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외전. 서열정리
“민유빈 회장 대체 왜 그래?”
“그러게 말이다. 막말로 자기가 컴퓨터에 대해 뭘 안다고 프로텍 회장이야?”
“그래도 지난 분기 영업이익 근 5년 내 최고였다며.”
“영업이익은 영업이익이고, 우리 기술팀이 일을 할 수 있게 해줘야 될 거 아냐. 우리 아니면 회사가 돌아가?”
“고 전무님이 회장실 가보신다고 했으니까 좀 기다려 봐.”
유빈이 어느 날 휴게실 문틈으로 새어 나왔던 그 대화를 듣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까? 스토커에게 쫓기던 악몽 같은 시간이 지나고 프로텍 회장이 되었지만, 유빈에게는 차라리 악몽의 연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힘든 시간이었다.
전대 경영권자였던 왕창식의 방만한 경영 탓에 회사는 체질적인 만성 적자의 늪에 빠져 있었다. 그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백신 프로그램 대여에 집중되어 있던 회사의 수익 모델을 다각화하고, 소수에게 사내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고질적인 문제를 탈피하기 위해 조직을 전면적으로 개편했다.
그 과정에서 3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고, 프로텍은 힘 빠진 거인 같은 초라한 모습에서 그 몸집에 걸맞은 국내 IT 업계의 중추적인 기업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취임 초기부터 유빈의 발목을 잡고, 회사 혁신에 사사건건 발목을 잡던 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술팀은 유빈을 경영권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고 전무를 우두머리로 삼아 사내에 그들만의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유빈과 고 전무가 마주하고 있다. 고 전무의 입에서 탁한 중저음이 유빈을 엄습하듯 흘러나온다.
“회장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기술팀을 쪼개시고 각 팀별로 평가를 따로 해서 성과급에 차등을 두시겠다뇨. 지금 기술팀 안에서는 회장님이 저희를 이간질해서 관리하기 쉽게 만들려고 하신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유빈이 터져 나오려던 한숨을 눌러 참고 조곤조곤 설명한다.
“전무님, 사내 경쟁체제 강화는 주요 혁신 방향이었고, 이미 다른 부서들은 그렇게 일하고 있습니다. 성과급 차등 지급은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기존의 성과급을 깎는 것이 아닙니다. 새롭게 확충된 성과급에 한해서 업무 성과에 따라 차등 지급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전보다 적은 성과급을 받지는 않습니다.”
고 전무가 꾹 참았던 유빈의 한숨을 비웃기라도 하듯 콧방귀를 뀌며 대답한다.
“글쎄요. 성과급을 늘리시겠다면 저희는 언제나 환영할 일이지만 회사가 성장함에 따라 당연히 늘어났어야 할 성과급을 고르게 나누지 않고 일부에 몰아준다는 건 저희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전무님!”
“아니요. 같은 이야기가 반복될 것 같으니 더 길게 설명하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저희 기술팀 입장은 변함없습니다.”
대화조차 거부하는 고 전무의 태도에 기어이 유빈의 한숨이 터져 나온다. 유빈이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자리를 뜨려는 고 전무를 노려보며 묻는다.
“고지상 전무님. 가시기 전에이거 하나만 여쭤보죠. 유독 기술팀이 회사 혁신에 반발이 심한 이유가 뭔가요? 제가 어리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저와 왕창식 전 부회장님 사이에서 있었던 일 때문입니까?”
유빈의 부름에도 자리에서 일어나길 멈추지 않았던 고 전무가 유빈에게 등을 보이며중얼거리듯 대답한다.
“우리 어리고 귀여우신 회장님 진짜 아무것도 모르시네.”
폭언에 가까운 말에 유빈이 고 전무의 등을 노려본다. 고 전무가 돌아서 유빈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쇳소리 섞인 낮은 목소리를 내뱉는다.
“그런 이야기들이 있죠. 어린아이가 설친다는 둥, 왕창식 부회장님을 잡아먹고 운 좋게 얻은 회사 지분으로 위세를 부린다는 둥. 그런데 말입니다, 저희도 다 알아요. 민유빈 회장님이 경영 맡으시고 회사 주가 원상 복귀됐다는 거, 왕창식 부회장이 회장님께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는 거.”
