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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화 〉7일차 (32/94)



〈 32화 〉7일차

어차피 변화하는 내 모습을 막을 방법은 없다. 힘도 없다.


그렇다고 순순히 받아들이기엔 자존심이 있지.

결론을 말하자면 난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도 점점 모르겠지만 이대로 여성이 되긴 싫다. 그건 확실하다.

 프로젝트를 기획한 사람 또는 사람들에게 지는 기분이라 싫다.

과거의 나에게 미련이 있는건 아니지만 내가 사라지는 기분이라 싫다.

마음을 정리하니까 한결 개운해졌다.

한 편 우리들은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바깥에서 우리를 찾으려던 움직임 또한 전보다 많이 줄어들었다. 오히려 사이트에서 구경하는 사람은 늘어났다.


다섯명의 인권을 박탈하고 구경거리로 만든 이 상황에 세상 사람들은 꽤 열광하고있다. 다른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나 방송에 비할 바가 아니지.


누군가는 이게 초 대형 프로젝트 방송인줄 아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 현실과 동떨어져 보이긴 한다.


우리만큼 현실에서 멀어지게 느낄  없을 것이다.

땀을 줄줄 흘리며 스쿼트를 하는 내가 거울에 보인다. 벌써 10개밖에 안남았다.


[제니퍼 2단계 통과. 3단계는 체력입니다. 주어진 동작들을 바른 자세로 따라하세요.]


제니퍼도 체력으로 넘어왔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며 이걸 하고있을지 궁금했다. 나처럼 고민할까.


50개를 마치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저번에 체력장 미션을 하고 별로 안 힘든걸 보면 근육통도 제어해주는 모양이지만, 본능적으로 다음날 걱정이 됐다.

새롭게 나타난 러닝머신에 몸을 풀고 올라갔다.


오히려 몸이 괴로우니까 머리는 점점 맑아졌다. 고통이 다른 곳으로 분배가 돼서 그런 모양이다.

이 운동을 해내는 것처럼 다 견뎌낼 것이다. 계속해서 다짐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게 없었다.

힘든데도 속력을 꽤 높여 달렸다. 심장이 미친듯이 쿵쿵대고 다리가 살짝 절뚝이는 느낌이 들었지만 마음은 상쾌해졌다.

진짜 말도 안되는 기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고통을 꾹 참고 달렸다. 여기 이 공간엔 내가 통통 뛰는 소리밖에 들리질 않았다.


미친듯이 뛰다가 도저히 참기 힘들어지자 속도를 낮춰 빠른 걸음으로 바꿔 걸었다.


 길에 계속 빠른 걸음으로 5km를 완주했다. 과연 3단계를 완료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을까.


[세리아 3단계 통과. 4단계는 연기력입니다. 주어진 대사와 연기를 따라하세요.]


바닥에 털썩 앉았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옆에 수건이 올라와서 땀을 닦을 수 있었다.  시간 정도 남았다. 노래, 춤 그리고 체력까지 3시간 걸렸다. 생각보다 빠듯하다.


이번엔 얼마나 엿같은 짓을 할지 보기로 했다.

영상에서 한 여성과 남성이 나왔다. 여기서 여성의 역할을 하면 된다고 한다. 그럴 줄 알았다.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데 내가 본 작품이 아니라 잘 모르겠다.


분위기가 냉랭한게 싸운 모양이다. 둘이 공원 벤치에 앉아 앞을 보고 있다.

"또 왜그래."


남자가 나즈막히 말하자 여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뭐가 또야."

"매번 같은 이유로 싸우는 것도 지치지 않아?"


"그러면 하질 말아야지. 왜 계속 알면서 하는데?"


여자가 담담하게 쏘아붙이자 남자는 스트레스 받는지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봤다.

"그러면 모질게 내치라는 거야? 어떻게 그래?"


남자가 말하자 여자는 그제야 남자를 쳐다보며 말한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길래 다른 여자랑 밥을 먹어. 그것도 너한테 대놓고 추파 던지는 여자랑. 응?"

"무슨 추파... 그냥 단지 밥 먹은거야. 왜 그렇게 예민해."

여기까지만 들으면 여자가 예민해 보였다.

"예민하다고 내가? 그럼 너가 그 여자한테 선물한 목걸이는 뭔데! 모를 줄 알았어?"


여자는 슬슬 자기 분에 못이기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남자도 고개를 다시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걔가 먼저 내 생일을 챙겨줬는데 어떻게 나는 모른척 해. 비싼거도 아닌데. 어?"


그래도 목걸이는 선 넘었다. 사과도 아니고 목걸이 가격을 왜 말하는걸까. 어이가 없다.


"그걸 말이라고..."

여자는 살짝 글썽이는 눈으로 어이가 없다는 듯 남자를 쳐다봤다. 나랑 통했다.


그런데 남자는 오히려 여자가 너무 질척댄다는 눈빛이었다.

순간 여자에게 몰입해서 봤더니 남자가 너무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너한테 훨씬 좋은 목걸이 선물해 줬잖아. 뭐가 문제야?"


오히려 반문하는 그로 인해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이런게 다 문제야! 그냥 선물 차이 때문에 화난거로 보여? 내가 그렇게 속물같아?"


"그러면 왜. 내가 사귀는건 너인데 왜 그렇게 질투하는거야?"


