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4일차
그는 혼자 빙고가 나온게 어지간히도 억울했나 보다.
"이것들 다 높은 숫자 썼나보네. 11 아래로 죽이는거 보니까. 응?"
이미 엘리스는 4점 감점이었다. 중간 숫자들에 감점까지 당했으니 거의 꼴찌 확정이다. 내가 예상 외라고 생각했던 것은 제니퍼였다.
그냥 많이 깎였는데 빙고가 안 된 것이라고 보기엔 담담해 보였다. 나에게 중간부분 칠하지 말자고 했던거 다 거짓말인가?
아니면 그는 9를 쓰고 마리와 줄리가 10, 11을 썼을 수 있다. 이게 제일 확률이 높아 보였다.
엘리스를 보고 있다보니 생각보다 빙고를 달성하기 힘든 것 같다. 설명 들을 땐 페널티를 받는 일이 많을 줄 알았는데 한 명 뿐이라니.
마리는 나에게 와서 물었다.
"5가 세리아 맞죠?"
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11 했거든요. 그래서 세리아가 10인지 5인지 헷깔렸어요."
그렇구나. 이미 게임은 기운 것 같다. 나는 남은 표를 19, 18에 넣는 선택지 밖에 없었다.
엘리스는 그나마 높은 이 둘중 하나를 없애겠지. 그럼 나머지를 내가 없애면 된다. 그리고 최대한 빙고가 안나오길 바랄 수 밖에.
줄리는 아까랑 똑같은 표정이었다. 마리의 말을 믿는다면 그가 10 아니면 9를 썼다. 정말 팀 없이 혼자 하는게 더 유리한 걸까?
사실상 엘리스는 제니퍼에게 배신당했다. 배신이랄 것도 없지. 처음에 편을 가른건 나였다.
나는 높은 숫자를 쓴 사람이 별로 없을 줄 알고 이렇게 나선건데 엘리스 빼곤 다 높은 수를 썼다.
나는 엘리스에게 갔다.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놀리러 왔냐?"
"아니. 도우러."
"돕긴 뭘 도와. 이미 난 꼴지나 다름 없는데."
엘리스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벌거벗고 웅크린 그가 굉장히 안쓰러워 보였다.
"나한테 숫자 어떻게 썼는지 말 해줘. 방안이 있을지도 몰라."
"내가 널 뭘 믿고...! 그래. 어차피 꼴등인데 뭐. 나 7부터 15까지 썼어. 그리고 세 개 칠해져서 한 줄 빙고고. 내가 너무 생각이 없었다. 내 실수야."
"9, 10, 11 칠했는데 한 줄 빙고가 나왔어? 순서대로 적진 않았나보네. 그냥 순서대로 적지."
"그렇게 까지 단순하진 않아. 얼마나 무시하는거야?"
지가 생각이 없었다고 해놓고 이건 또 발끈한다. 역시 남이 지적하는건 기분 나쁘다. 내가 뭐라 해도 내가 해야지.
"내가 19 해줄게. 일단 칠할 수 있는 것은 칠해보자. 물론 안 될 가능성은 높지만."
"그래. 고맙다."
그는 날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칠할 19였지만 밑밥을 깔아놨다. 좋은게 좋은거 아니겠는가?
나는 일어나서 줄리에게 갔다.
"줄리. 잘 되고 있나봐요?"
"내가 잘 될게 뭐가 있겠어. 혼자 그냥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
줄리가 웃었다. 생각보다 통달한 그런 웃음이라 기분이 미묘했다. 혼자 다른 게임 하는 중인 느낌이었다.
"이번에 높은 숫자좀 해줘요. 엘리스가 너무 힘이 없던데."
내가 엘리스를 걸고 넘어지며 찔러보자 그는 웃음을 그치고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누군가는 꼴등을 해야한다고 너가 말해줬잖아. 그게 이번 게임은 엘리스가 된 것 뿐이야.
첫 날 가위바위보 처럼 대놓고 운인 게임이나 이렇게 간접적으로 운 요소를 넣은 게임이나 똑같지.
어쭙잖은 동정은 엘리스에게도 그리 도움이 되지 못할걸?"
개조 당할 때 마다 벌벌 떨던 그가 이런 이야기를 담담하게 말하자 그의 의지가 느껴졌다. 좀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는 진심으로 1등을 하고 싶어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 말이 맞아요."
내가 누굴 챙기고 밀어줄 상황이 아니다. 나는 오늘 큰 실수를 할 뻔 했다. 그 실수는 바로 진심이 될 뻔 한 것.
진심이 되어도 상관은 없지만 뒤끝이 생겨버릴 수 있다. 앞으로 이 사람들과 계속 게임을 하는데 방해가 될 것이다.
