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12일차
어정쩡하게 일어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세리아."
"응?"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나를 불렀다. 그녀는 우물쭈물 하더니 내게 물었다.
"괜찮은거 맞죠?"
"걱정마. 걱정해줘서 고마워."
제니퍼는 자기 몸을 살피기도 전에 나를 걱정해줬다. 그만큼 내 모습이 충격적이었을까.
내가 고맙다고 하자 얼굴을 붉혔다.
"...괜찮으면 다행이예요."
하긴. 나도 다른 사람이 자기 얼굴을 코피나게 쳤으면 걱정할 것 같다.
엘리스와 줄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를 봤다.
그 때 줄리가 박수를 짝 치며 말했다.
"아! 세리아 개조 전에 말한 그거구나. 자해했다며."
저렇게 밝은 얘기는 아닌데. 엘리스는 줄리의 말에 깜짝 놀라며 날 심각하게 바라봤다.
"너 자해했어?"
개조당한 직후라 정신이 없었던 걸까? 처음 듣는다는 듯이 묻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스는 아무 말 없이 애매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걸까. 괜히 찔려서 먼저 말했다.
"취기에 미쳐서 그런 것 뿐이야. 들은 것 처럼 벌점도 안 받는 작은 행동이었고."
제니퍼는 움찔 했지만 내 말에 태클을 걸진 않았다. 확실히 작아보이진 않았겠지. 그녀의 배려가 고마웠다.
"그렇다면 뭐...별 말은 안할게. 그래도 나름 알아서 잘 하는 줄 알았는데 그정도였냐?"
엘리스는 뭔가 찝찝하다는 듯 나를 노려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 해주고 신경을 껐다. 그 와중에도 가슴이 출렁였다.
내가 강철 인간도 아니고 이런 상황에 흔들리는건 당연하다.
스트레스를 풀어줘야 이런 일이 또 안 생길텐데.
오늘은 그러면 피아노를 칠까 말까. 고민이 된다.
그래. 차라리 취기로 폭력성이 표출된게 오히려 다행이다. 내가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으니까.
일단 피아노는 마리가 깨면 생각해 봐야겠다. 괜히 시끄럽게 해서 깨우면 안되니까.
멍하니 침대에 앉아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다들 적당히 떠들다가 자기 할 일을 했다.
엘리스와 제니퍼는 같이 게임을 하고 줄리는 컴퓨터를 봤다. 컴퓨터에 상처되는 얘기밖에 없을텐데도 참 열심히 본다.
마리는 한참 있다가 깨어났다.
"으응."
그녀가 살짝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도 징징 울리는거 같다. 으으."
고개만 돌려서 투덜대는 그녀를 보자 뭔가 약간 달라졌다. 저게 바뀌었구나.
"상의가 달라졌네."
내가 말하자 마리는 고개를 내려 상의를 봤다.
"오. 그러네요."
굉장히 얇은 탱크톱이었다. 색은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푸른 색이었다.
쫙 달라붙어서 그녀의 가슴이나 유두 모양이 선명하게 보였다. 잘못 보면 피부에 푸른 색을 칠한 것 같다.
"그게 옷 역할을 하긴 하나?"
"그러게요."
쫙 달라붙는 탱크탑을 보던 마리는 뭔가 이상한지 상체를 마구 흔들어 댔다.
"흐옥!"
뜬금없는 그녀의 신음에 모두가 놀랐다. 소리를 지른 마리 본인이 가장 놀라보였다.
우리가 의아하게 그녀를 보자 마리는 손을 막 휘저으며 변명했다.
"이거 그냥 옷이 아니고 질감이 이상한데요?"
"어떤데?"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봤다. 그러자 마리는 옷을 살짝 들추더니 손가락으로 비벼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갸우뚱 하고는 유두 부분의 질감도 만져봤다.
그러다 놀랐다는 듯이 소리쳤다.
"와! 여기 부분만 거칠어요.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더라."
유두부분만 거친 재질이라 수시로 발기하게 만든 모양이다. 진짜 악질 그 자체였다.
그녀가 다시 옷을 정리했지만 도드라진 유두가 옷 위로 선명하게 보였다. 내가 입을 것을 생각하니 벌써 골치가 아프다.