“그럼 대체 왜...!”
고 전무가 유빈의 말을 자르고 들어온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알아듣기 쉬우시려나? 이건 말입니다, 서열 싸움이에요. 왕창식 부회장이 그 더러운 인성에도 어떻게 기술팀을 휘어잡았는지 아십니까? 본인이 가진 기술력이 저희 기술팀의 그 누구보다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민유빈 회장님은 아니시죠? 그럼 타협하세요. 제게 기술팀 운영에 관한 전권을 주십시오. 그리고 그에 걸맞는 직함도 필요할 겁니다. 부회장 정도면 어떨까요?”
유빈이 대답하려는 순간 고 전무는 그대로 휙 돌아 나간다.
“대답은 천천히 해주셔도 좋습니다.”
* * *
고 전무가 회장실을 나가고 유빈에게 급격한 피로가 몰려놨다. 수십 번의 회의를 거쳐, 이틀 밤을 꼬박 새워 정리했던 기술팀 혁신안은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유빈의 눈이 스르르 감기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얼굴이 떠올랐다.
왕창식에게 고통받던 유빈을 구해주려다 무참히 살해당한 캐빈, 그가 지금 유빈의 옆에 있다면 어땠을까? ‘서열’ 같은 황당한 문제가 이토록 유빈을 힘들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어쩌면 프로텍 회장이라는 너무나 무거운 짐을 유빈이 짊어지지 않아도 됐을지도 몰랐다.
자신의 앞에서 칼을 맞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캐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이 살해당할 것을 예견하고 꼼꼼하게 유언장까지 남겨놓았던 캐빈은 왜 죽음을 피하지 않았을까? 캐빈과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떠올랐다.
“우리 같이 미국 갈래?”
“칫 나 영어 못해요.”
그때 그 말을 듣고 같이 미국으로 도망갔더라면 캐빈이 죽지 않았을까?
짧은 사랑 끝에 찾아온 허무한 이별의 사무침은 길었다. 하이데스라는 해커명으로 활동하는 사람이 있다는 보고가 들어올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설레며 확인해보았지만 모두 캐빈을 사칭하는 자들이었다. 한번은 자신이 캐빈이라며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지만 유빈의 프로텍 지분을 노린 사기 행각이었다.
그래서 그때 날아온 카톡 한 통도 믿을 수 없었다.
- 유빈아, 잘 지내? 나 캐빈이야
자신과 캐빈 사이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친 마음 갖고 장난치지 말라는 답장을 적었다가 지웠다. 유빈이 카톡을 확인하고 답장이 없자 음성 메시지가 날아왔다.
“유빈아, 못 믿겠지만 나 진짜 캐빈이야. 이 목소리는 최대한 내 목에서 나던 소리랑 비슷하게 구현하려고 해봤는데 아직 완벽하지 않네. 조금 기계음이 섞이지? 내가 삐삐에 남긴 메시지에서 그랬잖아. 나도 죽고 싶은 건 아니라고.”
고 전무와의 실랑이 끝에 완전히 지쳐있던 유빈의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삐삐에 남긴 메시지를 알고 있다면 이번엔 진짜 캐빈이 맞을지도 몰랐다. 창백해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음성통화 버튼을 눌러보았다.
“응. 유빈아”
손끝만큼이나 떨리는 목소리로 유빈이 대답했다.
“진짜 살아있어요? 캐빈?”
휴대폰 너머로 캐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살아있다고 해야 하나? 조금 복잡한데, 아무튼 너는 잘 살아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이제 프로텍 회장님이라며? 활약이 대단하더라.”
유빈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나, 사실은 잘 못 지내고 있어요. 너무 힘들어요. 왜 나한테 이렇게 힘든 일 맡기고 그렇게 가버렸어요? 나 프로텍 회장 그만하고 싶어요.”
“아니 잠깐, 이건 억울하다. 내가 너한테 내 재산 상속한 건 그거 팔아서 편하게 살라고 한 거지, 너한테 프로텍 운영하라고 한 건 아니었어. 네가 떠맡아 놓고 왜 나한테 뭐라고 해?”
