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1화 〉7일차 (31/94)



〈 31화 〉7일차

"하나! 둘!"

그녀의 구령에 맞춰 하다 보니 점점 동작이 자연스러워졌다. 처음엔 왜 해야 하나 싶던  배우기에 의욕이 생겼다.


익히는데 거의 1시간이나 걸렸다. 움직일 때 마다 걸리는 머리카락이 꽤나 불편했다.

다시 구령을 해주는 춤 선생님의 박자에 따라 동작을 했다. 처음 움직일 땐 엄청 창피했는데 지금은 나름 할 만 했다.

"정말  하셨어요! 실제로 가서 직접 지도 해드리고 싶은데. 정말 아쉽네요. 이제 거울을 보며 마저 익혀볼까요?"

거울이 어디있나 두리번 거렸더니 뒤에 생겨났다. 안무실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거울이었다. 작은 방 한 면이 거울로 차자 기분이 이상했다.


"제가 구령을 하면 1번 동작부터 하는 거예요. 아셨죠?"


"네."

대답은 하긴 했는데 거울을 보니 도저히 움직일 엄두가 안났다.

거울 속에 나는 겨우 스포츠 브래지어에 검은 팬티를 입은 여성이었다. 페널티를 받지 않기 위해 연습을 하긴 했지만 이건 아니었다.

순간 머리가 하얘지며 몸이 움츠러 들었다.

[제니퍼 1단계 통과. 2단계는 춤입니다. 영상에 나오는 춤을 외워서 바른 자세로 따라하세요.]


그  제니퍼의 통과 소식이 들렸다. 줄리는 아직도 통과를 못하고 헤메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망설이다 시간이 더 갈지도 모른다.

심호흡 몇 번을 더 한뒤 외우고 있던 춤을 췄다. 내 얼굴이 터질  새빨갛게 변한  또한 거울로 보였다.

뒤에서 신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확실히 외우신게 보이네요. 진짜 최고예요. 이제 노래에 맞춰 하시면 됩니다!"

그녀는 바로 노래를 틀고 신호를 줬다.

예상보다 빠른 박자에 동작들이 헷깔리기 시작했다.

"거기서는 턴을 하셨어야죠. 다시 처음부터!"


자세를 잡고 또 다시 추기 시작했다. 자괴감이 미친듯이 차오르며 몸이 또 움츠러 들었다. 한 번에 끝내는게 더 좋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있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자.잠시만요!"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뒤돌아서 춤 선생님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깐 쉬라고 대답했다.

나도 이런 내가 답답했다. 눈 꼭 감고 하면 된다며 스스로 다짐하지만 마음처럼 되면 그게 사람일까.

엉금엉금 기어서 옆에 치워놨던 물통을 들었다. 틀리고 싶지 않은데 수치심으로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거울이 차라리 없는게 나았을 것이다.


뒤에서 거울을 보며 자세를 고치라고 뭐라 했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물을  모금 마시고 나니 여기와서 뭔가를 마시는게 얼마만인지 몰랐다.

마시는 행위마저 소중하게 느껴졌다.

배부르게 마시고 싶은 욕심을 접고 물통을 내려놨다. 눈길이 계속 물통으로 갔다.


마음이 좀 차분해졌다. 지금이라면 성공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팍 왔다.

"지금 해주세요."

"좋아요! 이번엔 꼭 성공 하자고요!"


나보다 그녀가 더 긴장한 모습이었다. 다시 뒤돌아 거울을 보고 자세를 잡았다.

팬티바람에 남들 앞에서 춤추는 것이 얼마나 큰 다짐을 필요로 하는지는 경험해봐야 알 것이다. 이런 경험을 할 일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싶었지만.


정신을 차리기 위해 뺨을 찹찹 때렸다.


"후우."

심호흡 한 번 내뱉고 음악에 맞춰 동작을 이었다.


기왕 하는거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동작도 크게크게 했다. 쭉쭉 뻗고 팍팍 움직이자 뒤에서 그녀가 칭찬하는 소리가 들렸다.


간신히 음악 앞부분에 맞는 동작들을 성공했다. 겨우 이 동작 추려고 1시간을 넘게 연습해야 한다는게 찝찝했다.


심지어 완벽한 동작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작은 성취감을 느꼈다.


흐르는 땀이 눈을 따갑게 했다. 얼굴에 늘러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 한 건 맞으니까 자신에게 칭찬해줬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다. 순수히 통과했다는 안심에서 나오는 미소였다.


[세리아 2단계 통과. 3단계는 체력입니다. 주어진 동작들을 바른 자세로 따라하세요.]

통과 소식이 울려 퍼졌다.

"세리아! 언제나 응원하니까 꼭 1등 하세요! 아자!"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나를 응원해줬다. 하긴 이 짓거리를 하는 놈들이 못된 것이지  여성은 어떤 잘못도 없다.

순수히 응원해주는 모습에 나는 잘가라고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엄청나게 좋아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끝으로 영상이 꺼졌다. 나도 모르게 팬서비스처럼 되어 버렸는데 의도한 것은 아니였다.

잠시 후 다른 영상이 나왔다. 거대한 표 처럼 생겼는데 내가 해야 할 목록들이 씌여있었다.

윗몸일으키기 30회, 팔굽혀 펴기 10회, 줄넘기 200회

벌써부터 몸이 땡기는데  일이었다. 그나마 저 3개만 한다면 다행이다.


뒤를 돌아 보자 윗몸일으키기를 할 수 있게 장비가 나와있었다. 망설이면  하기 싫으니까 바로 누웠다.


"흡! 흡!"

기합을 넣으며 윗몸일으키기 30회를 마쳤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20개 넘으면서 살짝 괴롭긴 했는데 참을 만 했다.