그 때 마리는 하체의 이상함도 눈치챘는지 침대 위로 벌떡 일어났다.
"와..."
제니퍼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마리의 아래에는 굉장히 짧은 치마가 입혀져 있었다. 치마 역시도 그녀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이었다.
치마는 사실상 옷으로 역할을 다 못했다. 엉덩이도 끝까지 다 안 가려지고 너풀거리는 소재였다.
그녀가 다리를 벌려보자 제니퍼는 고개를 돌렸다. 치마 아래엔 아무것도 없었다.
마리는 노팬티였다.
침대 위에 올라간 그녀의 음부가 너무 잘 보여서 빨리 내려오라고 손짓했다.
"일단 내려와."
"앗! 넵."
풀석 다시 앉자 치마가 쫙 펼쳐지며 엉덩이가 순간 다 보였다.
"얌전히 다녀야 겠네요."
마리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개조 20단계부터 옷이 또 바뀌는 모양이다. 이제야 스포츠 브라와 검은 팬티에 내성이 생겼는데.
탱크탑 위로 그녀의 유두는 아직도 꼿꼿하게 서있었다. 앞으로는 수시로 계속 서겠지.
그게 싫으면 차라리 벗고 있으라는 걸까? 어차피 벗어놓으면 또 강제로 입혀놓을 거면서. 참 우습다.
"배는 좀 어때."
"배요? 아. 개조당했지?"
직장 개조를 당한 것도 물어보자 마리는 이제야 살펴봤다. 의상이 준 충격이 크긴 했지만 인간성을 상실했는데. 얼마나 무신경한 거냐고.
"잘 모르겠어요. 똑같은 것 같은데 달라졌나?"
자기 배를 쿡쿡 찔러도 보고 만져도 보더니 어깨를 으쓱한다. 진짜 별 느낌 없는 모양이다.
"과학이 발달하면 사람을 이렇게도 바꿀 수 있네요."
마리가 신기하다는 듯 자기 배를 보며 말했다. 나도 이렇게까지 우리를 개조 할 수 있다는게 신기하다.
그 와중에 나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숙였는데 내 배가 안보였다. 이 미친 가슴. 엿같다.
"상처도 금방 낫게 하고, 개조도 유전자 단위로 하는데 뭐."
내가 덤덤하게 말하자 마리는 그제야 생각났는지 내게 물었다.
"세리아. 몸은 괜찮아요?"
자기가 더 심하게 개조당해놓고 내 걱정을 해준다.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보인 걸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취기 때문에 미쳤었나봐. 지금은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아뇨 뭘. 헤헷."
또 고맙다니까 해맑게 웃는다. 저렇게 사람이 긍정적일 수 있을까. 참 대단하다.
오늘 내가 한 자해는 나에게도 충격이다. 내 목숨 귀한 것은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화풀이 느낌이 강했다. 아무것도 못하고 당하는 나에게 하는 화풀이.
절대 죽고싶지는 않다. 꼭 남자로 탈출하겠다는 다짐을 매일 하는 내가 설마. 아무리 취해도 그런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니까 이 곳에서도 내게 벌점을 안 준게 아닐까. 그렇게 여기는 중이다.
그래도 자해 한 것은 자해 한 것이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사단이 일어났다.
내가 강한 사람이라 여기며 살아왔는데 살짝 부정당한 기분이다.
"후우."
사실은 숨기려 해도 점점 변하는 내가 무서운게 아닐까.
개조당하는 것도 두렵고, 이 몸에 적응하는 것도 두려우면 어쩌자는 걸까.
적어도 두려움 하나는 참아야 했다.
내가 왜 오늘 창피한데도 꾹 참고 자위를 했냐고. 모든 두려움과 걱정을 참고 1등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취기를 통해 확인한 내 본심은 자괴감이었다.
생각이 많아진다.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1등이라면 그것만 봐야했다. 나는 자존심도 챙기고 싶고, 남자였던 마음도 지키고 싶어 하니까 이도저도 안되는 것이다.
단호하게 결단을 내려야 했다. 오늘같은 추태를 안보이려면 더 강하게 결심해야 한다.