줄리는 내 심적 경계선을 다시 세워주는 중요한 말을 해줬다. 운이든 뭐든 게임의 승패는 있었다. 하지만 이 말은 해야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챙기거나 밀어주는 것이 불가능 해 보여도 시도하는 모습이 주는 효과도 있어요.
저는 동정하는게 아니라 게임하는 중이예요. 걱정 마세요."
그는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너가 나보다 6살이나 적다는 것을 가끔 깜빡 한다니까. 정말. 그래. 알아서 잘 하겠지. 그래서 할 말은 그게 다야?"
"아뇨. 저는 줄리가 다음에 고를 숫자가 궁금해요."
그가 손사래를 쳤다.
"내가 말해준다고 뭐가 바뀌나? 그냥 받아들여. 운이지 뭐."
"저는 말해줄게요. 19 고를 거예요."
줄리는 팔짱을 끼고 날 쳐다봤다. 내 속셈을 읽으려는 모양이다.
"그래. 그 숫자 해 그럼."
그는 결국 나에게 말을 안해줬다.
나는 다시 마리에게 갔다. 그는 다가오는 나를 손을 들며 반겼다. 이 상황에도 해맑다니 참 대단하다. 나는 다짜고짜 말했다.
"난 이번에 19 할거야."
그러자 마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엥? 내가 하려 했는데?"
"?"
"?"
잠시 서로 말도 안하고 쳐다봤다. 마리가 먼저 말했다.
"지금 제니퍼랑 얘기 나눴거든요? 제니퍼가 저에게 그냥 솔직하게 말했어요. 자기도 지금 3개 칠해졌는데 빙고만 면했다고."
"아 진짜? 어떻게 그런... 설마 5 썼나?"
20을 썼을리는 없을 테니까. 자기가 고른 숫자 빼면 5가 남는다. 내가 고른 순간 엄청 당황했을 그가 상상되니까 살짝 웃겼다. 참 제니퍼도 운 없다.
"그래서 부탁 하던데요? 높은 숫자좀 써달라고. 머리를 잘못 썼다면서. 그래서 알겠다고 했어요. 저도 사실 20이랑 19 안썼거든요."
"그랬구만."
제니퍼에게 갈 이유가 사라졌다. 엘리스랑 마리가 19, 18을 없애준다면 나는 최대한 먹을 수 있는 숫자는 다 먹는게 된다.
약속을 지켜줘야만 그게 가능 하겠지만. 제니퍼랑 줄리가 무슨 숫자를 고를지 예상이 안 됐다.
나는 그대로 엘리스 옆으로 가 아무것도 안하고 앉아있었다. 그는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지만 벌거벗은 상태라 움직이질 않았다.
남은 시간동안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시간이 다 지나고 안내가 나왔다.
[2라운드 회의 시간이 끝났습니다!]
눈 앞이 깜깜해졌다가 다시 뜨자 옆에있던 엘리스는 사라졌다. 그리고 앞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17, 16, 15
14, 8, 13
12, - , -
[자! 10분 시작합니다! 그럼 다들 선택해 주세요!]
역시나 가장 먼저 19가 올라왔다. 나는 기다렸다. 그러자 정말 18도 올라왔다. 마리가 약속을 지킨 것일까.
그 다음 한 몇 분 지나자 17이 올라왔다. 나는 뭔가 싶었다. 누가 17을 골랐을까.
이정도 되니까 생각이 많아졌다. 다들 10대 숫자를 많이 쓰지 않았을까?
그러면 나는 내꺼에서 빙고가 안나오는 큰 숫자를 쓰는게 남들을 더 멕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썼을 때 어지간히 운 없지 않는 이상 빙고가 안나오는 숫자는 15였다.
16이나 13 나와서 빙고 생기면 그만큼 높은 숫자 쓴 사람도 그 숫자를 버린 것이니까 큰 타격 안 받을 것 같다.
한참 시간이 지나가자 거의 10분이 다 끝나갔다. 누군지 몰라도 끝까지 안누르고 버텼다.
보고 누르고 싶었는데. 그러자 나는 누군가 포기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쉐도우 복싱으로 버티다 나까지 벌점을 받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자 너무 쫄렸다. 그래 너가 이겼다.
나는 20초 정도 남기고 15를 써서 올렸다.
맘 같아선 마리가 말한 7을 올리고 싶었는데 꾹 참았다. 벌써부터 대놓고 하는 배신은 좀 그랬다.
이렇게 안고르고 버티는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와. 뭘 원하는거야?"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5초도 안남기고 마지막 사람은 8을 골랐다. 정말 아슬아슬 했다.
