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5화 〉6일차 (25/94)



〈 25화 〉6일차

"앞으로는 내가  고를지 맞추기 힘들거야."

내가 피하는게 맞았다. 다른 사람도 충분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핫! 우리는  통하니까 잘 맞을지도요?"

다시 표정이 해맑아졌다. 대단한 녀석이다. 그래도 한 마디 해줬다.

"하지만 내 개조가 기다려 진다는건 용서 못해. 내가 그거에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지 알잖아."

"그건. 죄송해요. 진짜 단지 기대가 돼서 말했는데. 상처될 줄도 모르고 너무 제 생각만 했네요."


다시 마리는 시무룩 해졌다. 진짜 애같다. 물론 엘리스와 다른 의미였다.

"그래. 이번은 용서해 줄께. 하지만 누군가에게 예민한 그런 말은 조심하는게 맞아. 앞으로  많은 사람을 만난다면 말야."


"네. 고마워요. 조심할께요."

나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 건드려 줬다. 마리는 다시 멋쩍게 웃었다. 우리 분위기가 괜찮아지자 줄리도 슬금슬금 다가왔다. 잘못 휘말릴까봐 걱정한 모양이다.


우리가 뭐 치고박고 싸울  알았나? 정말 가끔 줄리는 이렇게 이기적인 행동을 보였다. 차라리 대놓고 그런 사람이라면 모르겠는데 착한 사람인건 맞아서   그렇다. 이런 모습이 보이면 괜히 기분이 나빴다.


한 차례 정리가 되자 이제야 주변이 보였다. 어제 체력장을 했던 곳 처럼 작은 원룸같은 하얀 방이었다. 앞에는 다른 3개 방들도 보여졌는데 '악수' 방과 '포옹' 방에 각각 엘리스와 제니퍼가 있었다. 꽤나 머리를 잘 썼다.

그 때 MC의 말이 나왔다.


[1번방에 세 명이 들어가게 되었으므로 점수 마이너스 1점씩에 페널티가 들어갑니다! 페널티는 바로 '취기'입니다!]


당연히 나체일줄 알았는데 취기가 나왔다. 순간 그나마 괜찮다고 생각했다가 아니라는걸 깨달았다. 어떤 의미로 보면 이게 더 문제 아닌가?


나는 시야가 살짝 어지러워지고 기분도 상당히 업 됐다. 얼큰하게 취해서 맛탱이 가기 전의 느낌이다.  소주  잔만 더 마시면 골로 갈 정도의 취기였다.


주변을 보자 줄리가 벽에 기대어 앉은 채 허공을 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헤롱헤롱한 이 느낌을 처음 받아서 그런 모양이다.

줄리는 기분이 어떠려나? 술은 잘마시나? 나는 살짝 들떠서 물어보려 했다. 그런데 줄리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나는 당황스러워서 아무  못했다.

내가 우물쭈물 하고 있자 내 옆에 앉아있던 마리는 히끅 대며 딸꾹질을 하더니 나를 몽롱하게 쳐다봤다. 나는 소름이 쫙 돋았다.

사실상 마리는 이렇게 취한 적이 없는게 분명했다. 겨우 20세니까 신입생 환영회 같은 곳을 갔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같이 마셔줄 친구도 없었다!

순간 불쌍하게 여겨져 안타까운 마음으로 마리를 쳐다봤다. 이렇게 예쁜 애가  그런 일을 겪었을까. 그러다 원래 이렇게 안생겼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못생긴 놈이 애들에게 다가가기는 커녕 음습하게 소설이나 읽으니 애들이 안 다가오지! 불쌍한 마음이  가셨다.


그러나 이렇게 사실은 활발하고 애같은 사람이 겨우 외모 때문에 기죽어 살았을 거라 생각하면  안타까웠다. 취기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지고 감정이 왔다갔다 한다.