그러자 윗몸일으키기 30회가 씌여져 있던 칸이 사라지며 스쿼트 50회가 생겨났다. 나는 풀썩 쓰러졌다. 이건 아니지.


[줄리 1단계 통과. 2단계는 춤입니다. 영상에 나오는 춤을 외워서 바른 자세로 따라하세요.]

내가 쉬는 동안에 줄리가 이제 노래를 통과했다. 벌써 2시간밖에 안남았는데 과연 4단계를 다 할  있을까? 내가 보기엔 무리였다.

자세를 잡고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역시나 5회가 넘어가자 팔이 부들거리며 너무 힘들었다. 엉덩이가 계속 올라갔다.


진짜 할  있을 때 까지 최선을 다 하려 했는데 8회만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겨우 10개도 이렇게 힘들다는게 억울해서 속이 쓰렸다.

올라오질 못하고 바들바들 떨다가 한계가 왔다. 여기서 나는 무릎을 살짝 꿇고 팔을 들었다. 그리고 옆을 보자 카운트를 해줬다.

이걸 봐주다니. 눈물나게 고마웠다. 처음부터 무릎 꿇는 건 안되고 내 한계에 어쩔 수 없이 꿇는 건 감안해주는 모양이다.

전에 횟수 체크가 안 된 이유는  수 있는 힘이 있어서 그랬다는  알 수 있었다. 내 신체 정보를 정확히 안다는게 무섭긴 했지만 융통성이 있어서 다행이다.

10개를  하고 나자 화면에선 팔 굽혀 펴기 칸이 사라지고 러닝머신 5km가 나왔다. 이게 정말 가능할까. 정해진 속력이 나오진 않았으니까  힘들면 걸어야겠다.

옆에 또 언제 생긴지 모를 줄넘기를 들었다. 200개 실패 없이 연속이 목표였다면 당장 때려치우고 벌러덩 누우려 했다. 확인해보자 누적이었다. 절로 안심의  숨이 나왔다.

[엘리스 2단계 통과. 3단계는 체력입니다. 주어진 동작들을 바른 자세로 따라하세요.]

마리보다 먼저 엘리스가 통과했다. 역시 체육계. 배우고 뭔가 몸으로 하는 것들은 다 잘하는 모양이다.

[마리 2단계 통과. 3단계는 체력입니다. 주어진 동작들을 바른 자세로 따라하세요.]


마리도 비슷하게 성공 알림이 나왔다. 이러면... 내가  둘보다 춤을 익히는데 오래 걸린다는 뜻 아닌가?

살짝 자존심이 상했지만 고개를 저어 털어냈다. 게다가 따라잡히기 시작하자 이상하게 초조해졌다. 어차피 각자 통과하는 시험이었지만 미묘한 경쟁심리가 생겼다.

거울은 사라지질 않아서 내가 줄넘기 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디 스포츠 웨어나 음료 광고에서 본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 선수는 팬티바람은 아니었지만 상체는 비슷하다. 거울을 멍하니 보며 줄넘기를 넘는데 그 안에 있는 내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직 외모가 낯설어서 그런  알고 있지만 기분이 나빠졌다. 역시 외모가 사람의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게 맞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바뀐다고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건 아니지만, 전에 존재하던 사회적인 나는 사라지는게 확실하다.

당장  상태로 집에 돌아간다면 주변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진짜 만에 하나 1등을 달성해 탈출 하더라도 모습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지금은 이런 생각이 종종 든다. 정말 아름다운 여성으로 사는 것이 전의 나 보다 행복하지 않을까? 남자로 살던 나보다 신체적으로 우월해진 상태가 아닐까.

아까 춤 가르쳐 준 여성만 봐도 그렇다. 원래  모습이었다면 그녀는 그렇게 기뻐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쁘고 귀여운 여성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니까 기뻐했다고 보는게 맞았다.

심지어 가족이나 친구들도 평범한 취준생 남자인 나보다 화려한 아이돌 세리아를 원할  있다.


그렇다고 사회적인 시선에 나를 맞춰 사는게 날 위한 삶일까?

여기서  다른 의문이 든다. 나는 정말  모습이 싫고,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들은 확실한가.

사람은 상황과 주변 환경에 맞춰 변화한다.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는 초심을 잃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한 걸음  나아갔다고 말한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변한 본인들에게 만족할까 아니면 옛날을 아쉬워할까.

이젠 모르겠다.


내가 여자로 변한 건 내 의지가 아니지만  보며 삿대질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여전히 여성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뭐라 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만약 강제로 여자가 된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면 동성애자인가 이성애자인가. 결국 다들 자기 좋을대로 생각한다.

벌써 줄넘기가 끝났다. 다행히도 줄넘기 칸이 사라지며 새로운 운동이 나오진 않았다. 이 와중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운동 나왔으면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하기 힘들었다.


다리를 몇  풀고 스쿼트를 할 준비를 하며 계속 생각했다.

어제 나눴던 얘기가 스쳐갔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과거의 내 모습, 남성에 집착한다고 보여지는 이유는 그들이 변화하는 자신에 만족했기 때문이겠지.


일주일만에 자신의 근간이 흔들리는데 멀쩡한 사람이 오히려 더 비정상 아닐까.


그러면 나는 한  뒤에 어떻게 변해있을까.  몸에 만족하게 되어 여자로 살고 싶어하는 상황이 될까?

거울에 스쿼트를 하는 내 모습이 보인다. 매끈한 겨드랑이부터 허벅지 근육 라인까지 모델 뺨치는 모습이다.


전에 이런 여성을 봤다면 넋 놓고 구경했을 것이다. 그게 내가 됐다니. 힘든 와중에도 허탈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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