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12일차
마리는 내게 말을 걸지 않고 다시 컴퓨터를 했다.
얼굴까지 이불을 뒤집어 쓴 뒤 웅크리고 누워서 복부를 눌러봤다.
배는 만져봐도 딱히 모르겠다. 그렇게 아픈 개조를 받았는데.
이대로 인형이 되어도 이상함을 못 느끼게 되는건 아닐까. 두려워진다.
정말 나는 대변을 보지 않는 몸이 된걸까. 누군가는 부럽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이나 시켜주지 왜 나를 가지고 지랄인지.
날이 갈 수록 점점 더 예전 모습과 멀어지고 있다.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렇게 된건지 모르겠다.
"에휴."
나중엔 원래 모습이 기억나지 않게 되는건 아닐까.
예전에 군대를 제대하고 집에서 초등학교 졸업사진을 본 기억이 났다.
내가 이렇게 파릇파릇하고 귀여운 때가 있었네 하고 넘어갔었는데.
남자일 때 내 모습을 그렇게 넘어가는 지경이 될까봐 무섭다.
누가 부스럭대며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만 다시 이불 밖으로 내밀어 봤더니 엘리스가 일어나 있었다.
"아이씨."
아이씨 까지는 욕으로 안쳐주는 걸까. 그녀는 자기 상의를 보고 열받는 표정을 했다.
엘리스는 흰색 탱크탑이었다. 오히려 흰색이 얇으니까 유두가 도드라졌다.
나도 꽤 티나는 색인데 그녀는 대놓고 보인다. 순식간에 분홍빛 꼭지가 단단해졌다.
그녀는 이불 속 자신의 하반신을 보고 또 욕을 할 뻔 했다. 입이 씰룩 거리다 멈췄다.
솔직히 노팬티도 짜증나는데 이런 치마 입힌 것도 진짜 악질이긴 하다.
"그거 가슴 조심해야해."
나는 혹시나 해서 말해줬다.
엘리스는 자기 하반신을 보다 말고 나를 쳐다봤다.
"뭘 조심해?"
"유두 부분 재질이 까끌거려."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살짝 만져보더니 소름이 돋는지 그만 뒀다.
"그렇게 말하니까 또 느껴지네. 차라리 벗고있을까?"
저 발언에 살짝 혹 할 뻔 했다. 나도 내 꼭지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다면 벗을 의향도 있다.
벗어야 된다는 현실에 화가 나지만 어쩌겠나. 민감한데.
아까처럼 계속 신음을 질러야 한다면 벗는게 낫지 않을까.
'쾌감의 신음을 간헐적으로 지르기'와 '가슴 까고 돌아다니기'. 선택지의 난이도가 극악이다.
이 탱크탑이 벗은거나 다름없이 보이지만 옷은 옷이다. 부끄러운건 맞지만 우습게도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엘리스도 어깨를 으쓱했다.
제니퍼와 줄리도 곧이어 일어났다.
줄리의 옷은 변함이 없었다. 가려주는 부분은 마이크로 비키니가 오히려 더 나아보인다.
"옷이 바뀌었네."
제니퍼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 봤다. 역시나 부끄러운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살짝 상의를 만져보더니 바로 유두가 서니까 그만 뒀다.
그나마 그녀는 검은색이라 가장 나았다. 이상하게 부러웠다.
가슴도 나보다 훨씬 작고 옷 색도 제일 진해서 티가 안난다. 저게 1등 보상 아닌가?
내 가슴을 내려다 보자 누가 봐도 티나는 꼭지가 뽈록 튀어나와 있었다.
얼굴이 화끈해진다.
그 때 MC의 목소리가 나왔다. 휴식인데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나온거지?
좀 적당히 괴롭혔으면 좋겠다.
[모두들 직장 개조를 마친 기념으로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한 가지 씩 말해주세요.]
굉장히 차분한 목소리였다. 항상 크고 강하게 말하던 그가 나긋하게 말하자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희소식 아닌가? 나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순대국밥 먹고 싶은데."
국밥의 종류는 굉장히 많지만 지금은 순대국밥을 먹고 싶었다.
밥 힘으로 살던 내가 2주 가까이 아무것도 못먹었다는게 말이 안된다. 이것도 스트레스의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다들 얼굴이 밝아졌다. 나만 바로 말하고 넷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모두 한참을 열심히 고민했다. 혼자서 기다리고 있으니 머쓱했다. 중간에 가장 먹고싶은 것 생각 하는게 나 뿐인가?
