩔 수 없었어요. 처음에 세리아가 혼자 팀 되고 나서 나머지 사람들과 얘기를 했어요. 최소의 벌점을 위해 희생시키자고."
"누가?"
"줄리가요. 아니. 모두가 다 동의 했어요. 줄리 탓은 아니예요."
그녀는 솔직하게 다 말했다. 그래서 줄리가 내게 계속 사과하고 싶어 했구나. 이해가 된다.
"그건 별로 신경 안써. 예전에 나도 너한테 했잖아."
"저도 그건 다 잊어버렸어요. 헤헷."
마리가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말을 덧 붙였다.
"그래도 2라운드에 제가 세리아에게 가겠다고 자원한 것은 사실이예요. 그 쪽도 우리가 이긴 건 예상 밖이었을걸요?"
"그건 얘기된 것이 아니었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첫 단추를 잘못 꿰긴 했지만 노력이 전부 쓸모 없지는 않았다.
그나마 위안이 됐다. 하지만 계속 방해하지 않겠다는 말을 믿어줘야 하나? 믿어주고 싶은데 잘 모르겠다.
하긴. 믿지 않으면 뭐 어떻게 할까. 결국 우리 둘만 파멸할 것이다.
다음으로 궁금했던 것도 바로 물어봤다.
"왜 나야?"
"네? 그야. 제일 예쁘니까요."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내 말을 받아치는데 머리가 더 아파온다. 너무 즉답하는거 아닌가?
"다른 사람들도 생김새로는 별 차이 없잖아."
솔직히 다른 사람들도 다 예쁘게 생겼다. 개조받은 얼굴인데 못생길 수가 있나.
살짝 따지듯 묻는데도 마리는 계속 웃으며 대답했다.
"얼굴 뿐만이 아니예요. 끝까지 노력하는 모습이나 냉정한 척 하는데 모질지 못한 것도 좋아요."
이렇게 대놓고 날 좋다는 사람이 처음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모르겠다.
오히려 내 말문이 막혔다. 생각이 많아지는 대답이다. 이게 진짜로 하는 말인가?
요즘 애들은 다 이렇게 적극적인가 싶기도 하다. 특히 마리가 이렇게 나올 줄이야.
외모가 자존감을 많이 낮추긴 한 모양이다. 이걸 어떻게 받아줘야 상처를 안 받을까.
내가 아무 말 않고 그녀를 바라보자 마리는 이 침묵을 기다려줬다.
"나만 그런게 아니고 여기있는 모두가 노력해. 다들 정도 많고."
"세리아는 몸매도 예쁘고 피아노도 잘 치잖아요. 그런 점도 다 좋아요."
이 징그럽게 큰 가슴이 뭐가 예쁘다는 걸까. 그런데 그녀는 멈출 생각을 않고 내 칭찬을 계속 했다.
"음식 맛있게 잘 먹는 것도 예쁘고, 작은 부분들도 세심하게 걱정해 주는거 다 느꼈어요.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겠어요?"
마리가 싱긋 웃으며 애교부리듯이 말하자 묘하게 두근거렸다. 내용물이 남자인 것을 아는데도 겉이 예쁘면 여자일까?
나도 모르게 살짝 달아오르는 얼굴이 창피하다. 진짜 어이가 없다.
걱정 해주기는 누가 걱정을 해줬다는 걸까. 내 앞길 찾느라 바빴는데.
차라리 그녀가 남자일 때 모습이었다면 단호하게 내쳤을 텐데. 막 20세가 된 여자애처럼 느껴지는게 가장 스트레스다.
이젠 진짜로 예전 모습이 기억 나지 않는다.
게다가 고백처럼 직설적인 말을 계속 쏟아내는데 듣는 입장에서 참 난처하다. 너무 거절하면 상처받을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잘 달래야 얘가 그만 할까.
붉어진 얼굴이 보일까봐 고개를 숙이자 그녀는 내 침대 옆에 앉았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접근에 어쩔 줄 모르겠어서 밀어내지도 못했다. 그러자 마리는 승낙이라고 생각했는지 내 손을 잡았다.
"자. 잠시만."
나는 다급하게 마리를 말렸다. 얘가 진짜 미쳤나? 그래도 말리니까 접근을 멈췄다.
하지만 내 손에 깍지를 꼈다. 보드라운 마리의 손이 느껴졌다.
여태 한 번도 여자를 사귀어 본 적 없는 것 치고는 용기가 많이 생긴 모양인데 부담스럽다.
그 때 멀리 간 줄 알았던 엘리스가 근처로 오더니 말했다.
"마리. 적당히 해. 세리아가 불편해 하잖아."
