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14일차
그래도 노래를 구성하는 요소가 음정 뿐만은 아니니 노력해볼 만 하다.
음색이나 발성같은 부분들도 차이가 있으니까.
슬슬 모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이걸 진짜 해야해?"
엘리스가 얼굴을 붉히며 짜증냈다. 나도 저 말에 백번 동의한다. 그러자 제니퍼가 말했다.
"1등 아니면 다 페널티 받는다니까 해야죠. 뭐."
"그건 그렇긴 하지."
엘리스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 와중에 줄리는 계속 노래 연습을 했다.
페널티의 무서움을 가장 체감해서 그런가. 꽤 필사적이다.
마리는 아직도 꼼지락대며 우리 눈치를 보고있다. 도대체 어떤 기분이길래 저런 표정일까.
갑자기 수줍음 넘치는 소녀가 되어버렸다.
일단 노래 연습을 하긴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부른다고 답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을까?
"에휴."
계속 한숨만 나온다.
심지어 다섯명이 써야 하는데 노래는 한 곳에서 틀어지니까 연습 하기도 힘들다.
고등학교 음악시간에 단체로 하는 느낌이다.
또 부담인건 한 명이 연습할 때 나머지가 다 쳐다본다. 진짜 시험 준비하는 기분이다.
꾹 참고 연습을 계속 했다.
그러자 슬슬 남들과 상관없이 자기 연습을 시작했다.
1시간쯤 지나자 다들 노래 음은 확실히 익힌 모양이다.
음탕한 냄새도 거의 다 빠졌다. 아직도 찝찝하긴 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괜찮았다.
다들 어떻게 연습하나 주위를 둘러봤다.
마리는 자기 귀를 막고 부르는 중이고, 제니퍼는 어떤 부분이 헷깔리는지 한 구간만 반복해서 부르고 있다.
엘리스는 읊조리듯 가사를 되뇌이는 중이고 줄리는 큰 목소리로 부르는 중이다.
어수선하게 계속 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것 같아서 말을 꺼냈다.
"어차피 이렇게 할거면 한 명씩 돌아가며 하고 서로 피드백을 해줄까요?"
내가 묻자 모두 조용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처음부터 말할 걸 그랬다.
서로 먼저 하라고 하다가 결국 나이 순서대로 했다.
줄리가 먼저 노래를 불렀다.
듣다보니까 괜찮다. 음정이 맞는다는게 확실히 큰 역할을 한다.
원래 소리도 크게 낼 줄 알고, 자기만의 느낌을 살릴 줄 도 안다.
만약 음정이 안 맞았다면 소음이었을 텐데 맞으니까 뭐.
어렸을 때 락발라드를 많이 들었는지 발성이 그쪽이었다. 목소리가 고운데 저 발성이라 신선했다.
게다가 의외로 노래랑 어울렸다. 유혹이 아니라 센 누나가 화끈하게 끌어당기는 느낌을 줬다.
그래도 살짝 부족한 느낌인데 뭐가 부족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원래 노래 분위기랑 너무 달라서 그런가?
내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확실하지 않다.
그녀가 노래를 마치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해 줬다.
"좋은데요?"
제니퍼의 칭찬에 줄리는 부끄러운지 자기 머리를 매만졌다.
왜 처음 듣는 것 처럼 느껴지나 했더니 처음 듣는게 맞았다.
그녀만 저번에 시간을 넘겨서 요약정리 영상이 안 나왔었다. 이런 불만 때문에 이번부터 방식이 바뀐 건가?
노래가 괜찮기도 했고, 다들 비전문가라 나서지를 않아서 딱히 지적 없이 넘어갔다.
그럼 피드백이 소용 없는게 아닌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한 번 불러보는데 의의를 뒀다.
이번엔 내 차례였다.
유혹하는 느낌의 가사를 어떻게 살려야 할까.
그나마 음정 맞추는데 신경을 안 써도 되니까 확실히 편하다.
노래라고 또 음악 관련된 분야가 나오니까 은근 자존심이 생긴다.
그래도 여기서 내가 음악은 제일 오래 했을게 분명할텐데.
물론 노래가 아니라 연주지만.
다들 보고있는게 느껴지니까 힘이 들어간다. 편하게 노래방으로 놀러 왔다고 생각해야겠다.
"후우."
문득 현실적으로 내가 이런 노래를 골라서 부를 일이 없었다는게 떠올랐다.
갑자기 쓸데없는 생각이 나니까 집중이 깨진다.
뺨을 툭툭 친 다음 시작했다.
목소리도 바뀌면서 고음까지 잘 올라가게 됐지만 가성을 썼다.
