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6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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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차
지옥같은 나날들이다. 습관처럼 일어나자마자 양치를 했다. 다 닦고 나자 갑자기 소변도 마려워졌다. 습관적으로 서서 싸려다 밋밋한 하반신이 보였다.
"..."
한숨을 쉬고 양변기에 털썩 앉아 소변을 봤다. 아침부터 기분이 더러웠다.
조르르 싸는 소리도 볼품없고 너무 작은 자지라 털리지도 않아서 휴지로 닦았다. 벌써 여자랑 다를 게 없다.
애써 담담하게 볼 일을 마치고 손을 씻다가 이를 닦으러 온 제니퍼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싸는 걸 다 본 모양인지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다시 기분이 잡쳤다.
이래도 내가 예민한 걸까? 다들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처럼 보인다. 아니면 속으로는 괴로워 하지만 티를 안내는 걸까?
많은 사람이 생각보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괴로우면 속으로 삼킨다. 나는 예전부터 이해가 안가거나 스트레스 받으면 말 하는 용기를 키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혼자 썩힌다.
그러니까 자살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풀어줄 줄도 알아야 하는데 사람들이 자신에 맞게 제대로 푸는 법을 모른다.
스트레스는 많은 방법으로 풀어진다. 매운 음식을 먹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하거나. 그것이 노래든 게임이든 다양한 형태로 가능하다. 그러나 이 곳은 먹지도 못하고 사생활도 없다.
말로 내뱉으며 스트레스를 풀기 전의 나는 피아노를 쳤다. 그 때는 인내심을 키운다고 하지만 끙끙 앓는게 일상이었다.
그래서 미친듯이 피아노를 치면 손가락부터 팔목, 팔. 심지어는 등까지 아프다. 이런 고통으로 스트레스를 잊었다.
마치 매운 음식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남는게 많은 방법이었다. 그 때는 음악을 엄청 좋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피아노 치는 방식이 정상은 아니라서 남들처럼 음악으로 다양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대가나 거장들을 보면 미세한 손떨림이나 강약으로 감정을 전달하는데 내 방식은 스트레스 푸는 용도였으니까.
그리고 말로 스트레스를 풀기 시작하면서 피아노 치는 시간은 자연히 줄었다.
부모님과 선생님 모두 아쉬워했다. 그러나 내가 안치겠다는데 주변 사람들이 무슨 힘이 있을까.
예전부터 끈기나 오기, 결단력이 강했던건 아니다. 노력하다보니 점차 그렇게 바뀐 것이다. 언뜻 보면 고집이 강해보일 수 있지만 논리적으로 반박한다면 수긍도 할 줄 안다.
지금 이런 얘기를 왜 하냐면 지금 내가 좋아하는 말로도 스트레스가 안풀리기 때문이다. 나는 혹시나 하고 방을 뒤져서 박혀있는 전자피아노를 찾았다. 정말 있었다.
그러나 막상 치려 하자 전자피아노는 치는 맛이 안난다. 다시 제자리에 집어넣었다.
"아."
제니퍼가 뒤에서 날 보고 있던 모양이다. 내가 다시 집어넣고 안치니까 아쉬워했다. 듣고 싶었나 보다.
아직도 마리나 엘리스는 침대에서 뒹굴대는데 제니퍼는 꽤나 부지런했다. 줄리는 항상 한박자 뒤에 일어나 느긋하게 혼자 씻었다. 현명하다.
"여기서 그랜드피아노 주면 쳐줄게."
"설마 줄까요."
나는 내가 말해놓고도 큭 웃고 말았다. 중학생 때 까지는 신물나게 쳤지만 그 이후엔 취미로 가끔 두들기는게 다였다.
"너무 기대하진 마. 제대로 안 친지 10년도 더 됐어."
"그래도요."
그녀가 살풋 웃었다.
하얀 스포츠 브라와 검은 여성용 팬티 때문에 확실히 여자로 보인다.
아니 솔직히 제니퍼의 긴 머리와 얼굴, 목소리만 봐도 남자라 하는게 웃기다. 여성기도 있으니 생물학적으론 여자가 맞다. 또 머리가 지끈거린다. 나는 내 뺨을 찹찹 때렸다.
확실히 그녀를 보고 나도 생각이 바뀐게 많다. 프로게이머는 컴퓨터 앞에 박혀서 게임만 할 줄 알았는데 운동도 하고 취미활동도 했다. 선입견이 좀 있었나 보다.
사실 내가 게임을 많이 안해서 그런 것도 좀 있다. 어렸을 땐 피아노 치고, 대학 들어가서는 술마시고. 군대 다녀와서는 졸업하고 취직하기에 바빠서 하지 못했다.
애들 피시방 간다 하면 나는 '너희들 재밌게 놀아라!' 하고 집에 갔던 기억이 난다. '게임을 잘 못해도 어울려서 할 걸.' 이란 생각이 스친다.
후회도 잘 안 하는 편인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마음이 약해지는 모양이다.
오늘도 종류가 다른 게임을 하러 가야한다. 학교나 군대도 주말은 쉬게 해주는데 여긴 너무하다. 6일차면 쉬게 해줘야 하는거 아닌가.
하지만 불평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에휴. 이렇게 참는 것도 다 스트레스다.
[오늘도 새로운 게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와! 짝짝짝! 두근대지 않나요?]
눈을 살짝 뜨자 오늘도 혼자있었다.
이젠 어떤 게임일지 예상이 잘 안됐다. 예측하기 귀찮은 마음도 좀 있다. 실력게임도 다시 나올 만 한데 애매하게 실력게임을 냈다간 체력게임이 돼서 어제처럼 앨리스 승리 독식이다.
