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3일차
우리는 결국 각자 폭탄을 처리하기로 얘기하고 세 명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여태 나눈 대화가 참 실속 없어 보였다.
돌아오자 엘리스가 일어서며 날 반겼다. 난 또 얘가 왜이러나 싶었지만 한마디 해줬다.
"엘리스. 생각이 많이 정리 됐어?"
"그래. 아까 찡찡댄건 미안하지만 너 재수 없는것도 사실이니까 기억해. 앞으로 게임으로 말하자는거지? 받아줄게."
누가 더 재수없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생각보다 쿨한 반응이라 내심 다행이었다. 첫 날 운건 비밀로 해주기로 했다. 어차피 다 녹화 됐지만.
그런데 받아주긴 뭘 받아줘. 웃긴놈. 그래도 괜찮은 놈인건 확실해서 다행이다. 꿍하고 계속 삐져있으면 스트레스 받을 뻔 했다.
별로 시간이 많이 지난건 아닌데 생각을 정리한 것인지 엘리스는 내 팔을 자기 주먹으로 툭 쳤다. 누가보면 몇 년 사귄 친구인줄 알겠다. 겨우 본 지 3일 된 놈 주제에.
옆을 보자 줄리와 마리에게도 굳은 의지가 보였다. 셋이서 무슨 얘기를 나눈건지 정말 나에게 벌점을 먹이고 싶은 모양이다. 제발 계획대로 됐으면 좋겠는데.
"다들 어떤 계획을 세우셨는지 염치없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
역시나 반응을 안한다. 우리가 압도적 정보 부족이다. 사실 제니퍼는 나 때문에 정보 부족이 됐다. 노린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나는 한 번 더 찔러봤다.
"저는 9번에 폭탄 터뜨리려고요."
의외로 모두 담담해 보였다. 진짜 9번에 넣은 사람이 없나?
"진짜 터뜨립니다."
결국 아무도 대답을 안했다. 줄리 표정이 약간 썩어들어 갔지만 확신할 순 없었다.
[자 이제 첫번째 라운드 선택! 시작합니다!]
다시 시야가 검게 변하더니 우리는 다시 개인 공간으로 돌아왔다.
이거 참. 너무 고민이다. 셋이 한마디도 안해줘서 감을 잡기가 힘들다. 제니퍼와의 대화를 통해 잘 알 수 있었다.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둘째 치더라도 완전 말도 안되는 작전이 아니라는게 날 힘들게 했다.
다들 다양한 생각을 갖고 진짜 코인을 놨다고 보면 폭탄도 자기 멋대로 놓은게 분명하다. 이거 완전 운빨겜인게 가위바위보랑 다름 없어지지 않나? 뭘 위해 오늘 이렇게 열심히 떠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나는 운에 맡기기로 하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9번에 있던 가짜 코인을 3번에 옮겼다. 1라운드에 죽으면 어쩔 수 없지 뭐.
2라운드는 되어야 대화가 통할 듯 싶다. 다들 꼴찌는 절대 하고 싶지 않아 했으니까.
일정 시간이 지나자 MC의 목소리가 나왔다.
[자! 결과가 나왔습니다. 놀랍게도 2명이 탈락했습니다! 바로 줄리와 제니퍼!]
너무 뜬금 없어서 내 귀를 의심했다. 다시 시야가 가려지고 모두 모여있는 곳으로 옮겨졌다. 그 곳엔 엘리스와 마리만 있었다.
제일 무시했던 둘이 남아있자 기분이 묘했다.
"이제 전략좀 설명해줄래? 꼴찌는 면했잖아."
내가 말하자 엘리스가 대답해줬다.
"우린 진짜코인 위치를 공유했어. 진짜 진심으로. 어차피 우리는 하위권이었으니까. 이길 생각 가득했다고."
"그래서 폭탄으로 점수를 얻으려 한 건 아닌 것 같고."
"다행히 우리 셋 다 숫자가 달라서 그 것들 제외하고 3개를 터뜨린거야. 아마 줄리는 제니퍼가 죽였겠지."
확실한건 제니퍼의 벌점 증가로 내일은 무조건 내가 독박쓰게 생겼다. 계속 데리고 가며 어그로 분산좀 하려 했는데 큰일이다.
"이번엔 어떻게 할 생각인데. 둘이서 하나씩 골라 터뜨린다고 해도 날 죽이긴 힘들거 아냐?"
