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2일차
2일차 날이 밝았다. 물론 알람이 울려서 알 수 있었다.
[빰빰 빰빰빰]
엿같게도 군대에서나 듣던 기상음을 가져왔다. 나와 아저씨는 눈쌀을 찌푸리며 벌떡 일어나 이불을 갰다. 마리는 놀랐는지 버둥거리고 제니퍼도 뒤늦게 일어나 이불을 갰다. 엘리스는 일어날 생각을 안했다.
[아침이 밝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들의 MC 몬입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한 시간 뒤 메인 게임장으로 이동합니다. 오늘의 게임도 기대해 주세요!]
그의 활기찬 목소리를 들으니 현실이 확 다가왔다. 어제 자면서도 계속 꿈이길 바랐건만 결국 해는 떴다.
아저씨와 얘기를 나눈 뒤 서로 소변을 눌 때 반대편 유리에 기대서 가려주기로 했다. 가려주면 안된다는 말은 딱히 없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은 안됐다. 하지만 그는 혹시나 하고 주변을 열심히 살펴봤다. 내 생각대로 역시 아무 일 없었다.
마음씨 좋게도 개별 양치도구도 줬길래 양치도 하고 몸도 풀었다. 양치도구에 세리아라고 새겨져 있는 걸 보고 살짝 소름돋았다. 매직이나 네임펜으로 표시만 해줘도 감지덕진데 내 전용이었다.
잠시 후 허겁지겁 일어난 마리가 양변기로 갔다. 그의 적나라하게 대변 보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귀를 막고 싶었다. 오히려 냄새는 하나도 안나니 다행이긴 했다.
비데까지 알차게 사용한 그는 나와서 나와 눈이 마주치자 머쓱하게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고 스트레칭을 마저 했다.
아저씨는 본인의 배를 만져보더니 신기한 듯 쿡쿡 찔러 보기도 했다. 어제 지쳐서 잠든 탓에 확인도 잘 못한 듯 하다. 그 상황에 잘 잔건지 얼굴은 좋아보였다.
상의를 확 젖히더니 드러난 갈비뼈를 확인하고 옆에 구비되어있던 거울 앞에 가 자신의 쇄골도 확인하고 있다. 여태 살 찐 채 살았던 사람이었나 보다.
엘리스는 아직도 일어날 생각을 안하고 제니퍼는 양치를 시작했다. 화장실 안에도 바로 냄새가 빠졌는지 별 말 안했다. 괜히 마리만 안절부절 거렸다.
한 시간이나 준 이유를 모르겠다. 스트레스가 많아져서 그런지 다들 살짝 꼴보기 싫었다. 아무 생각 없어보이는 제니퍼나 눈치를 계속 보는 마리. 자기 몸을 확인하는 줄리까지.
30분이 넘어도 일어날 생각을 안하는 엘리스에게 갔다.
"저기. 엘리스. 일어나야 하지 않겠어요?"
"...일어나 있으니까 꺼져."
역시 괜히 호의를 보였다가 욕만 먹었다. 저번에 잠깐 잠에서 깼을 때 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기에 예상은 했다. 하지만 그냥 두기에도 좀 그랬다.
"어제 그 일 당하실 때 나왔던 얘기 혹시 들으셨어요?"
"뭔데."
그가 감은 눈을 뜨고 날 봤다. 얼굴은 여전히 센 척 하지만 몸매가 이미 여자처럼 왜소해 보였다. 심지어 어제 그 장면을 보고나니 앙칼진 들짐승처럼 다가왔다. 기분이 묘했다.
"여기서 우리가 나누는 대화, 하는 일, 자거나 씻고 싸는것 까지 다 녹화되어 전국에 생중계 된다는 얘기요."
"...그게 말이 돼?"
"어제 들으셨는지 몰라도 인터넷이 가능해서 확인까지 했어요. 물론 친가족에게 연락을 해보진 못했지만 확실해 보이던데요?"