흉내 내기 힘든 캐빈의 말투였다. 진짜 캐빈이었다. 유빈이 입으로 지어지는 웃음과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 하고 있을 때 캐빈이 물었다.
“뭐가 그렇게 힘든데? 말해 봐. 내가 도와줄게.”
유빈이 눈물을 삼키고 떨리는 입술 끝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그것보다, 지금 어디예요? 우리 만나요. 그동안 너무 보고 싶었어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캐빈이 대답했다.
“아니. 미안. 우리 만날수는 없어. 내가 조금 이상한 방식으로 살아있거든.”
“뭔데요? 말을 해봐요. 지금 저랑 통화하고 있는 사람 진짜 캐빈 맞죠?”
“나 맞아. 너 좋아하는 파스타 면은 링귀네, 소스는 크림. 이거 우리 둘 말고 또 아는 사람 있나?”
“진짜 캐빈 맞으면 왜 못 만나는데요?”
“내가 몸이 없어”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우리끼리는 나같은 사람을 고스트 브레인이라고 부르는데”
자기가 천재 해커라며 한 번 더 너스레를 늘어놓은 뒤 이어진 캐빈의 설명에 유빈은 캐빈을 처음 만났을 때 만큼이나 경악했다.
* * *
자신이 살해당할 것을 예견한 캐빈은 유빈에게 유언장을 남겨놓고 미국에서 유학할 때부터 알고 지내던 오랜 친구를 찾아갔다. 신경과학 분야, 그중에서도 조금 특별하게 컴퓨터와 뇌의 연결 방법을 연구하던 캐빈의 친구 닥터 최가 캐빈을 맞았다.
“오랜만이야. 하는 일은 잘 안 되지?”
“잘 안 되네.”
“거봐. 내 실험에나 참여하라니까. 나한테 천재 해커 하이데스의 뇌로 실험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실험 성공하면 영생을 누릴 수도 있어. 진시황보다 낫다니까?”
“그래.”
닥터 최와 캐빈 사이에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진짜?”
“진짜.”
오랜 친구 사이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사뭇 진지해진 분위기 속에서 닥터 최가 물었다.
“내가 무슨 실험을 하고 싶어 하는지 까먹은 거 아니지? 성공하면 영생이지만, 잘못하면 그냥 죽을 수도 있어. 이론적으로는 자신 있지만, 아직 한 번도 실험해본 적은 없다고. 정말 괜찮아?”
캐빈이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려는 듯 웃으며 답했다.
“짜식. 쫄았어? 진짜 괜찮아. 나 어차피 곧 죽을 것 같거든. 모험 한 번 해보지 뭐.”
“왜? 어디 아파?”
“건강해. 그냥 내가 어떻게 사는지 너도 알잖아. 지금까진 칠 땐 치고 빠질 땐 빠지면서 용케 살아났는데, 이번엔 내가 도망치면 다른 사람이 너무 크게 다칠 것 같네.”
“뭐야? 너 설마 지금 누구 사랑하니?”
캐빈이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응.”
몇 시간 뒤, 마취되어 엎드려있는 캐빈의 머리와 목에 구멍이 뚫리고 전극이 삽입되었다. 전극에 달린 케이블은 괴이한 모양의 상자에 연결되었고, 닥터 최는 그 상자에 연결된 컴퓨터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작업에 몰두했다.
다시 몇 시간이 지났고, 컴퓨터 앞에서 일어난 닥터 최가 기지개를 켜며 컴퓨터 앞에서 일어났다. 캐빈의 호흡과 맥박을 점검한 닥터 최는 이상 신호가 보이지 않자 안도의 숨을 내쉬고 캐빈의 머리와 목에서 전극을 뽑았다. 뚫린 구멍을 봉합하고, 마취를 중단했다.
잠시 후, 마취에서 깨어난 캐빈이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짜내어 웃음을 섞어가며 말했다.
“나 살아있네?”
“살아있네”
“실험은?”
