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6화 〉12일차 (56/94)



〈 56화 〉12일차

1라운드부터 고르기가 골치아프다.

다른 사람들도 1번을 고르지 않을까? 설마 겹치는게 걱정된다고 다른 방을 고르진 않겠지.


나도 적당히 걸려야 1등을 면할텐데 큰일이다.

그러다가 저번 게임처럼 꼴등하면 그것대로 또 큰일인데.


"하아."

다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솔직히 1번과 2번 사이에서 고민이 많이 된다. 다들 이 사이에서 고르지 않을까 싶다.

걸리는건 확실하고 몇 명이 오느냐가 문제인데.

차라리 4명 이상으로  오면 좋은데 그럴 확률은 너무 낮으니까 기대를 안하는게 맞다.

뽀뽀냐 키스냐. 벌점이냐 페널티냐.


내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이 와중에 머리 하나 안 엉키고 부드러운게 더 어이없다.

"흠."


팔짱을 끼고 한참을 노려봤다. 그러다 결국 1번을 골랐다.


막상 누르고 나니까 마음이 편하다. 차라리 많이 걸리면 뽀뽀가 낫지.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어줬다. 가슴 무게 때문에 몸이 굽는 기분이다. 실제로 굽는 건가?

생각보다 결려서 중간중간 가슴을 펴고 스트레칭을 해줘야 했다. 정말 이래저래 쓸모없는 가슴이다.

[자! 각자 선택한 방으로 이동해주세요!]

눈이 가려지고 이동이 된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눈을 떴을 땐 내 옆에 아무도 없었다.

"하! 참."


진짜 운도 지지리 없다. 이럴 때 적당히 벌점을 받아야 하는데 이걸 피하네.

최소 2명에 최대 4명까지 예상했는데 결과는 나 혼자였다. 나는 내 이마를 짚었다.


그래도 게임은 기니까 3등을 노려보자. 결과적으론 좋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봐 볼까.

처음 이 게임을 했던 때 처럼 다른 방의 상황이 생생하게 보인다.


어디에 겹쳤는지 보니까 3번엔 줄리, 4번방엔 마리가 있다.   대담한 선택이었다.

[2번방에 제니퍼와 엘리스 2명이 들어가게 되었으므로 마이너스 1점씩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 조건을 실행해 주세요! 지키지 않으면 벌점입니다!]


그 당시에 키스할 때가 생각이 난다. 제니퍼에게 취기로 키스 했었는데도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른다.

한동안 얼마나 부끄럽던지.  기억 만으로 제니퍼에게 계속 사과 했었는데 새삼 옛날 일 같다.

그런데 지금 저 둘은 맨 정신으로 해야한다. 저럴 바엔 차라리 취기가 있는게 더 좋아보인다.

일단 나는 벗어났으니 제니퍼와 엘리스가 어떻게 나오나 구경했다.

둘  머뭇거리고 있다. 하긴. 바로 키스해버리면 나중에 더 어색할 것 같다.


마리와 줄리도 모두 흥미진진하게 보고있다. 저 둘이 엮이는 것도 많이 없던 상황 아닌가.


가끔 게임 같이 하는 것만 봤지 대화 나누는 것은 못봤다.


설마 나 없을 때 떠드는 건가? 같은 방 쓰는데 그럴  없겠지.


"할게."


엘리스가 고심 끝에 제니퍼에게 말했다. 제니퍼는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엘리스는 능숙하게 제니퍼를 리드했다. 역시 경험의 힘이 컸다.

처음엔 살짝 입만 맞추더니 엘리스가 적극적으로 혀를 움직이는게 보였다.


"하으."

제니퍼는 가쁜 숨을 내쉬며 엘리스의 속도에 맞추기 급급했다. 초보한테 너무 적극적으로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엘리스는 이 상황을 빨리 끝낼 생각 같다.

"하읍. 흐읍."


둘의 키스 소리가 방에 울려퍼졌다. 이상하게 내 얼굴이 더 붉어질  하다.

 주변에 배우 친구가 없어서 그런걸까? 이런 상황이 너무 어색했다.

 다 시켜서 하는 것을 알아도 좀 그랬다. 아는 사람들의 저런 장면을 생생하게 볼 줄이야.

결국 그 사이에 다들 정이 들었나 보다.


쪼옥, 쩝 소리가 계속 들리더니 입을 다시 뗀다. 둘의 입 사이에 침이 늘어지다가 끊어졌다.

한 30초? 1분? 그정도 밖에  지났는데. 그래도 굉장히 길어보였다.


통과가 된 것 보니까 조건은 달성한 모양이다.


둘은 키스를 끝내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둘 다 굉장히 붉었다.


제니퍼와 엘리스는 잠깐 바라보던 것을 멈추고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서로 다른 곳을 보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미묘한 침묵이 너무 어색해 보였다. 내 주먹이 절로 꽉 쥐어졌다.


제니퍼는 부끄러워 보였고 엘리스는 약간 자괴감이 드는 표정이었다.


드라마 보는 기분이다. 얼떨결에 키스까지 이어진 둘이  현실을 자각하고 창피해하는 장면 같다.

상황에 맞지 않지만 둘을 응원하는 마음이 솔솔 피어나는 기분이다.

거의 25분 정도 남아있는데 어떻게 시간을 보내려나. 뭔가 남의 연애 구경하는 느낌이라 간질간질했다.


예전에 엘리스가 한 말이 생각났다.


성이 바뀐 건 어쩔 수 없으니 여기서 상대방을 찾겠다던 말. 이 모습을 보면 이해가 된다.