마리는 에헤헤 하고 웃었다. 다시 정신이 확 들었다. 점점 다가오는 마리로부터 슬쩍 물러섰다.


"세리아아. 왜에 피해요오."

그녀는 늘어지게 말하며 서운해 하더니 급 발진하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피하려 했다. 그러나 마리는 다가오기도 전에 고꾸라졌다. 취기 때문에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야야."

바닥에 머리를 박아놓고도 다시 실실 웃는다. 이거 꽤 무섭다.

술 마신 첫 날 개 되는 사람들 정말 많이 봤다. 특히 대학교 가면 대 환장 파티가 밤새 일어난다. 미친듯이 먹고 마시던 그 때 생각이 났다.

"어엉. 흐어엉."


추억에 잠겨있는데 옆에있던 줄리는 이젠 대놓고 대성통곡 중이다. 여기서 30분을 버티라고? 이건 지옥이었다. 조건은 빨리 해결되는데 30분을 주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비틀대며 일어났다. 벽을 짚으며 서자 바닥에 엎드려 누워있던 마리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초점이 풀려있었다.

무시하고 벽으로 가서 미친듯 두드리며 외쳤다.

"사람 살려요오! 제에발!"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말이 늘어지며 나왔다. 한참을 두들기던 나는 다시 바닥에 철푸덕 앉았다. 역시 아무 소용 없었다. 한숨이 푹푹 나왔다.


이번엔 마리가 줄리에게 기어서 다가갔다.

"주~리! 왜에 우러요오...우...응"

그러더니 순식간에 따라서 울기 시작했다. 둘의 울음 이중주가 순식간에 펼쳐졌다.

"허엉."


"흐끅. 으흐흑."

나는 방의 구석을 찾아 몸을 질질 끌고 가서 앉았다. 정신이 나갈 것 같다.

덩달아 울컥대는 감정을 간신히 추스렸다. 하마터면 나도 동조되어 같이 울 뻔 했다.

마른 세수를 했다. 그러나 눈 부분이 상당히 촉촉했다.

몰랐는데 나는 자각도 못한 채 울고 있었다. 감정을 추스렸다 생각했는데 이미 질질 짜고 있었다니. 이런 감정도 조절 못하는게 서러워서 나도 눈물이 나고 말았다.


"흑...흑."

난 구석에서 쭈구려 앉아 얼굴을 묻고 숨죽여 울었다.

왜 내가 여기서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할까. 억울하고 슬펐다. 내가 싫다는데  계속 여자로 만드려 하는 걸까.


울다보면 풀릴 줄 알았는데 더 서글퍼졌다. 겨우 6일째라는 것도 슬프고 이제 1라운드라는 것도 슬프고 하필 여기에 셋이 모였다는 것도 슬펐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 때문에 엉엉 울지는 못했지만 끕끕대며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30분이 흘러갔다.

[자! 그럼 2라운드를 진행하겠습니다!]


우리는 각자 방으로 옮겨졌다.






[1번방은 '악수' 방. 2번 방은 '포옹' 방. 3번방은 '뽀뽀' 방. 4번 방은 '키스' 방입니다. 10분동안 선택해 주세요!]

수위가 올라갔다. 나는 아직까지도 슬픔이 가시질 않았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눈물 범벅인 얼굴을 마구 문질러 닦았다.


키스방은 어감부터 별로였다. 원래 술에 잔뜩 취해도 저런 곳은 안간다. 나는 훌쩍이며 1번과 2번중에서 고민했다.

1번은 30분간 하면 손에 땀날  같다. 아니 한 번만 하면 됐었나? 어쨌든 벌써 손에 땀 차는 기분이다.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진 나는 별 고민도 안하고 2번을 골랐다.

너무 빨리 골랐는지 시간이 엄청 많이 남았다.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등이 차가워서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씩 하고 웃었다.

술에 취하면 매번 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굉장히 어질어질하고 피곤한데 잠이 오진 않았다. 그래도 마음은 평온해졌다.