군대 휴가 나가기 전에도 종이에 먹고싶은 목록을 적어 나간게 나다.
먹을 것에 진심인 사람이 진짜 나 뿐이라고?
잠시 후 넷 중엔 줄리가 먼저 말했다.
"족발과 보쌈 중에 너무 고민이 됐지만. 난 보쌈. 술도 있으면 딱인데."
"크으. 인정합니다."
나도 모르게 호응했다. 줄리는 갑작스런 내 호응에 잠깐 놀랐다가 미소지었다.
그녀가 보쌈 먹을 때 한 쌈 얻어 먹어야겠다. 듣고 나니까 엄청 먹고 싶어진다.
다음은 엘리스가 말했다.
"은근히 먹고싶은게 많은데. 난 삼겹살 먹을래."
"맞지. 삼겹살도 엄청 맛있지."
음식들을 들을 때 마다 엄청 식욕이 돋았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엘리스는 부잣집 자식이라 삼겹살은 안 먹을 줄 알았는데. 역시 있는 집 사람도 먹을 줄 알면 땡기는게 삼겹살인가 보다.
먹을 생각을 하니 스트레스가 팍팍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우습게도 먹을 것 준다는 말에 행복해진다.
나도 생각보다 쉬운 놈인 것 같다. 그러게 진작에 밥 좀 주지. 못 된 놈들.
여기서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는 걸까? 궁금하다.
그 때 마리가 말했다.
"저는 피자 먹을래요. 딱히 생각나는게 없어서."
"생각나는게 없다고?"
살짝 충격 받았다. 처음 봤을 때 말랐다는 것에서 눈치를 챘지만 얼마만에 먹는 건데 저럴 수 있을까.
사람에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건 당연하지 않나? 이해가 안 된다.
제니퍼가 이어서 말했다.
"저는 치킨 먹고싶어요."
"맞네. 치킨. 와."
박수를 치며 제니퍼를 쳐다봤다. 사람이라면 필수 식품인 치킨을 뺄 뻔 했다. 섭섭하겠네.
다들 들뜬 내 모습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먹지 못한 음식들 중 아까운 것들이 줄줄 생각났다. 라면, 햄버거, 냉면, 갈비찜, 닭도리탕, 잡채, 짜장면, 탕수육 등등.
지금 바로 생각은 안나도 조금만 고민하면 더 말할 수 있다.
오히려 고급 음식들은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집 밥이 가장 그리웠지만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기에 꺼내지도 않았다.
다음 기회도 있겠지? 제발.
[여러분이 말씀하신 국밥, 보쌈, 삼겹살, 피자, 치킨은 모두 5인분씩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와!"
나는 진심으로 박수치며 좋아했다. 먹을 생각에 행복한 미소가 올라왔다.
생각보다 자비로운 이벤트였다. 나쁜 놈들인 것을 알면서도 많이 준다니까 고마운 마음이 생긴다.
모두 미묘하게 웃음을 지으며 날 쳐다봤지만 난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팔렸다.
굳이 한입만 달라고 안 해도 된다는게 가장 기쁘다.
아까까지 했던 고민과 암울한 생각들이 조금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아래에서 진짜 음식이 왕창 올라왔다. 피아노도 이런 식으로 올렸던 걸까.
확 풍기는 냄새가 나를 미치게 했다. 뛰어 나가려다가 얇은 탱크탑에 나풀대는 치마인 것을 깨달았다.
얌전히 몸을 들어 팔짱으로 가슴을 받치고 살금살금 음식 앞으로 갔다.
매번 민트향 아니면 피, 오줌, 애액. 이런 냄새만 맡다가 향긋한 음식 냄새를 맡으니 마약이 따로 없었다.
진심으로 눈물이 날 뻔 했다. 타지에서 고생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을 느꼈다.
물론 아직 돌아가진 못했지만.
국밥 옆에는 들깨가루나 양념, 고추와 마늘까지 다 있었다. 이렇게 금방 준비할 수 있는 음식이 아닐텐데. 신기하다.
숟가락과 젓가락도 있었다. 꽤나 본격적이다. 근데 젓가락 모양이 이상했다.
가위나 칼도 없는거 보면 위험한 종류를 다 뺀 모양이다. 여기서 설마 자해를 하겠니?
일단 급하니까 국밥 앞에 앉았다.