그녀는 순간 올라오는 화를 참으려 했다. 하지만 정말 짜게 식은  한 남자의 얼굴을 보자 다시 화가 솟구쳤다.


"이게 왜 질투야! 당연한 반응이지! 또 이렇게 매번 네 행동이 아니고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말투도 짜증나!"

그런 그녀의 행동에 남자는 오히려 역정을 냈다.


"그렇게 짜증나면 헤어져. 나도  집착 질려!"


"그래 헤어져!  쓰레기야!"

여자는 소리치듯 말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대편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떠났다.


이게 영상의 끝이었다.

집중해서 보고 나니까 어떻게 연기해야 하나 막막했다.

영상이 끝나고 앞에는 대본이 나왔다.

"후우."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름 짧다면 짧은 연기고 대사를 외울 필요도 없었지만 하기 망설여졌다. 내가 전문 연기자도 아니고 학창시절에 수행평가로 해본게 전부다.


화면엔 [대사를 클릭하세요]라는 말이 써져 있었다. 맨 처음 남자 대사를 누르자 "또 왜그래." 하고 말이 나왔다.

다음 대사를 한 번 해봤다.


"뭐가 또야...악!"

너무 오그라들어서 집중이 안됐다. 나는 손을 쥐었다 폈다를 몇 번 했다.

내 뺨을 다시 찹찹 때렸다. 집중해서  끝내야 했다.


[엘리스 3단계 통과. 4단계는 연기력입니다. 주어진 대사와 연기를 따라하세요.]

알람이 나왔다. 엘리스도 마지막 연기를 해야 한다. 그나마 위안이 됐다.


심호흡을 하고 화를  참은 느낌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뭐가 또야."


그러자 앞에 있던 대사 창에서 내가 말한 부분이 색칠이 됐다. 저런 식으로 대사 통과를 알려주는 모양이다. 꽤나 험난한 여정이 될 것 같다.

[줄리 2단계 통과. 3단계는 체력입니다. 주어진 동작들을 바른 자세로 따라하세요.]

줄리는 이제 2단계를 통과했다. 50분밖에 안남았는데 큰일이다. 나도 살짝 조급해졌다.

남자 대사를 누르자 목소리가 나왔다. 나는 다음 대사를 했다.


"그러면 하질 말아야지. 왜 계속 알면서 하는데?"


꽤나 진지하게 했는데 색칠이 되질 않았다. 뭐가 부족했기에 통과가 안될까.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원망하는 마음을 담아야 하나? 전에 여자친구와 다투던 때를 떠올렸다.


그녀와 다툰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결국 싸움의 원인은 서로에 대한 이해 부족, 배려 부족이었다.


이 영상에서 나온 싸움에서는 남자가 이미 여자와 헤어질 생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좀 오래 사귀다가 권태를 막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그녀가 먼저 이별을 권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계약이 끝난 관계처럼 그 이후에 만나지 않았다. 살짝 예상했었는지 헤어지던 날도 울지는 않았다. 그녀는  지내고 있나 가끔 궁금하긴 하지만 그 생각이 오래 가진 않는다.

만약 이렇게 헤어졌다고 상상해봤다. 여자친구가 다른 사람을 만나 밥을 먹고 선물도 준다.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난다. 그리고는 내가 화를 내면 오히려  화났냐고 물어본다.


내가 화날  알고 있었지만 같은 이유로 싸우기 싫다는 말을 먼저 하는 그녀에게 난 뭐라고 해줄 수 있을까.

"그러면 하질 말아야지... 왜 계속 알면서 하는데?"

속상함을 참고 일단 이유를 묻기 위해 말을 건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움찔거렸다. 그러자 대사에 색칠이 되었다. 표정도 점수에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감정이 깨지기 전에 다음 대사를 눌렀다.


"그러면 모질게 내치라는 거야? 어떻게 그래?"


여자친구로 계속 대입해서 생각한다. 그 남자는 단지 친구야. 너의 질투 때문에 내가 헤어져야해?  그렇게 예민해?

말만 들으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대놓고  여자친구에게 작업을 걸고 추파를 던지는 놈이다. 예민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내 여자친구가 그 남자에게 선물까지 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길래 다른 여자랑 밥을 먹어. 그것도 너한테 대놓고 추파 던지는 여자랑. 응?"


점점 진심으로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원래 이렇게 몰입을 잘하는 스타일이었나 싶다가도 계속 다음 대사를 이었다. 남자 배우가 말했다.

"무슨 추파... 그냥 단지 밥 먹은거야.  그렇게 예민해."


내가 이렇게 대놓고 서운함과 속상함을 티내는데 오히려 나를 힐난한다. 이게 진짜 애인인가?


"예민하다고 내가? 그럼 너가 그 남자한테... 아이고."


너무 몰입해서 진짜 여자친구한테 말한다 생각했다. 대사는 그대로 읽어야 하는데 틀려버렸다.


다시 집중해서 남자의 대사를 들었다. 배우가 연기를 잘해서 나도 다시 몰입이 됐다. 내 대사를 틀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말했다.

"예민하다고 내가? 그럼 너가 그 여자한테 선물한 목걸이는 뭔데! 모를 줄 알았어?"


"걔가 먼저 내 생일을 챙겨줬는데 어떻게 나는 모른척 해. 비싼거도 아닌데. 어?"

순간 이런 대답을 진짜로 들었다는 느낌이 들자 오히려 머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걸 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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