그래도 유혹하는 노랜데 막 지르는 것 보다 훨씬 간드러지지 않을까 싶다.
연습이지만 실전처럼 열심히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줄리 때 처럼 호응해준다. 이게 생각보다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진다.
이렇게 노래 부르고 감상해주는 분위기가 적응이 안 된다.
"괜찮은 것 같아요."
마리가 내게 엄지를 들어줬다.
진짜 무슨 오디션 프로 출연한 것도 아닌데 웃기다.
오히려 그 사람들 보다 더 절박하려나? 아니지. 마음가짐은 비교할 수 없긴 하다.
이번엔 엘리스였다.
여기 와서 다른 사람들의 노래를 집중해서 들을 줄 몰랐다.
갑자기 주어진 노래로 피드백을 나누는게 처음이다 보니까 새삼 어이없긴 하다.
예능프로에서 일반인들로 아이돌 도전하는 느낌이다.
다행인건 우리 다섯명 안에 음치나 박치는 없는 모양이다.
엘리스가 부르기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살짝 감탄했다.
느낌을 굉장히 잘 살릴 줄 안다. 노래 잘 부르는 것도 여자와 사귀는데 관련 있는 걸까.
나와 줄리보다 훨씬 곡에 맞는 창법이었다. 노린건지 몰라도 끈적하고 섹시한 느낌이 났다.
그녀는 노래에 재능이 있었다. 그녀가 부르니까 집중이 된다.
저번주에 나보다 늦게 통과한 것은 단지 음정 때문이었나 보다.
"잘하네."
내가 말하자 엘리스도 노래를 마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거 되게 창피하네."
그녀는 멋쩍게 말했다.
오늘 시험들이 다 이런 식으로 진행될 모양인데 익숙해 지긴 해야겠지.
다음은 제니퍼가 불렀다.
"오호."
지금까지 4명이 불렀는데 느낌이 다 다르다.
그녀는 약간 아이돌 보컬 느낌이 났다. 나쁜 의미라기 보다는 잘 부르는데 어린 느낌이 난다.
"목소리가 높아서 그런가? 노래 내용이랑 다르게 맑은 느낌이네."
줄리가 말하자 제니퍼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도 긍정하는 모양이다.
제니퍼까지 부른 뒤 마리 차례가 됐다.
"흐읏."
마리는 부르기도 전에 쑥쓰러워했다.
단지 부끄러워서 그런 것 같지 않다. 그녀는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노래를 불렀다.
의외로 마리 목소리가 잘 어울렸다. 마냥 밝게 부를 줄 알았는데 기교도 엄청 섞었다.
애니메이션에서 감명받은 여성 보컬이라도 있는 걸까.
살짝 들어본 것 같은 창법이긴 한데 그녀의 목소리에도 잘 맞았다.
이것도 살짝 락 느낌이긴 했는데 줄리와 달리 곡 분위기에 더 맞춘 느낌이다.
엘리스보다 더 재능이 있는걸까? 그건 모르겠다.
그녀의 노래까지 끝나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뭐가 답일지 모르니 망설일 수 밖에 없다.
살짝 박자가 안 맞은 부분이나 발음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조정했다.
엘리스는 뭔가 깨달았는지 혼자 열심히 생각했다.
그렇게 2시간이 다 지났다.
[자! 이제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순서대로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러주시면 되겠습니다! 먼저 마리!]
이젠 자연스럽게 마리가 준비를 한다. 매번 먼저 하는데도 딱히 불만을 하지 않는게 대단하다.
먼저 한다는 것에 다른 장점이 있어서 그런걸까?
다들 앉아있는데 혼자 일어섰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가운데로 간 뒤 반주에 맞춰서 마리가 노래를 불렀다.
아까보다 박자도 잘 맞고 느낌도 살았다. 오히려 노출증 때문에 살짝 섹시함이 드러났다.
기교도 부드럽게 들어갔다. 꽤 점수가 높지 않을까?
실수하지 않고 노래를 끝마치자 점수가 나타났다.
78점
이렇게 잘 불러도 78점이라니. 저번주에 내가 70점 맞은게 기적이다.
마리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녀의 허벅지에 흐른 애액 자국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우리도 작게 박수를 쳐줬다.
[다음 제니퍼!]
이번엔 제니퍼가 일어서서 노래를 시작했다.
아까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노래와는 잘 안 맞았다.
그녀도 그걸 느꼈는지 불안해하는게 보였다. 박자나 가사 실수를 할까봐 나까지 조마조마했다.
아슬하게 노래를 끝마친 그녀가 한 숨을 내쉬었다.