내가 먹던 대로 조합을 한 후 국물을 한 입 떠먹었다. 가슴이 불편했지만 무시할 수 있었다.
"으음!"
가슴이 찡 울리는 느낌이었다. 뜨듯하고 얼큰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데 감동을 받았다.
아직 뜨거운 밥 한술을 국물과 같이 뜬 다음 고기를 한 점 얹어서 먹었다.
"하으. 흐."
입 안에서 식히며 천천히 씹어 삼켰다. 진짜 예술이었다.
옆을 보니 깍두기까지 있었다! 한 숟갈 더 떠서 먹고 깍두기 두 알을 같이 씹었다. 온 몸이 따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머지 네 명도 음식을 둘러싸고 앉았다.
보쌈도 너무 맛있어 보였다. 수육에 김치를 얹어 노란 배춧잎에 싼 다음 한 입에 넣었다.
"오와!"
요리가 수준급이었다. 아니면 지친 내 미각이 다 최고라고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아삭한 배추향 아래 수육과 김치맛이 황홀하게 섞였다. 기가 막혔다.
놀랍게도 줄리의 말 처럼 소주와 맥주까지 준비해 줬다. 물론 콜라와 사이다도 있었다.
줄리는 웃으며 내게 잔을 건넸다. 나도 반사적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소주? 소맥?"
"둘 다 좋죠."
서로 소주만 한 잔씩 주고 받았다. 엘리스가 이걸 보고 우리쪽으로 붙었다.
"나만 빼지 마."
"붙어."
마리는 술이 맛 없다고 음료수를 마셨다. 제니퍼는 음료수랑 맥주를 번갈아 마셨다.
무슨 의도로 이런 이벤트를 했는지는 몰라도 스트레스가 풀리긴 한다.
몸이 작아져서 배도 금방 부를 줄 알았는데 꽤 잘 들어간다. 이것도 개조의 힘일까?
다들 신나서 먹고있다.
삼겹살은 다 잘려서 나왔는데 크기가 조금 작았다.
상추에 고기 두 점, 쌈장, 구운 마늘, 고추, 파무침, 밥까지 알뜰하게 다 넣고 한 입에 넣었다.
"와아."
너무 맛있다. 이 맛을 알면 절대 삶을 포기 못할 것이다. 우적우적 열심히 씹어 먹는데 엘리스가 눈치를 줬다.
뭔가 하고 보니까 잔을 들고있다.
우리 셋만 하려다 제니퍼와 마리까지 불렀다.
다섯이 짠 하고 한 잔씩 마셨다.
억지로 취기 페널티를 받을 땐 그렇게 짜증났는데 스스로 마신 취기는 왜 그렇게 달달한지.
원래 개조가 끝나면 다들 생각에 잠겨있거나 딴짓 하다 잠드는게 평소 휴식인데. 오늘 처음으로 쉬는 기분이다.
만신창이로 개조 된 몸이 지금 만큼은 생각나지 않았다.
술이 점점 들어가고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치킨과 피자도 하나씩 먹었다. 잊고 있었던 식욕이 느껴지며 살아있다는게 실감됐다.
살짝 매콤한 후라이드와 페퍼로니 피자였다.
할 수 있으면 진작 이런 서비스좀 해 주지. 고마움을 느끼라고 아끼다 준 걸까.
여기와서 처음으로 머리가 안 아프다.
매일 개조되어가며 내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는게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가끔 습관이 나오거나 예전 기억이 떠오를 때면 다시 상기됐다.
나는 아직 남자구나.
본질을 잊어서는 안된다.
오늘 게임에서도 다들 날 여자로 본다는게 느껴질 때 마다 소름이 확 돋았다.
바뀐지 얼마나 됐다고 저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모두 겉으로 보면 예쁜 여자기는 했다.
지금 우리 모습은 음란한 파자마 파티 그 자체였다.
그래도 나는 아직 남자인 것을 잊지 않았다.
"앗!"
치킨 부스러기를 흘렸는데 가슴 위로 떨어졌다.
진지한 고민 하고 있는데 정말 기분 잡치는 일이었다.
어떤 남자가 먹던 걸 가슴 위로 흘리냐고. 여자 중에서도 얼마 겪지 못하는 일을 내가 하고 있다.
대강 툭툭 털고 계속 먹었다. 먹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지.
그 때 꽤 취했는지 얼굴이 달아오른 엘리스가 내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