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9일차
눈을 떴을 땐 마리가 인터넷을 보고 있었다. 나는 몸이 아프거나 힘들진 않아서 바로 일어났다.
내가 일어난 걸 보더니 마리가 손을 흔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도 흔들어 줬다.
얼굴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서 터벅터벅 거울로 걸어갔다.
"와."
안그래도 눈에띄는 얼굴이 더 화사하고 예뻐졌다. 지금 상황과 너무 안어울려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리보다 살짝 더 진한 메이크업인데 얼굴의 특색을 잘 살렸다. 내 얼굴만 아니라면 발박수까지 치며 칭찬했을 것이다.
긴 속눈썹이나 분홍빛 입술도 문질러 봤지만 손에 묻는 것 없이 그대로다. 진짜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버렸다. 한숨이 새어나왔다.
대강 확인을 마친 뒤 마리에게 갔다.
"뭐 보고 있어?"
굉장히 열중해서 보길래 궁금해졌다. 그러자 그녀는 대단한 것을 발견했다는 듯이 화면을 보여줬다.
"아! 세리아. 이것 좀 봐봐요."
하도 설레발을 치니까 그녀가 나에게 뭘 보여줄지 살짝 기대됐다. 대충 보니까 뭔지 모르겠다. 이게 뭐지?
뭔가 하고 자세히 보니 어떤 CCTV 장면이다.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
제대로 다시 보자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남성이 건물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결국 이유를 다시 물어봤다.
"이게 뭔데?"
"엘리스의 마지막 모습이요."
"아. 진짜?"
그렇게 얘기하니까 진짜 엘리스처럼 보이기도 했다. 원래 얼굴이 워낙 금방 사라졌어서 기억도 못했다.
"이 사진이 근데 왜 나온거야?"
가장 궁굼한 부분을 물어봤다. 그러자 마리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게 우리들 중 가장 마지막에 찍힌 사진 이라는데 여기 납치된 날이 아니라 일주일 전이래요."
우리가 일주일 전부터 이미 납치된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쩐지 외계인도 아니고 내가 심부름 도중에 사라진 것은 말이 안된다.
"그럼 일주일동안 우리들에게 뭔 짓을 했겠구만."
"그러니까요. 그 사라진 일주일에 뭔가 답이 있을 것 같아요."
마리는 추리물 주인공이라도 된 듯이 치명적인 표정을 지었다. 심각한 상황에 참 대단한 친구다.
그녀는 뭔가 대단한 것을 찾은 듯 말했지만 결국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단지 이 기술력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를 뿅 하고 납치한게 아니라는 것만 알았다.
우리나라에 없고 외국에 있다는 추측이 나왔을 때 부터 살짝 예상했었다. 일주일만에 이런 짓을 하니 주변 사람들이 눈치 못채지.
"다른 건 또 없어?"
"아! 있어요."
또 어떤게 있는지 궁금하다. 그 사이 참 많은 것도 찾았다.
"여기서 우리 아이돌 팀명을 투표중이래요. 궁금하지 않아요?"
그녀가 신난다는 듯이 말하자 나는 바로 게임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안궁금해."
"에엥? 진짜요?"
마리는 한 달 뒤에 아이돌 활동을 할 생각인 모양이다. 진짜로 여기서 하는 말들을 다 믿는걸까? 어떤 아이돌이 벌거벗고 절정하는 모습을 보여주냐고.
암시장이나 사창가에 안 팔리면 다행일 것이다.
막상 이렇게 말하고 나니 꼭 1등을 해야 되겠다. 진짜 나중에 뭘 시킬지 모른다. 설마 남자 접대를 시키진 않겠지?
이렇게 대놓고 홍보하면서 하는거 보면 '너무 심한 짓까지는 안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생긴다.
차라리 아이돌 활동을 하는게 나아보인다.
"큭."
또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스웠다. 이미 엄청 심한 짓을 당하는데 더 최악을 생각하고 있다니. 계속 안 좋은 상상만 하게 되는 것 같다.
여자가 되어 아이돌을 약속대로 하는게 희망이라니. 남자가 되어 나가는게 목표 아니었나?
개조당하기 전에 했던 다짐이 무색하다.
오늘 게임에서 여성으로 겪은 절정이 내 정신을 너무 약하게 만들었다.
"근데 세리아."
"왜."
마리는 뜬금없이 내게 물었다. 또 무슨 말을 할지 무섭다.
"진심으로 지금의 모습보다 전이 더 좋아요?"
"그래."
생각보다 평범한 물음이었다.
나는 굳이 더 단호하게 말했다.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이 더 좋아요. 세리아가 왜 그렇게까지 싫어하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요."
"그 때 얘기 다 했잖아. 우리 서로 설득하려 하지 않아도 돼."
내가 살짝 쌀쌀맞게 말하자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설득하려는게 아니예요. 궁금하니까 그냥 과거랑 비교해서 따져보자는 거죠."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왜 따져봐야 하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한 번 쯤 다른 사람의 생각도 들을 만 하니까.
우리는 모두 많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잃은 상태다. 어디에 우위를 두느냐 그 차이일 뿐.
"그래. 말해봐. 어떤 점이 그렇게 좋은지."
마리는 웃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 절 좋아해주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원래라면 제가 방에서 죽던 살던 신경도 안 쓸 사람들이었잖아요."
"외모와 상황이 준 관심이지. 이런 관심이라도 좋다면 할 말 없지만. 한 달 정도 지나면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 연예인들처럼 점점 사라질거야. 연연하지 않는게 좋아."
"그럴까요."
마리는 딱히 공감하진 않았지만 다른 장점을 또 생각해냈다.
"세리아도 솔직히 여성으로 얻는 쾌감이 더 크지 않아요? 예전에 자위할 때랑 비교하면 차원이 다르던데."