"뭐. 그렇겠지만 가능성이 없는것도 아닌데?"
여기서 딜을 넣기로 했다.
"내가 자살해 줄게."
엘리스는 어이가 없단 표정으로 날 봤다.
"아깐 뭐 정정당당 어쩌구 저쩌구 하더니 왜?"
"글쎄. 아깐 운과 동정론에 일종으로 자살하는 것이고 지금은 게임의 일종으로 자살하는거니까. 내일 어떻게 될 지 몰라서?"
엘리스는 미묘하게 웃었다.
"널 뭘 믿고. 그냥 공격해도 잡을 것 같은데?"
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 말 안 덧붙여줘서 고마웠다.
"뭐. 맘대로 해. 난 자살할 거니까."
"이야. 참 골때리네. 게임 참 재밌게 한다 너. 너가 벌점 가져가주면 나야 고맙지. 아냐. 크게 고마워하지 않을거야."
엘리스는 날 칭찬했다. 물론 비꼬는 뉘양스였지만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만에하나 이제 둘은 함부로 날 공격하면 내가 점수를 먹게 생겨서 머리 아플 것이다.
"무슨 숫자인데요?"
마리가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날 보며 말했다. 너무 노골적이니까 웃겼다.
어제 된통 당한게 크긴 컸나보다. 눈치 보니 그냥 어제 게임 결과에 비롯된 의심이 아닌 것 같다.
셋이서 얘기할 때 줄리가 들킨 모양이다. 죄책감에 말한건가? 뭐. 엘리스가 말했을 수도 있지만. 참 답답하다.
생각해보면 어차피 여기서 있는 일들 다 녹화되고 볼 수 있는데 숨기려고 한게 웃겼다. 마리도 컴퓨터 키면 다 확인 가능하다.
오히려 저렇게 별 생각 안하고 얼굴로 다 드러내는 마리가 부러웠다. 나는 마리에게 말했다.
"저요? 어차피 자살할건데 왜 궁금해요? 살려주려고?"
"...저한테도 반말 하세요. 왜 거리두세요?"
다른 포인트에서 빈정이 상했나보다. 알기 힘든 친구였다.
"제니퍼나 엘리스 둘 다 반말해도 된다 해서 한건데. 이제 할게."
웃기게도 마리는 얼굴이 밝아졌다. 속절없이 해맑은 친구다. 쓸데없이 짜증나던 감정이 많이 사그라들었다.
"나는 5번. 5번에 진짜 코인 넣었어."
진짜를 말해줬다. 어차피 이젠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저 둘은 지금 끝자락이어서 벌점을 더 받으면 흑화할 가능성이 높았다. 적당히 평균을 맞추긴 해야했다. 개조당하긴 너무 싫지만.
여기서 자기들이 날 공격해 내가 점수를 먹으면 뭐. 자기들이 자초한 일인데 어쩌겠나. 발만 동동 구르겠지. 나에겐 최선의 수였다.
그렇게 당하고도 마리는 날 믿는다는 표정이었다. 너무 순진해서 탈이었다. 엘리스의 표정은 알기 힘들었다. 내가 뭐 사이코메트리나 프로파일러도 아니고.
다 말하고 나니 아무 생각 없어졌다. 머리가 너무 아프니까 별 생각 안하는 것으로 덜 아파지고 훨씬 좋아졌다. 개인 방에 돌아와서 나는 내 진짜 코인에 있는 폭탄을 터뜨렸다.
솔직히 내가 5번인걸 둘이 알았다고 해도 그들의 가짜 코인이 5번에 있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냥 이번엔 자살을 해서 큰 격차를 줄여야했다.
그들이 5번으로 가짜 코인을 옮겼을꺼라 생각하며 나는 결과를 기다렸다.
[자! 2라운드 결과! 세리아! 마리 탈락! 최종 우승은 엘리스가 차지합니다! 와! 짝짝짝!]
내가 죽는 것은 반전이 없었다. 마리는 왜 죽은거지? 궁금하던 차에 우리는 다시 다 모일 수 있었다.
나는 다들 죽은 이유가 궁금해서 숫자와 죽인 사람을 물어봤다. 그러자 제니퍼가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진짜 어이없는게 저랑 줄리랑 숫자가 7로 같았더라고요. 와! 어떻게 이런."