70점
무려 마리보다 8점이 낮았다.
선곡과 음색의 차이가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 불안함에 노래가 흔들리며 점수가 많이 깎인 모양이다.
그래도 저번주에 비하면 커트라인은 단번에 통과되는 수준이다.
확실히 음정이 정확하다는게 노래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다.
[다음 엘리스!]
그녀도 일어나서 가운데로 갔다.
반주가 나오고 노래를 시작했다.
"와."
엘리스는 중간 점검 때 보다 더 성장한 느낌이다.
목소리 톤이나 음색도 그렇지만 감정 담는게 예술이었다. 마리는 거의 눈에 하트가 뜰 정도다.
살짝 홀리는 기분을 느낄 정도로 섹시하게 불렀다.
진짜 가수들의 콘서트를 갔던 기억이 났다. 그 정도로 잘 불렀다.
진심으로 순간 완전히 남자 때 모습을 잊었다. 이게 노래의 힘인가?
무슨 생각으로 노래를 부른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노래가 끝나자 마리나 줄리는 힘차게 박수를 쳤다. 나와 제니퍼도 살살 따라 쳐줬다.
엘리스는 더 쑥스러워했다.
점수는 무려 85점이었다.
도대체 90점 넘는 노래는 어떤 느낌일까. 진심으로 궁금하다.
[다음 세리아!]
그녀가 자리에 앉고 내가 일어서서 나갔다.
"후우."
여기엔 사실상 나 빼면 4명 뿐인데 왜 이렇게 떨릴까.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 연주할 때와 다른 떨림이 온 몸을 덮쳤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소름이 돋는다. 왜 이렇게 떨리지? 괜히 음악에 대한 자존심이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여기서 5등 하면 진짜 쪽팔릴 것 같은데.
반주가 시작되고 노래를 불렀다.
박자와 가사를 조심하면서 누군가를 유혹한다는 느낌을 담아서 불렀다.
살짝 부끄러울 뻔 했지만 간신히 철면피를 깔았다.
연습 때 처럼 가성과 진성을 모두 이용해서 나긋하게 불렀다.
대놓고 섹시하거나 요염한 느낌을 살리기는 불가능하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살며시 속삭이듯, 유혹하는 느낌은 살릴 수 있었다.
엘리스는 모두를 유혹하는 감정이었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한 사람만 노린다는 느낌으로 갔다.
노래가 끝나자 다들 작게 박수쳐 줬다.
실수하지 않은게 용하다. 목소리에 떨림이 드러난건 아니겠지?
점수를 확인해 봤다.
79점
마리보다 살짝 높았다. 크으.
다행이다. 엘리스의 노래는 이길 수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이 점수도 감지덕지였다.
오히려 엘리스랑 비슷한 감정으로 갔다면 점수가 아작났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줄리!]
내가 자리에 앉고 줄리가 가운데로 갔다.
줄리는 호쾌하게 지르듯 노래를 불렀다. 유혹하는 가사여서 그런지 저렇게 강한 방식으로 부르니까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다른 네 명 보다는 확실히 시원시원한 감이 있다. 이번에 줄리의 점수를 통해 어떤 방식이 더 좋은 평가를 받나 봐야겠다.
다들 애써서 내게로 와달라는 느낌이라면, 그녀는 안 오면 죽는다는 느낌이었다.
이런 느낌이라도 확실히 담았으니까 점수가 괜찮을 수 있다.
줄리가 노래를 마치고 다들 박수를 쳤다.
점수는 80점이었다.
아쉬워서 이마를 탁 쳤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2등은 할 줄 알았는데. 내가 부를 때 가성 대신 진성으로 질렀다면 더 좋은 점수를 받았으려나? 장담하긴 힘들다.
점수에 대해 확실한 매커니즘을 모르니까 엄청 답답하다. 오디션처럼 점수를 주려면 심사위원 평가라도 들려줘야 하는거 아닌가?
그래야 고치지.
점수를 덜 받은 이유가 뭘까? 턱을 매만지다가 깨달았다.
내가 왜 이딴 것으로 고민해야 하나. 어차피 2주 뒤에 나갈건데.
음악인의 자존심이라는 이상한 명목 하에 중요한 본질을 놓칠 뻔 했다.
머리를 흔들어 궁금함을 지웠다.
[노래 시험 결과 1등 엘리스, 2등 줄리, 3등 세리아, 4등 마리, 5등 제니퍼 입니다!]
제니퍼는 아쉬워했다. 청량감 넘치는 노래였다면 그녀 점수가 높았을텐데. 하지만 여기서 그런 노래를 줄 것 같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