[오늘 게임 제목은 바로! 비둘기집 게임입니다!]
이름만 들어서는 애매하다.
[비둘기집 원리를 알고계시나요? 바로 '비둘기 일곱 마리가 여섯 개의 집에 들어 있으면 비둘기가 두 마리 또는 그 이상 들어 있는 집이 적어도 하나 있다.'는 원리입니다.]
예전 수학의 정석 책에서 본 기억이 났다. 나는 게임 룰을 깨닫고 머리를 짚었다. 운게임이다. 이름은 그냥 있어 보이려고 붙인 모양이다.
[4개의 방이 있고 그들의 선택에 따라 각 방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여기서 2명이 된 방은 감점! 3명이 된 방은 패널티 추가! 하지만 4명 이상부터는 추가 점수를 드립니다!]
아무것도 없이 선택지를 줄 리 없다.
[그냥 운으로 고르면 재미 없겠죠? 4개의 방은 각각 조건이 있습니다.
1번방은 '아무것도 안하기' 방. 2번 방은 '악수' 방. 3번방은 '포옹'방. 4번 방은 '뽀뽀' 방입니다. 귀엽지 않나요? 규칙은 단순합니다! 방에 들어온 사람과 방 조건을 하면 됩니다!]
이제 나까지 변하고 나니까 확실히 볼 맛이 살아났나보다. 바로 스킨쉽 게임을 시작해버렸다.
[총 4라운드로 게임이 진행되고 각 라운드 마다 30분 안에 조건을 이행해야 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 바로 매 라운드 마다 방 조건은 변화합니다! 어떤 조건이 나올지 궁금한게 벌써 재밌어지는데요? 그럼 10분을 드릴 테니 골라주세요!]
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어제부터 내가 그 지랄를 떨며 말했는데 1번방엔 안오지 않을까? 아니면 한 번 더 꽈서 2번이나 3번을 갔을까? 4번은 절대 아니다.
다 같이 1번에 가서 평화 엔딩을 본다면 다행인데 이젠 다들 호락호락 하지 않다. 뒤통수 쳐맞고 마이너스 점수 받을게 뻔했다.
그렇다고 역배를 노리고 4번을 골랐다가 다른 사람 만나면 어떻게 30분 안에 뽀뽀 한 단 말인가. 죽어도 싫다.
볼뽀뽀도 봐주나? 살짝 고민해 봤지만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아니다.
곰곰히 생각해보자 굳이 하라면 할 순 있긴 하겠다. 뽀뽀 정도야 30분 내내가 아니고 한 번 이면 가능 하다. 그래도 께름직하다.
1, 2, 3번은 쉽게 봐줄 만 했다. 악수나 포옹 정도는 가볍다.
결정했다.
나는 1번을 골랐다. 아무것도 안하는게 제일 좋다. 겹치더라도 아무 행동 안하는게 나았다. 다들 다른 곳으로 가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아예 다 오거나.
내가 간절히 비는 사이 10분이 지났다.
[자! 각 방으로 이동해주세요!]
눈을 감았다가 뜨자 내 옆에는 마리와 줄리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셋이었다.
"아나."
나는 머리를 탁 짚었다. 내 기도는 하나도 통하지를 않았다. 어떻게 1라운드부터 3명이 있을 수 있나. 하늘도 무심하시지. 차라리 넷을 주던가!
옆에 있는 줄리도 울상인 얼굴인데 마리는 방긋방긋 해맑았다.
"왜 이렇게 좋아해?"
내가 궁금해서 묻자 마리는 답했다.
"저는 이걸 노렸으니까요."
"?"
줄리가 가운데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뭘 노려?"
"세리아랑 같은 방에 가는거요."
"왜?"
나는 의아해졌다. 그러자 마리는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세리아가 어서 예뻐지는 것을 보고싶어서요. 헤헷."
순간 열이 확 올랐다. 어이가 없었다. 진짜. 진짜로 어처구니가 없다.
"날 대놓고 저격하겠다는 거야?"
나도 모르게 톡 쏘듯이 몰아붙였다. 그러나 마리는 어떻게 마음을 먹었는지 끄떡도 안했다.
"음. 네. 근데 사적인거 제외하고 게임적으로 봐도 1등인 세리아를 견제하는게 맞잖아요."
"그건..."
그건 맞다. 그런데 저렇게 해맑게 말하면 저격당하는 입장에서 화 날 수 밖에 없다.
"평소라면 한 번 꽈서 다른 데 가셨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는데 통해서 다행이예요."
내 표정이 심각해지자 줄리는 우리에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저건 무슨 반응이야.
푸른 빛 머리를 트윈테일로 묶고 날 향해 생글생글 웃는 마리에게 뺨을 날릴 수도 없었다. 확실히 외모가 깡패긴 했다. 이런 짓거리를 해도 귀엽게 보이는게 얼굴의 힘이다.
나는 그냥 바닥에 앉았다. 그런 내 옆에 마리가 따라 앉았다.
내가 아무 말 않자 그녀는 막상 저지르고는 내게 미움 받을까 걱정 됐는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화났어요?"
"그래. 근데 괜찮아졌어."
"진짜요?"
"그래."
물론 안 괜찮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여기서 화내면 저번에 얘기한 공정한 게임이 망가진다. 마리가 다른 사람들을 선동한 것도 아니고 날 일부러 도발하려 한 것도 아니다. 단지 그녀는 날 저격하는게 이번 게임의 전략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