여기 와서 처음으로 마음이 평안해진 느낌이다. 이래서 알콜 중독자들이 술을 못 끊고 마시나 보다. 현실이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 수록 취기가 달콤했다.


생각해보면 여기와서가 아니고 여태 살면서 술마신 뒤에 이렇게까지 기분 좋은 적은 처음이다. 고민이 하나도 생각 안나니까 즐거웠다.

"하아."

머리가 어지러운데 오히려 평소보다 덜 지끈거렸다. 스트레스가 정말 많이 쌓여있던게 분명하다. 이렇게 편하게 살아야 하는데.


아까는 10분이 길게 느껴졌는데 금방 끝났다.


[자! 각 방으로 이동해주세요!]

누워있던 상태 그대로 이동했다. 눈을 살짝 뜨자 엘리스가 있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또 감점이 되고 말았다. 억울해서 눈물이 나왔다. 나는 꼴등이 될  분명했다.


"흑..."


"야... 야! 왜 울어!"


그러자 엘리스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나는 또 큭큭 웃었다. 나도 내가 미친  같다.


술 취하면 바로 자는 스타일이다 보니  술 버릇을 몰랐다. 조금 우울해 하다가 자는게 술 버릇인줄 알았는데 계속 깨있으면 이렇게 되나보다. 눈물을 닦으려고 얼굴을  비볐다.

[1번방과 2번방에 각각 2명이 들어가게 되었으므로 마이너스 1점씩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 조건을 실행해 주세요! 지키지 않으면 벌점입니다!]

다른 방을 보자 제니퍼와 줄리가 1번방에서 악수를 하고 있었다. 줄리가 제니퍼의 손을 열심히 매만지며 하소연 중이었다. 제니퍼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원래 취한 사람은 별로 안힘들다. 주변 사람이 힘들지.

마리는 어디로 갔나 보자 '키스' 방에 있었다. 그녀는 자기도 키스하고 싶다며 소리치고 있었다.

역시 동정처녀라 그런지 술에 꽐라가 되자 욕망을 열심히 분출중이었다.

나는 엘리스를 지긋이 쳐다봤다. 그가 얼굴을 붉혔다.

"뭐."

괜히 머쓱한지 한 마디 한다. 확실히 얼굴이 무기긴 했다. 엘리스는 그냥 여자로밖에 안 보였다. 쑥스러워서 튕기는 여자애 같다.

'난 남자니까 여자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거야.' 이런 생각이 들자 포옹이 오히려 괜찮은 조건이다. 예쁜 여성이랑 포옹할 기회가 있는데 당연히 기분 좋지 않은가?


그러다 엘리스는 남자라는게 떠올랐다. 나는 시무룩 해졌다. 그래도 아무 말 하지 않으면 서로 만족하는 거 아닌가? 별로 고민하고 싶지 않아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의 모습을 제외하고 서로만 생각하면 예쁜 여성을 끌어안는 상황인 것이다! 놀라운 발상이었다.


어쨌든 미션은 해야 하니까 비틀거리며 벽을 잡고 일어났다.


내가 팔을 벌리자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게 안겼다. 한 번 그를 여성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자 나름 괜찮은 기회처럼 여겨졌다. 예쁜 여자를 안아볼 기회는 많이 없으니까.

나는 그를 꼭 껴안았다.


"힉! 너...너무 꽉 포옹할 필요는 없어!"


그가 살짝 몸부림 쳤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안고는 가만히 있었다. 그도 별다른 말 없이 조용하게 숨을 내쉬었다.

엘리스는 나보다 키가 더 크기 때문에 내가 살짝 안긴 모양새지만  어떤가. 나보다 큰 이쁜 여성과 포옹하는게 뭐 어때서.


그의 머리카락이  볼을 간질였다. 사실상  다 러닝셔츠 차림이었기 때문에 서로의 온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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