그가 상체만 일으키며 침대에 앉았다.
"다 쇼 아냐? 아니면 우리 부모님이 가만히 계시겠어! 응?"
나에게 삿대질을 하며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하길래 바로 차단했다.
"일단 언성을 좀 낮추시고. 욕도 안하시게 조심하세요. 벌점이니까."
"그래. 그렇지. 너는 잘못 없지. 후. 미안하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욱하네."
생각보다 엘리스도 냉정하게 대답하자 신기했다. 당연히 말싸움으로 이어질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인터넷에 난리가 났어요. 어제도 우리 위치 찾겠다고 경찰이 총 동원 됐다고 하던데요. 여러 영상 매체에서 우리 얘기밖에 안나오는 중이예요."
"맞아요. 좀 더 뒤져봤는데 진짜였어요."
이를 다 닦고 온 제니퍼가 말을 거들었다. 나름 지원해준다고 한 마디 거들었겠지만 나는 이상하게 짜증이 났다. 나의 신경이 너무 곤두서있었다.
"거들어줘서 고마워요."
"아뇨."
그는 그 말을 하고는 다시 컴퓨터 앞으로 갔다. 겨우 30분 남았는데 그 새 거기 앉다니 참 대단했다.
엘리스는 머릿속이 복잡해 보였다. 어제 밤에 샤워하고 오줌싸던 기억이 난 것이겠지. 얼굴이 썩어들어가는걸 보면 확실했다. 그는 자기 목을 매만졌다.
"목에 맨 밴드는 우리도 몰라요. 하여튼 여기서 모든것이 촬영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려요."
"그래... 고맙다."
아까부터 내가 나이를 더 처먹은걸 알텐데도 반말을 찍찍 싸는걸 보니 반말에 익숙한 사람인가 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예의를 밥말아먹은게 아닌가?
찝찝하게 그를 처다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별 말 안하고 누워서 다시 눈을 감았다. 눈에서 티는 안났나보다. 나이를 거의 10살은 더 먹은 줄리보다 엘리스가 더 꼰대처럼 막나갔다.
몸이 망가져서 예민한 건 이해해도 이해와 받아들이는건 조금 달랐나보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내 침대 위에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자 다들 러닝셔츠에 쫙 붙는 체육복만 입고서도 자기 할 일 잘 했다. 이상하게 이 상황이 웃겼다. 머리가 미쳐가는 느낌이다. 나도 픽 웃으며 누웠다. 남은 30분동안 쉬기로 했다.
"으음."
그 새 잠들어 버렸다. 주위를 둘러보자 다들 또다시 하얀 방에 불려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다들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어딘가에 묶여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풀려있자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바닥에 널부러져있는 네명을 두고 나는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혹시 어떤 물품이나 힌트가 있나 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다들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앉거나 섰다. 나는 다 훑어 봤다고 생각되어 다시 앉았다. 어쩌다보니 첫 날 처럼 순서대로 둥글게 앉아 있었다.
그 때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다린 만큼 더 재밌는 장면이 기다리는거 아니겠습니까? 바로 규칙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명 다 귀를 쫑긋 세우며 듣는게 보였다. 다들 겪어보더니 벌점의 무서움을 깨달은 모양이다.
[어제 겪었던 가위바위보의 연장입니다. 바로 릴레이 가위바위보!]
"릴레이..."
제니퍼가 나즈막히 읊조렸다. 엘리스는 그런 그를 째려봤다.
[말 그대로 릴레이 가위바위보 입니다. 상대하는 사람이 1명 나머지 4명은 방어! 가위바위보에서 빨리 이기는 만큼 점수를 덜 받는 규칙입니다. 한마디로 많이 비기거나 진다면 꼴등이 될 확률이 높아지겠죠? 순서는 나이 순서 그대로 입니다. 맨 처음 마리부터 시작해 올라갑니다. 시간은 10분씩!]
