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8일차
나는 엘리스가 말이라도 절대 안한다 할 줄 알았다. 그녀가 대답을 안하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설마 지금 취기가 돌면 또 덮치겠다는 거야?"
엘리스는 우물쭈물 하다가 말했다.
"안하도록 노력은 해볼게. 정말 최선은 다 할게."
그녀가 확실한 대답을 피하는게 느껴지자 다시 짜증이 났다.
"그게 무슨 말이야. 확답을 못주겠다는거야?"
엘리스는 솔직하게 말했다.
"응. 장담을 못하겠어. 만약 여기서 안 덮치겠다고 하고 또 그러면 너에게 더 상처가 되지 않을까?"
이 와중에 솔직한 답변이 오히려 날 김빠지게 했다. 나도 비슷한 전적이 있으니 좀 그랬다. MC가 시키긴 했지만 제니퍼에게 키스한 것도 사실 아닌가.
분명 내 팬티에 손을 넣은 것은 선을 엄청 넘었지만 화를 내기도 뭐했다.
"에휴. 말을 말자."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다시 싹싹 빌었다. 자신이랑 담을 쌓으려고 하는 줄 알았나 보다.
딱히 그정도는 아니었는데.
각자 생각할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자리를 뜨려고 하자 아예 내 다리를 붙잡았다. 매달린 그녀를 내려다봤다.
"뭐 하자는 거야?"
"진짜 미안해. 내가 돌았었나봐."
너무 저자세로 비니까 점점 찝찝해졌다. 용서하지 않는 내가 못된 것 처럼 느껴졌다.
뭐라도 쏘아붙여주고 싶었다.
"만약 남자모습으로 오늘같은 짓 했으면 바로 감빵행이었어. 알아? 바로 트라우마 생기고, 벌벌 떨었을 수도 있어. 너한테 아는 척 하나 안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전혀 이유도 없는 스킨쉽을 내게 시도하려 한 점은 확실한 성추행이었다. 내가 제니퍼에게 한 짓은 명령이라도 있었는데 얘들은 아니다.
그녀는 내 다리를 붙잡은 상태 그대로 고개를 들어 날 쳐다봤다.
"정말 잘못했어. 그래도 나 지금 여자모습이잖아. 응? 그렇게까지 기분 나빴어?"
머리가 지끈거렸다. 말을 돌리는게 느껴졌지만 엘리스의 말이 맞기는 했다.
다시 쏘아붙일 다른 것을 찾았다.
"게다가 아까 너의 말처럼 누군가랑 사귈 생각을 한다면 한 달 뒤에 해. 한 달도 못참아?"
그러자 엘리스는 억울하다는 듯이 바로 받아쳤다.
"나도 참을 생각이었어! 그래서 내 생각을 너한테 말 안한거였고. 근데 취기가 잔뜩 오른 상태에서 몸이 절정을 하니까 자제하기 힘들더라."
그녀의 표정은 생각보다 더 씁쓸해 보였다. 나는 한 마디 더 하려다가 말았다.
엘리스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이게 진짜 무서운게 절정을 하면 남자처럼 현자타임이 오면서 싹 가라앉는게 아니더라고. 처음 키스하려 한 것은 백번 다 내 잘못 맞아. 미안해. 하지만 그 이후는 정말 의도치 않았어."
"네 상황을 이해해 달라고?"
"염치불구하고 부탁할게. 우리 어차피 3주는 더 봐야하잖아. 응?"
나는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바로 용서해줘버리면 다음에 또 덮칠게 분명했다.
'그 때도 용서해 줬는데 이번에도 해주겠지?' 이런 생각을 품게 하면 절대 안됐다.
하지만 엘리스 말 처럼 계속 꿍하고 말 안하며 지낼 수도 없었다.
"그래. 이해는 해줄게."
"진짜?"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도 용서는 안돼.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하긴 해도 용서할 순 없어."
다시 시무룩 해졌다.
"그...그래. 내가 잘못한 건 맞으니까."
째째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여기서 쿨하게 용서하는 순간 파멸밖에 없다.
"제발 아무리 취기가 올라도 정신차려. 앞으로 얼마나 힘든 페널티가 남았다고 생각하는거야?"
"알겠어. 노력할게. 진짜로."
사실 첫 만남 때 부터 엘리스는 자주 욱하거나 급발진 하는 모습을 종종 보였다. 이제 슬슬 터질때가 되어서 터진 것 뿐이다.
대상이 내가 될 줄은 전혀 몰랐지만 뭐.
한 차례 엘리스 청문회가 끝나자 적막이 찾아왔다. 나는 엘리스를 일으켜 세웠다.
묘하게 그녀의 눈망울이 그렁그렁 했다. 이젠 진심으로 미안해 하는 건지 연기하는 건지 가늠이 안된다.
그 때 줄리가 눈을 떴다. 그러더니 상황을 살펴본다.
이미 일어나 있었는데 우리 둘 때문에 눈치보여서 못 일어난 모양이다.
그녀가 상체를 일으키자 덮고있던 이불이 내려갔다. 일어난 반동으로 가슴이 출렁거렸다.
"아..."
줄리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을 확인했다. 손으로 주물러보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툭툭 칠 때마다 물컹거리고 출렁거렸다.
우리랑 달리 스포츠브라가 아니고 마이크로 비키니여서 더 음란해 보였다.
그 와중에 가슴에 맞는 상의로 바꾼 모양이다. 쓸데없이 세심했다.
"..."
고개를 돌려 제니퍼를 봤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전에 사이트에서 댓글을 봤을 땐 줄리 가슴이 D컵 정도 되는 걸 예상했는데.