“일단 이론적으로는 문제없었어. 저기 저 시커먼 상자 보여? 저기에 네 뇌가 그대로 복사돼 있어. 기억, 성격, 자아, 기능 몽땅 다.”
“고마워. 안심하고 죽을 수 있겠다.”
닥터 최가 지치고 슬픈 눈으로 대답했다.
“진짜 죽는 거야?”
“아마도. 내 기억, 성격, 자아 잘 부탁해.”
“그래도 왠만하면 죽지 말고 살아라. 보정작업 계속해야 되고, 최종적으로 업로드 성공해서 진짜 네 뇌처럼 기능할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 성공할지, 실패할지 아무도 몰라”
“짜식, 알았어.”
* * *
“그리고 며칠 전에 드디어 닥터 최가 최종 업로드에 성공했어. 지금 유빈이 너랑 이야기하고 있는 건 나 캐빈이 맞아. 이것저것 시도해봤는데 몸 없이도 할 수 있는 건 아무 이상 없더라고. 이렇게 너랑 이야기할 수도 있고, 해킹 실력도 그대로더라. 오히려 프로그램 단계에서 바로 처리할 수 있어서 더 빨리할 수 있는 것 같아. 신기하지? 아직 나도 신기해”
캐빈의 긴 설명을 들은 유빈은 멍한 표정을 짓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 하고 있었다.
“유빈아, 내 말 듣고 있지?”
‘네? 네.“
”그래서 요즘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프로텍 기술팀이요, 제 말을 안 들어요.“
휴대폰 너머 캐빈이 웃기 시작했다.
”그 망아지들 원래 그래. 자기들끼리 왕을 정해놓고, 그 왕 말만 듣지,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한 마디도 안 들어.“
유빈이 울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요? 제가 컴퓨터를 배워요?“
”나만 믿어. 내가 해커들 지하 세계의 왕 하이데스잖아. 전화 끊고 조금만 기다려 봐.“
유빈이 다급하게 외쳤다.
”잠깐만요! 우리 다시 통화할 수 있는 거죠?“
”당연하지. 영원히. 네가 원할 때면 언제든. 아 물론 내가 원할 때도.“
전화가 끊어졌고, 유빈은 쓰러지듯 책상에 누워 잠들었다. 얼마나 잤던 걸까, 저린 팔을 주무르며 잠에서 깼을 땐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재밌는 꿈을 꿨었다. 캐빈이 살아있다니.
자는 동안 도착한 이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메일함에 접속했다. 낯선 주소로부터 메일이 한 통 도착해 있었다.
- 나야 캐빈. 대충 알아보니까 지금 프로텍 기술팀에서 왕 노릇 하는 사람이 고지상 전무더라고. 그 사람만 굴복시키면 서열정리 확실히 될 거야. 첨부파일로 보낸 건 고지상 전무가 개발하던 프로그램 소스 코드인데 버그 투성이더라고. 그거 조목조목 다 지적해 놨으니까 뽑아서 보여주면 군말 없이 굴복할 거야. 그래도 혼이 덜 나서 너 괴롭히면 더 무시무시한 것도 있으니까 언제든지 말해.
꿈이 아니었다.
핸드폰을 들어 카톡 대화 목록을 확인해보았다. 캐빈과의 통화 기록이 남아있었다. 급히 메시지를 보내보았다.
- 고지상 전무님이 개발하던 프로그램 소스 코드는 어떻게 얻었어요?
곧장 답장이 왔다.
- 아 미안. 잠깐 해킹했어.
- 우리 회사 해킹하지 마요!
* * *
컴퓨터 앞에 앉은 닥터 최가 캐빈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 야 캐빈, 너 저번에 브레인 카피 끝나고 어떻게 다시 살아난 거야? 두 번째 실험자 못 깨어났을 때 무슨 오류가 있었나 하고 찾아봤는데, 너랑 똑같은 프로세스로 진행했었어. 그리고 방금 세 번째 실험자 복사 끝나자 마자 바이털 사인 끊겼어.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너만 살아난 거지?
화면에 캐빈의 답장이 나타난다.
- 글쎄. 지켜야 할 사람이 있어서 그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