네 명을 모두 가위바위보로 이기기만 하면 되는 룰이다. 가장 적은 횟수로 플레이 하는게 가장 중요하다. 이게 전부였다.
[참고로 모든 사람의 점수가 다 같다면 모두 다 꼴등 처리가 되어 벌점이 4점씩 부가됩니다. 하지만 공동 1등이 많고 꼴등은 한 명 이라면 꼴등만 벌점 4점을 받고 끝! 정말 관대한 규칙 아닙니까?]
딱 봐도 한 명이 희생하면 모두 행복하다는 뜻이다. 정말 개같았다. 이런 희생을 강요하는 룰이 바로 나올 줄 몰랐다. 나머지 4명이 꼬라보는 꼴이 나에게 꼴지해달라는 표정 같았다.
[먼저 한 시간 드리겠습니다. 자유롭게 얘기 나누세요! 하지만 욕설, 폭행은 금지입니다! 노골적인 괴롭힘도 금지! 금지!]
그리고 떠났다.
한동안 조용하던 그 때 제니퍼가 말했다.
"솔직히 이 룰 들으실 때 무슨 생각했어요? 저는 처음엔 모두 다 같이 점수를 받으면 꼴지라고 하니까 오히려 한 명을 1등 만들면 나머지는 공동 2등이 아닌가 생각했거든요."
나는 날 꼴등 만들고 다 1등 하려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제니퍼는 착했다.
"저도 좋다고 생각해요."
마리는 그냥 찬성하는 것 같았다.
"그럼 엘리스 씨 1등 만들고 다들 2등 할까요?"
내가 그냥 나서서 말했다. 그러자 엘리스와 줄리 둘 다 표정이 오묘해 보였다. 저 아저씨는 뭔가 다급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손을 들더니 말했다.
"미. 미안하지만 저도 공동으로 엘리스랑 같이 1등 만들어 주면 안될까요? 그러면 벌점이. 아. 제니퍼씨가 나보다 많아지는구나..."
그는 스스로 말하고는 시무룩해지며 다시 손을 내렸다. 나는 내가 생각한 바를 말했다.
"만약 이게 공동 2등이 된다면 다행이지만 공동 꼴등이 돼서 다 벌점 4점씩 받으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그! 그건..."
마리는 또 머릿속이 복잡한지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다시 털썩 앉았다. 모두가 다시 침묵에 잠겼다.
"그냥 다 가위바위보 하지 그래?"
엘리스가 갑자기 나섰다. 다들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봤다.
"나중에 나한테 뭔 말을 하려고 이렇게 빚을 지워 두려 하는거야? 기분 나쁘게. 그냥 정정 당당하게 해도 괜찮아! 날 뭐로 보길래 진짜."
그가 아직도 허세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마리는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봤다. 제니퍼는 아직도 인상을 찌푸린 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슬금슬금 줄리가 나에게 왔다. 그러더니 속삭였다.
"세리아씨. 저기서 다들 생으로 가위바위보 하자고 의견 나오면 우리 서로 주먹 내주기 할래?"
"...지금 다 쳐다보고 있어요."
"..."
셋의 시선을 느낀 줄리는 머쓱하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는 어지간히 벌점 받기 싫은것 처럼 굴었다. 너무 대놓고 티를 내니까 오히려 허세부리는 엘리스가 나았다.
"어쨌든 나는 아무하고 상의도 안하고 그냥 가위바위보 할 거니까 알아서들 하쇼."
엘리스는 일어나서 우리한테 손가락질 하며 얘기하더니 멀찍히 가서 누웠다. 재벌 2세인지 3세인지 무슨 많은 여성을 홀리고 다닌 것 처럼 소개 된 첫 모습과는 달리 젊은 꼰대였다.
이렇게 되면 모두가 당신을 꼴등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건가? 아니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건가.
"정말 운대로 할까요?"
나머지 넷이 앉아서 서로를 말 없이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