오히려 엘리스의 얼굴이 더 불편해 보였다. 넌 또 왜 그러냐.
"세리아. 저는 이렇게 좋아하는데 세리아는 어때요? 엘리스가 말한 것 처럼 제가 어린애 같이 보이나요?"
마리는 살짝 다급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표정이 너무 간절해 보여서 얼떨결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환해졌다. 반대로 엘리스는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그쵸? 저도 20살이예요. 어른이 하는 건 다 할 수 있다고요."
마리는 엘리스를 보며 자랑하듯 말했다. 그녀가 작은 가슴을 내미는 걸 보더니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그러자 엘리스가 내게 따지듯 물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말할 때는 거들떠도 안보더니 마리는 편 들어주냐? 내가 그렇게 별로야?"
아니 누가 누굴 거들떠도 안 본다는 건가. 어이가 없어서 그녀의 말을 되받아쳤다.
"나는 누구의 편도 들어 준 적이 없어. 애초에 이런 고민은 1등 발표가 끝나고 하자니까?"
"저는 지금 듣고 싶어요!"
마리가 갑자기 내 팔에 매달렸다. 그녀의 향기가 코에 훅 들어왔다. 순간 넋이 빠지는 기분과 함께 얼어버렸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취기 페널티라도 받았나?
그러자 엘리스도 내 침대 위로 오더니 마리를 내 옆에서 떼어냈다. 그렇게 세게 매달리진 않아서 바로 떨어졌다.
"너 진짜 그만해."
엘리스가 마리에게 단호히 말했다. 마리는 그런 엘리스를 신경도 안 쓰고 나를 바라봤다.
"아직 세리아는 싫다고 안 했잖아요. 왜 엘리스가 보호자인 것 처럼 굴어요?"
"그건..."
엘리스는 마리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짚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한 걸까.
보다 못한 내가 마리에게 한 마디 했다.
"나에게 너무 그런 고백하는 듯한 말들을 하지 말아줘. 아까 말 했듯 1등 발표 전 까지는 생각 없어."
나는 마리에게 달래듯이 말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상처받은 표정이 되었다. 이게 왜?
"그러면 팔짱이나 손 잡는 거라도 하면 안 되나요?"
"꼭 해야겠어?"
그녀의 집착에 점점 지치기 시작했다. 내 말에 마리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다른 말이나 행동은 안 할게요. 팔짱만이라도. 아니 손 잡는 거라도 해주세요. 제발요."
마리가 간절한 표정을 짓자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외모가 무기라는 말이 확실하게 와닿는다. 예쁜 여자가 애원하는 경험이라도 많으면 모르겠는데 있을 리가 있나.
적극적으로 대쉬하는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서 너무 당황스럽다.
"...생각 해볼게. 지금은 좀 그래."
간신히 거절했다. 마리는 엄청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고 엘리스는 안도했다는 얼굴을 했다.
나는 슬며시 깍지 낀 손가락을 뺐다. 그녀는 내 뜻에 순순히 따라줬다.
그러다 마리는 축 처진 고개를 다시 확 들며 내게 물었다.
"지금은 좀 그렇다는 말이 나중에는 가능할 수도 있다는 거죠?"
분위기가 너무 확 확 달라지니까 따라가기가 버겁다. 어차피 나중 일이라면 별로 상관 없겠지. 1등 해서 나가면 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마리는 해맑게 웃으며 눈이 초롱초롱 해졌다.
그러자 엘리스는 내게 짜증을 냈다.
"그럼 나는?"
내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보자 진심으로 속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손 잡게 해줘."
이젠 대꾸해 줄 힘도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렇지!"
그녀는 내 손을 불쑥 잡았다. 나는 멍하니 보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너도 지금 말고 1등 발표 후에."
"아."
엘리스는 입맛을 다시며 손을 떼다가 기분 좋은 얼굴로 마리를 봤다. 그러자 마리가 엘리스를 노려 봤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떡 줄 사람은 꿈도 안 꾸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그건가?
그 때 줄리가 슬며시 와서 말 했다.
"일단 우리 페널티부터 하자."
생각해보니 싸우는건 마리랑 엘리스지만 성적인 행위는 제니퍼와 줄리랑 해야한다. 정말 엿같이 꼬인 상황 그 자체다.
엘리스는 아쉽다는 듯이 물러서며 내게 말했다.
"그리고 모두에게 고개 끄덕이면서 살짝 웃음짓지 마. 진짜 사람 미친다."
순간 충격을 받았다. 나도 모르게 애교를 부리고 있었단 말인가.
의식 안하면 나온다는게 이런 식이구나. 마리나 엘리스가 좋아한 이유를 내가 제공하고 있는 줄 몰랐다.
소름이 확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