너무 돌직구로 말해서 살짝 놀랐다. 아니라고 말하려다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그건... 동의해. 하지만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육체적 쾌락이 전부는 아니잖아."
"물론 그렇죠. 그래도 이득인건 동의하시는 거죠?"
"...글쎄."
그녀는 내게 한 방 먹였다고 생각했는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뭔가 페이스에 말려드는 기분이라 찝찝해졌다.
"그럼 나도 하나 물을게. 원래 너가 목표로 하던게 아이돌이었어? 그것도 이렇게 AV배우나 다름없는 상황으로?"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직도 웃고있었다.
"원래 저는 목표가 없었어요. 대학도 다 떨어져서 재수를 해야 하나 고민중이었거든요. 그런데 딱히 대학도 꼭 가고싶지 않더라고요.
군대도 가기 싫고, 인터넷에서 성공하는 사람들 보면 부럽기는 한데 제가 한 건 또 없으니까요."
"..."
"여기서도 처음엔 괴롭고 아픈게 커서 싫었는데 받아들이니까 행운 같아요. 비록 여자친구를 사귀어 보지 못한게 아쉽긴 하지만."
그녀가 너무 진정성있게 말하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저는 얻은게 훨씬 많아보여요. 성별 하나 주고 관심이랑 쾌감, 외모랑 미래까지 다 얻은 셈이니까요. 이제 세리아도 힘든 이유를 말해주세요."
다시 진지하게 고민해봤다. 어쭙잖게 말하면 내 가치관이 흔들릴 것이다.
"일단 난 다른 꿈이 있었어. 막연하지만 결혼도 해서 아이를 키우고 싶었고."
"다른 꿈이 있었다면 화날 만 하네요. 하지만 결혼해서 아이 키우는건 지금도 가능해요."
그녀가 내 의견에 동조하는 척 태클을 걸었다.
결혼 할 수 있는거? 그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의도와 어긋난 질문을 하니까 살짝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설득 안한다더니. 아닌 척 하면서 마리는 왜 나를 설득하려 할까?
내가 예민하게 생각하는 걸까? 일단 대답은 했다.
"전혀 다르지. 나는 여자와 결혼해서 살 생각이었지 내가 여자가 될 생각은 없었어."
"요즘엔 동성도 잘 결혼하지만... 그렇다고 치죠. 네. 이해는 됐어요."
계속 이상하게 꼬투리 잡으려는 모습이 보여서 살짝 거슬렸지만 넘어갔다.
"가장 중요한 건 내 외모를 이렇게 바꿔달라고 한 적 없어. 난 원래 모습도 좋아했다고."
"그런가요? 다들 더 잘생기고 예쁜 얼굴을 원하는건 아닌가 보네요. 그럼 남자로 잘생기게 해주는건 괜찮다는 건가요?"
"...그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네? 방금 한 말과 같은 뜻 아닌가요?"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았다. 어떻게 이 둘이 같은 맥락인가.
"봐봐. 잘생긴 얼굴? 당연히 좋지. 예쁜 얼굴도 좋아. 그런데 일단 내가 원해야지. 거기서 처음 어긋난건 알겠지?"
"네."
똘망똘망한 눈으로 날 바라보자 괜히 더 스트레스 받았다.
"지금 내 성별을 포함한 외모를 멋대로 바꿔놨잖아. 난 그게 마음에 안드는거야. 거기에 내가 여자를 꿈꾸거나 예뻐지기를 바란 사람이면 몰라.
문제는 이것 뿐만이 아니야. 만약 너의 지금 외모가 네 마음에 쏙 들어. 그러면 저들은 그냥 '그렇구나.' 할 것 같아?
자기들 마음에 안들면 또다시 멋대로 외모를 바꿀 수 있다니까? 지금 우리들 바뀐 것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쉽게 긍정하고 넘어갈만한 문제가 아니야."
"다시 바꾼다...그러네요."
마리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그 다음으로 같은 뜻이 아닌 이유를 말해줄게. 성별이 바뀌면서 얼굴이 잘나지면 전혀 다른 문제로 바뀌는데 어떻게 같은 맥락이야.
남자로 잘생겨지는 것과 여자로 아름다워지는 것은 딱 봐도 다른데.
남녀 모두 '잘나지는 것을 원하는건 당연하지 않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긍정할 수 있어. 본능에서 나온 욕구가 분명 존재하니까.
하지만 여자가 남자다운걸 원한다고 남자 화장실을 들어갈 수는 없다는 얘기지. 반대도 마찬가지고.
이건 차별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구분이 있다는 것을 알잖아. 이해하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외모가 예뻐졌다고 해서 '얼굴만 보면 결과적으로 좋다!' 이게 아니라 성별을 포함한 전체를 비교해야지.
아무리 예뻐져도 여자보다는 남자인 원래 내 모습이 좋다. 이렇게."
그러자 마리는 다시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잘 모르겠어요. 어차피 변한 것을 거부할 수도 없고 좋은게 좋은거 아닌가요? 그렇게까지 고집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만 얘기하자."
바로 포기했다. 왜 마리가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모르겠지만 저렇게 말할거면 왜 물어본 걸까.
본인이 좋아진 점을 얘기해서 긍정해주고 내가 싫어하는 이유를 설명해줬다. 그런데 왜 내 의견을 계속 부정하는 걸까.
"왜 나를 설득하려고 애쓰는거야?"
궁금해서 다시 물어봤다. 그녀도 쓸데없는 말싸움을 하고싶은 것 같지는 않아보였으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마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순수함에서 나온 호의일까? 그녀라면 그럴수도 있다.
마리를 상대할 때는 크게 머리를 쓰지 말아야겠다. 나만 괜히 머리 아파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