죽은 이유를 아는 것을 보니 둘은 같은 방에 불려간 모양이다. 게임에서 지면 다른 방에 같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쨌든 7번에 가짜 코인이 있었고 터졌다. 그래서 둘 다 죽었던 것이다. 역시 제니퍼가 열심히 얘기하던 최종 생존 작전은 거짓말이었다. 영악한 녀석. 그럼 죽인 사람은 누구지?
"제가 죽였어요. 마침 제 폭탄에 줄리의 진짜 코인 숫자가 맞길래."
마리가 대답했다. 줄리는 아무 말 못했다. 그러게 끝까지 속였어야지 스스로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 전날 꼴찌한 것에 대해 주동한 사람보다 배신한 사람에게 복수하는건 당연하다. 마침 숫자도 딱 떨어졌구나.
마리가 순진하다고 했던 것 취소다. 역시 게임이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줄리는 꼴지했지만 오히려 속이 후련해 보였다. 두려운 표정은 있었지만. 저렇게라도 죄책감을 더는게 그의 스타일인가보다.
회사 생활 할 때도 스트레스 엄청 받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머리가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근데 마리는 어떻게?"
줄리가 묻자 엘리스가 대답했다.
"뭘 어떻게야. 내가 1라운드에 폭탄 안터뜨리고 옮긴 후에 죽였지. 얘 숫자는 9번이었어."
마리는 예상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도 진짜 코인이랑 가짜 코인을 같이 안 둔 모양이다. 그랬다면 오히려 점수를 챙겼을 텐데. 이래도 내 생각이 이상한건가? 나만 가짜랑 진짜 같이 놓으려 한거야?
"내가 9번 터뜨린다고 할 때 용케 참았네?"
내가 묻자 마리는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7번 잡으면 제가 꼴찌는 아닐거라 생각했더니 맘이 좀 편해져서요. 사실 엄청 떨리긴 했어요. 세리아님이라면 진짜 터뜨릴까봐."
나는 제니퍼 때 처럼 또 님을 안써도 된다고 말해준 뒤 내 이미지가 도대체 어떻게 박혀있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물어볼 용기는 안났다.
말을 듣다보면 결국 셋이서 대화 하면서도 둘 다 배신할 생각이 잔뜩 있었다. 고해성사한 줄리만 당하고 둘이 올라가는 작전에 운 없이 제니퍼가 낀 것이다. 이게 진짜 운빨이었다.
애초에 난 계획에 껴있지도 않았다. 나 너무 자존감이 높았던 걸지도? 자의식과잉인가. 당연히 날 죽이려 혈안이 된 줄 알았는데.
나 1등인데?
아직도 억울해 하는 제니퍼가 말했다.
"심지어 세리아가 뒷자린줄 알고 8,9번중에 열심히 고민하다 8번 골랐는데 5번이라는게 더 충격이네요. 마리도 한 끝 차이로 못잡고. 세리아! 너무 자연스럽게 거짓말 하시는거 아녜요?"
"너도 나한테 거짓말 했잖아. 오히려 나한테 말해준 계획대로 3번이었으면 1등 했겠네 정말로."
"아씨... 그러네."
제니퍼는 자신의 이마를 탁 쳤다. 결과적으론 진짜 내 계획은 다 불발이었고 제니퍼의 계획이 진짜 실속 있었다. 앞으론 너무 머리 아프게 고민 하지 말아야겠다.
엘리스는 1번에 진짜 코인을 놓았다고 한다. 얘도 물건이다. 그리고 1라운드에 줄리는 4번을 터뜨렸다고 한다. 하마터면 정말 꼴찌할 뻔 했다.
[자! 오늘 메인 게임의 결과! 1등 엘리스! 벌점 0점! 2등 마리! 벌점 1점! 3등 세리아! 벌점 2점! 공동 꼴등 제니퍼, 줄리! 각각 벌점 3점씩 추가입니다!]
엘리스는 꽤 덤덤해 보였고 마리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참 대단한 친구였다.
[모두가 기다리던 개조시간! 모두 누워주시기 바랍니다!]
쓸데없는 안내를 하는 것을 들으며 앉는 도중 내 앞에서 하나 둘 풀썩풀썩 쓰러지기 시작했다. 시간적 여유도 안 줄거면 왜 말하는건가 싶었는데 곧이어 나도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