서로 이성으로 보이는 상황이지만, 내적으로는 남자끼리, 겉으로는 여자끼리 키스한 모양이다. 정말 어려운 문제다.

살짝 후회되는지 백금발을 헤집는 엘리스와 수줍어하는 제니퍼를 보면 꽤 잘 어울렸다.


거의  반대의 모습이라 그런 기분이 드는 걸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흑과 백 커플이다.


대상이 내가 아니니까 이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피식 미소가 나왔다.


웃기까지 하다니. 진짜 내가 미친게 아닐까.

심각한 상황에 놓여지니까 맛이 슬슬 가는 모양이다. 밖에있는 시청자들도 이런 감정으로 우리를 보는걸까?

그래도 나와  차이가 있다. 시청자들은 이런 상황의 대상자가 아니라는 것이 다르다.


우리들과 한참 떨어져 있다는 안심이 있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러면 안되는  아닌가?

"흠."


그래도 둘이 사귀겠다고 하면 응원해줄 마음은 충분했다. 그건 사실이다.


그래. 좋게 좋게 생각하자. 어차피 나는 1등해서 나갈 사람이 아닌가. 어떻게 보면 나도 빠질 사람이니까 괜찮다.


이렇게 자기합리화를 마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1등하는 목표만 생각하기로 했으니 이게 맞다.

아직도 엘리스와 제니퍼는 생각이 많아보였다. 무슨 생각 중일까.


키스를 하게된 이 상황에 대한 생각일까? 아니면 키스의 감각에 대한 생각일까.


어색한 분위기는 결국 해결되지 못한 채 30분이 다 지나갔다. 정말 긴 시간이었다.


[자! 그럼 2라운드를 진행하겠습니다!]

우리는 개인 방으로 돌아갔다.



[1번방은 '키스' 방. 2번 방은 '애무' 방. 3번방은 '절정'방. 4번 방은 '키스 & 절정' 방입니다. 10분동안 선택해 주세요!]


조건이 점점 가관이다.


제니퍼와 엘리스를 보면 '키스' 방에서 통과되는 조건이 생각보다 널널하다. 애무 또한 키스 비슷하게 조금만 자극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도 이번엔 진심으로 1번에 모일 것 같은데.

"하아."

단순하게 생각할 수가 없다. 줄리와 마리 때문에 변수가 많아졌다.


1라운드 때 제니퍼와 엘리스를 보면 적절한 선택 같았지만 둘만 벌점이었다. 이번에도 '키스' 방에 마리와 줄리가 올 것 같지 않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끝까지 1번만 고집할까? 그러다 페널티를 잔뜩 받게되면 어쩌지?

솔직히 마이너스 점수를 받는 것 보다 페널티 받는게  싫었다.

취기가 올랐을  또 자학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최악으로 남에게 폭력을 휘두르진 않겠지? 내가 그렇게 몰상식한 사람은 아니다.


다시 팔짱을 끼고 곰곰히 생각했다.


무거운 가슴 때문에 팔짱 끼는것이 습관 될 것 같다.

10분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

"에휴."

한숨이 계속 나온다. 제니퍼와 엘리스가 키스를  고를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피어났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걸 피할까 아님 받을까.


키스 정도면 괜찮은 편 아닐까? 다른 조건들이 너무 심하긴 하다.

적당히 감점을 받아야 1등을 면할텐데. 막상 받으려니 망설여진다.

받아도 막상 서로의 탓을  수가 없다.


이 곳에서 우리가 서로 애무를 해주는 상황을 만드는 건데. 그걸 탓해야지. 우린 다 피해자다.

그래도 마주보고 절정을 하는걸 어떻게 용납하란 말인가. 앞으로 2주는 넘게 붙어있어야 할 사람들인데.

스트레스가 안 솟을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 3라운드나 4라운드에 하게  것이다. 그게 날 괴롭게 했다.

그래. 지금은 차라리 키스가 낫다.

나는 깔끔하게 1번을 골랐다. 아이씨 몰라.

[자! 각자 선택한 방으로 이동해주세요!]


2라운드가 시작됐다.





눈을 떴을 때는 줄리가 있었다.


"아! 줄리!"


나도 모르게 원망섞인 말을 했다. 그녀는 멋쩍게 웃었다.

"하하. 안녕?"


그냥 3번에 있지  왔단 말인가. 예상과 다르게 엘리스와 제니퍼는 오지도 않고 줄리가 왔다.

나도 모르게 따지듯 물을까봐 마음을 진정시켰다. 생각해보면 줄리 덕분에 1등을 살짝 면할 수 있었다. 고마운 것 아닌가?


그래도 궁금하긴 하니까 심호흡을 한 뒤에 차분하게 물어봤다.


"왜 바꿨어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 하며 말했다.

"누군가 3번에 올 것 같아서 바꿨지 뭐. 키스는 할 만 하니까."


"..."


그럴 수 있지. 갑자기 3번에 누군가 오면 엄청 난감하긴 할 것이다.


다들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서 다른 방을 봤다. 마리는 4번 방에 혼자 있었고 2번 방에서 엘리스와 제니퍼가 만났다. 저기는 이제 큰일났다.

"저기는 또 만났네요."


"그러게. 풋."


줄리도 저 상황이 웃긴지 웃었다. 그녀도 아까 둘의 키스를 보며 과몰입 한게 분명하다.


마리는 이 게임에서 컨셉을 너무 잘 잡았다. 본인이 나오지 않는 이상 1등은 따놓은 당상이다.

[1번방과 2번방에 각각 2명이 들어가게 되었으므로 마이너스 1점씩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 조건을 실행해 주세요! 지키지 않으면 벌점입니다!]


줄리와 미션을 하긴 해야겠지.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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