그래도 시키는 자위를 그대로 하는게 더 추태가 아닐까?
나는 내 뺨을 찹찹 때렸다. 이 와중에 다른 생각을 하다니.
1등을 위해서라면 어떤 굴욕도 참을 것이다.
"..."
하지만 내일은 1등 하기 애매한데.
내일도 분명 열심히 해서 1등을 하면 또 1등 혜택이라며 놀림받을 것이 분명하다.
또 무슨 명기중에 명기니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서 지랄을 떨텐데. 그 꼴은 절대 보기 싫었다.
"하."
진짜 이런 게임은 하기 싫다. 이놈들 순 나쁜 놈들이다.
뭘 어떻게 해도 손해만 봐야 하는데 왜 해야 하냐고. 저놈들도 똑같이 시켜봐야 한다. 자기들은 하고 싶을까.
그래놓고는 개조 받는걸 축복처럼 여기니까 더 짜증난다. 그럼 본인들이 받으면 되는걸 왜 우리 시키냐고.
이런데도 내일 1등을 해야 하나?
음.
내일만 하지 말자.
---
12일차
오늘도 어김없이 알람이 울린다.
처음으로 1등을 하지 말자고 결심한 날이라 마음이 가볍다. 여기 와서 처음이다.
양치를 하고 습관처럼 가벼운 운동을 한다. 처음으로 마음이 편해지자 모든게 다 수월했다.
마리는 매번 이런 마인드인 걸까? 진심으로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제니퍼도 날 따라 와서 몸을 푼다.
"오늘은 뭘까요."
"글쎄. 뭐가 와도 대충 할 생각이라."
그녀가 의문스럽게 쳐다봤다.
"세리아도 마리처럼 받아들인 거예요?"
"그런 말은 농담이라도 하지 마. 절대 아니니까."
나는 웃으며 받아쳤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내 싸늘한 웃음을 본 제니퍼는 작아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왜...?"
"1등 혜택 받기 싫어서."
"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마음을 알아준다니 참 고맙다.
이곳에서도 내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다. 그럼 오늘 게임이 저격 종류가 나와줘야 할텐데.
다들 날 저격해도 받아줄 의향이 있다.
솔직히 일부러 벌점 받으려면 욕하거나 폭력을 사용해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전체적으로 너무 손해다.
하루 게임에 총 10점씩 벌점 쌓이는 것도 이렇게 빠른데 굳이 더 늘릴 필요는 없다.
적당히 3등 정도로 21점을 채웠으면 좋겠다. 여태까지 마음대로 된 확률은 거의 없지만.
설마 이런 마음가짐인데 1등 하겠어?
[여러분 오늘도 안녕하십니까? 오늘 게임 제목은 바로! 비둘기집 게임 2 입니다!]
전에 했던 게임이 또 나왔다. 이번에도 치킨게임처럼 강도를 높혀서 나오겠지. 벌써 스트레스 받는다.
이 게임에서 1등을 안하려면 다 걸려야 한다는 뜻 아닌가. 1등 혜택 엿먹기 싫다고 여기 사람들과 어색해질 수는 없었다. 고민이 된다.
[기억이 안나시는 분들을 위해 다시 설명 들어갑니다! 이 곳에는 4개의 방이 있고 그들의 선택에 따라 각 방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여기서 2명이 된 방은 감점! 3명이 된 방은 패널티 추가! 하지만 4명 이상부터는 추가 점수를 드립니다!]
굳이 또 설명을 해준다. 빨리 조건이나 말해.
[총 4라운드로 게임이 진행되고 각 라운드 마다 30분 안에 조건을 이행해야 합니다. 다들 아시죠? 매 라운드 마다 방 조건은 변화한다는 것! 어떤 조건이 나올지 궁금해서 두근두근 합니다! 그럼 10분을 드릴 테니 골라주세요!]
약간 긴장되는 마음으로 조건을 기다렸다. 처음부터 너무 강하진 않겠지.
[1번방은 '뽀뽀' 방. 2번 방은 '키스' 방. 3번방은 '애무'방. 4번 방은 '절정' 방입니다. 바로 비둘기집 게임 1탄의 마지막 라운드 조건입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