주변에서 D컵을 본 기억이 없어서 가늠이 잘 안됐었다. 실제로 보니 예상보다 더 커서 깜짝 놀랐다. J컵인 난 이제 망했다.
"하아. 자위는 언제하냐."
줄리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자위도 한 번 해야 했다. 첩첩산중이었다. 정말 하기 싫은지 얼굴이 울상이었다.
때마침 마리도 일어났다.
"헉!"
어떤 안 좋은 상상을 한건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마리도 자기 가슴을 봤다.
가슴이 튀어나온게 보이긴 했지만 스포츠 브라를 입고 있어서 그리 크지 않았다.
심지어 마리는 A컵이라 가장 부러웠다. 살 찐 남성 가슴이랑 별로 차이 없지 않을까? 내 얼굴이 아니라 저게 1등 보상 수준이었다.
왜 내게 투자하는 사람은 그딴 댓글을 달아서 날 괴롭게 하는지 모르겠다.
마리는 옆을 돌아 줄리를 보더니 눈이 잔뜩 커졌다. 분명 개조 당할 때도 봤을텐데 왜 저럴까? 아. 기절했던 것 같기도 하다.
자기 가슴이랑 줄리 가슴을 한 번씩 보더니 묘하게 아쉬워한다.
그리고 날 보더니 또 화들짝 놀랐다. 취기에 한 짓이 생각나겠지.
그녀는 어물쩍 대며 조금씩 내 근처로 왔다. 이상하게 이 상황이 우스웠다.
"저기. 세리아."
"왜."
내가 담담하게 대답하자 몸을 흠칫 떨었다. 때릴 거라고 예상한건가? 폭력으로 벌점 받았는데 하겠니?
마리는 웅얼대며 말했다.
"미안해요."
"뭐가."
제대로 뭘 잘못 했는지 사과 받아야겠다. 그녀는 경험이 없어서 입맞춤으로 끝났지만 엘리스와 별 차이 없다.
강도의 차이가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미리 뿌리를 뽑아야 했다.
내가 뭘 원하는지 눈치 챈 마리는 얼굴이 빨개졌다. 이럴 땐 참 눈치 빨랐다.
"억지로 그. 키스하려 한거. 잘못했어요."
"에휴. 너도 제발 끝까지 정신차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 줄 알고 벌써 이러는 거야."
그녀는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마리는 엘리스의 분위기에 휩쓸린 경향도 있으니까 그만 봐주기로 했다.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줄테니까 다음부터 그러지 마라."
"세리아! 고마워요!"
내가 용서해주자 마리의 표정이 밝아졌다. 허리숙여 인사까지 하자 푸른 빛 트윈테일이 휘날렸다.
엘리스는 억울한지 뭐라고 하려다가 말았다. 본인 잘못이 더 크다는 것을 늦게나마 깨달아서 다행이다. 만약 그랬다면 다시 화 날 뻔 했다.
나는 더 이상 이 부분에 대해 고민하고 싶지 않아졌다.
둘에게 당한것도 나고 괴로운것도 나인데 이런 고민마저 내가 해야한다는게 어이없다.
이래서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괴로운 걸까.
예전부터 복수보다 용서가 더 중요하다는 얘기에 공감하기 힘들었는데 이젠 이해가 됐다. 앞으로 더 보고 살아야 하는 사이에 전부 다 화낼 수는 없었다.
"에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내 침대로 돌아가 앉았다. 아직도 이불 안에 있던 줄리는 이상하게 꿈틀거렸다.
그대로 줄리에게 가서 조용히 말했다.
"피아노 쳐줄게요."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고마워."
내가 좋아하던 피아노를 이런 식으로 쓰는게 마음에 안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피아노 의자에 앉는데 느낌이 다르다. 엉덩이 감각이 달라져서 그런걸까.
생각해보니 이젠 개조당한 것에 대해 구경도 잘 안하고 넘어간다. 벌써 익숙해지면 안되는데 큰일이다.
익숙해진다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한다.
그렇게 그지같던 훈련소에서도 다들 일주일이면 친하게 대화를 나눈다.
못자던 잠도 잘 자고 군복을 편하게 입기 시작한다. 물론 개인차가 있지만.
학창시절에도 비슷했다. 처음 보는 친구들과 얼마 안지나서 떠들고 장난치며 수업을 들었다.
심지어 대학이나 알바할 때도 일주일에서 보름 사이에 다 적응했던 것 같다.
익숙해진다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
이렇게 비현실적인 상황을 겪고 용서해준다. 자연스럽게 게임을 하고 개조당한다.
여기서 우리의 정신을 가지고 장난쳐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사회적 배경이 주는 힘이다. 학생일 때는 학생으로, 알바생일 때는 알바생으로.
옛날 노예들도 자신들이 자유를 원한 것 보다 주변에서 풀어준 경우가 많다. 당하는데 익숙해지면 탈출 생각을 못한다.
뒤에서 줄리가 신음을 참는게 살짝씩 들렸다.
누군가 옆에서 자위하는데 나는 피아노를 치고 다른 애들은 게임을 하거나 컴퓨터를 본다.
일주일 전만 해도 각자의 삶을 살던 남자들이라는게 믿겨지질 않는다.
미친 상황에선 같이 미치는 것 만이 답일까?
이렇게 본능적으로 명령을 따라야 하는 곳에선 내가 비정상인걸까.
피아노도 잡생각이 많아지니까 실수가 잦다.
"큽!"
[줄리가 자위 1회를 마쳤습니다.]
주변 소리가 이질적으로 들렸다. 정말 이 상황을 받아들이라고?
붉어진 얼굴의 줄리가 가슴을 출렁대며 화장실로 가더니 손을 닦았다.
피아노 치던 것을 그만두고 바로 누워버렸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