근데 골라진 숫자가 진짜 말도 안된다. 저기서 8이 나온다고?
[자! 결과가 나왔습니다!]
정말 미친 결과다. 진짜 말도 안되는 운이다.
나온 숫자들은 1라운드와 2라운드를 합쳐서 5, 8, 9, 10, 11, 15, 17, 18, 19, 20 이다.
의외로 5에서 11 사이가 많이 나가버렸다. 예상과 달랐다.
8 때문에 순식간에 빙고가 하나 생기며 마이너스 4점이 생겼다. 51점이 되었다. 그래도 꽤 점수가 나쁘지 않아보인다.
홀로그램에 모두의 빙고판이 떠올랐다.
-, -, -
16, 7, -
14, 13, 12
마리 - 빙고 1개, 58점
-, -, 16
13, -, 14
12, -, -
제니퍼 - 빙고 2개, 47점
16, 14, -
13, - , -
12 , -, -
엘리스 - 빙고 1개, 51점
- , 16 , -
14, - , 13
12, - , -
세리아 - 빙고 1개, 51점
16, 14, 6
13, 4, 12
7, -, -
줄리 - 빙고 0개, 69점
충격의 결과였다.
[줄리 1등! 벌점 0점! 마리 2등! 벌점 1점! 엘리스, 세리아 공동 3등! 벌점 2점! 마지막 5등 제니퍼! 벌점 4점!]
줄리의 압도적 승리였다. 저건 운이 아니라 그의 실력이었다. 나는 이래 저래 완벽히 졌다.
그는 중간을 아예 쫙 빼고 4부터 7 을 넣어놨다. 한 수 더 미리 생각한 것이다. 왜 내가 저기까지 생각을 못했을까.
빙고판은 아마 5랑 15가 다 나 때문에 지워진 것이겠지. 위에서부터 쭉 불렀으면 그의 패배였을텐데 도박수를 잘 던졌다. 우리들의 심리를 잘 읽었다고 봐야겠다.
그는 중간을 많이 고를 것이라 예상한 모양이다. 내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나의 패배의 이유는 단지 하나 뿐이다. 겁을 먹었다는 것. 소심한 계획을 짜고 소심한 대응을 했다.
이게 다 그 댓글 때문이다. 처음 빙고판 채울 때 부터 마지막 숫자 선택 때 까지 다 대담한 사람이 이겼다.
그에 비해 줄리랑 똑같이 나 때문에 5랑 15가 지워진 제니퍼는 나로 인해서 죽었다.
시야가 검어지더니 다시 밝아졌다.
우리는 다시 같은 공간에 모였다.
[여러분 빙고가 별로 나오지 않아서 페널티를 보지 못했다고 실망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언제든 기회가 열려 있으니까요!]
엘리스의 표정이 짜증으로 가득해졌다. 다 녹화되는 이 게임에서 벌거벗고 한시간을 있었으니 화날 만 했다.
기회가 열려있다는 MC의 말에 나도 짜증이 확 올라왔다. 그딴 기회 안줘도 괜찮은데. 오히려 줘도 안먹는다.
다시 모였을 땐 엘리스는 옷을 입고 있었다. 정말 메인 게임 도중에만 적용되는 페널티여서 다행이다.
하지만 이게 3라운드 이상이 되는 게임이었다면 좀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 보였다. 발가벗고 활동적인 게임을 하게된다면 수치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2단계 3단계 페널티도 걱정이 됐다. 아니다. 다음 게임엔 또 1단계부터 다른 페널티일려나?
오히려 옷이 벗겨지고 입혀진 엘리스는 쭈구려 앉아있다가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입고 있는 줄도 몰랐던 모양이다.
"뭐가 문젠데?"
"옮겨질 때 입혀진건가? 이거 지들 맘대로 하니까 기분이 너무 더럽네."
그냥 옷을 다시 입은 것에 대한 소감이었다. 찌그러진 러닝셔츠를 펴며 일어났다. 확실히 러닝셔츠에 쫙 붙는 스포츠 바지라도 입는게 나았다.
엘리스는 생각도 못한 3등을 해서 기분이 괜찮아 졌는지 표정을 풀었다. 제니퍼는 무릎을 털썩 꿇었다.
"왜 나만. 빙고가 두 개나 나와서..."
공동 3등 3명이 될 수 있었는데 갑자기 벌점 2점이 증가한 기분이겠지. 속상할 만 하다.
위로를 해줄 수 없었다. 지금 벌점 4점은 꽤 컸으니까.
하. 그렇다고 머리에 피가 올라서 대담하게 갔다가는 통수맞고 죽기 딱 좋다.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모두가 기대하시는 개조방! 이동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