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에필로그
몇 번의 계절이 바뀌고 어느 추운 겨울날, 유빈은 프로테크놀로지 회장실에 앉아있었다. 그해 여름, 유빈의 삶에 나타났다 사라진 사람들을 추억해보았다. 좋은 기억보다 끔찍하고 우울한 기억이 훨씬 많았던 그해 여름이지만 그해 가을이 찾아올 무렵 유빈의 삶은 여름의 일들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나타났다 사라진 사람들 중 유빈에게 유일하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사람, 캐빈이 남기고 간 삐삐였다. 이미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던 메시지를 다시 재생해보았다.
“음, 유빈? 나 캐빈. 이 메시지는 내가 죽으면 너한테 준 삐삐로 자동 전송되게 설정돼 있어. 네가 이 메시지를 듣고 있다면 난 이미 죽은 사람일 테니까 이렇게 말해도 될 것 같은데,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어.
왕창식 그 자식 어렸을 때부터 항상 그랬거든.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 했어. 방해하는 사람은 죽일 정도로 미워했고. 조금 큰 다음에는 실제로 죽인 사람도 몇 명 있었어. 창식이가 너를 갖고 싶어 했고 나는 그걸 방해하는 사람이었을 거야. 그래서 이 메시지를 미리 남겨 놔.
내 걱정은 창식이가 너도 죽이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거야. 자기가 갖고 싶은 걸 못 갖게 되면 아무도 못 갖게 해야 한다면서 갖고 싶었던 걸 죽일 때도 있었거든. 내가 저번에 우리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이야기해줬었지? 내가 없어도 스스로를 잘 지켜.
음, 이러면 내가 지켜주겠다는 약속 또 못 지키게 됐네. 아니야. 약속 지킬 수 있을 거야. 이게 죽으려고 남기는 유서는 아니야. 그렇지만 네가 이걸 듣고 있으면 난 죽은 사람이겠지? 아 몰라. 말이 이상하다.
아무튼 내가 죽은 후에 너한테 줄 작은 선물을 남겨 뒀어. 이 주소로 찾아가 봐. ‘서울특별시 서초구 XXX로 XX길 배은하 변호사 사무실’.”
캐빈이 메시지에 남겨놓은 주소로 찾아가 만난 변호사는 유빈에게 두 장의 공증된 유서를 내밀었다. 첫 번째 유서는 캐빈이 남긴 것이었다. 자신의 사후에 전 재산을 유빈에게 상속한다고 쓰여 있었다. 캐빈의 유서에 유빈의 눈물 자국이 찍혔다. 변호사가 건네는 휴지로 눈물을 훔치고 다음 유서를 읽었다.
두 번째 유서는 프로텍 왕무택 회장의 유서였다. 창식에게 프로텍 경영권을 물려주려고 했던 결정이잘못되었으며, 프로텍은 캐빈이 맡아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뒤로 자신이 캐빈에게 프로텍 경영권을 승계하는 작업을 끝내지 못하고 사망할 경우 자신이 가진 프로텍 지분의 전부를 캐빈에게 상속한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그 외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한다는 말을 끝으로 왕무택 회장의 유서가 마무리되었다.
그 뒤로 길고 복잡한 법적 절차와 다툼이 이어졌다. 캐빈의 유산을 유언장에 따라 유빈이 상속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왕무택 회장의 프로텍 주식 상속은 쉽지 않았다. 죽기 전에 무택의 사망 소식을 접하지 못한 캐빈은 무택의 유산을 상속하지 않은 상태였고, 그 재산이 캐빈의 유서를 근거로 유빈에게 상속될 수 있는지는 다툴 여지가 많았다.
유빈은 결국 몇 달의 시간이 걸려, 무택과 캐빈이 모두 한 명의 연쇄살인범, 창식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나서야 무택이 남긴 프로텍 지분의 일부를 상속받았다.
엄청난 부를 상속받은 유빈은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바쁘게 움직였다. 프로텍을 직접 경영하기로 했다. 단순한 부와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캐빈이 해주었던 말처럼, 컴퓨터 기술은 막강한 힘이지만 그 힘은 반드시 선한 곳에 쓰여야 했다. 망해가는 프로텍을 정상궤도로 돌려놓고 회사가 가진 힘을 캐빈이 바라는 대로 쓰이게 하고 싶었다. 그 힘이 오용되어 사람들을 상처 입히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었다.
캐빈에게서 상속받은 팬텀 유통의지분을 담보로 대출받아 프로텍 주식을 매입했다. 프로텍 주가는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고 꽤 많은 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 프로텍의 대주주가 되었지만 경영권을 얻기까지는 난제가 남아 있었다. 무택과 창식의 지분 일부를 상속받은 왕씨 일가가 똘똘 뭉쳐 유빈이 경영권을 차지하는 것을 반대했다.
유빈은 대주주로서 주주총회를 열고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소액주주들을 설득했다. 자신이 창식에게 당했던 일들을 고백하며 프로텍 같은 막강한 회사의 경영권이 한 사람 혹은 한 집안에 주어지게 됐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설명했다.
왕씨 일가에 의해 폐쇄적으로 운영되던 프로텍의 경영을 투명화 하겠다고 공약했다. 여전히 바닥을 모른 채 떨어지고 있는 주가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겠다고 다짐했다.
소액주주들 사이에서는 유빈을 못 미더워 하면서도 끔찍한 연쇄살인에 아버지를 죽이는 파렴치한 범죄까지 저지른 왕씨 일가에게 프로텍을 맡기는 것보다 새로운 인물이 낫겠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렇게 유빈은 프로테크놀로지의 대주주이자 CEO가 되었다.
* * *
CEO로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유빈에게 한 통의 문자메시지가 왔다. 수연이라고 했다. 유빈을 찾아오겠다고 했다.
유빈은 수연에게 납치당했던 꺼림칙한 기억이 떠올랐지만, 일정을 확인하고 시간을 내 수연에게 알려주었다. 유빈에게 수연은 그해 여름의 기억을 나눌 수 있는 몇 안 되는 몇 명 남지 않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유빈이 말해준 시간에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온 수연이 냅다 유빈에게 손에 든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먹어. 박커스. 이제 이런 거 안 먹나?”
유빈이 비닐봉지를 받아들었다.
“아니에요. 좋아해요.”
유빈이 권하기도 전에 회장실 소파에 앉은 수연이 다짜고짜 사과했다.
“미안해.”
아직 채 앉지도 못한 유빈이 놀라 되물었다.
“네?”
수연이 유빈의 시선을 피하며 자기 할 말을 쏟아냈다.
“미안하다고. 내가 너 납치하고 괴롭혔던 거. 이 말 하러 왔어. 걱정하지 마. 내가 캐빈 오빠를 더 많이 좋아했는데 왜 네가 캐빈 오빠 유산을 받았냐고 따지러 온 거 아니니까. 진짜야. 난 이제 됐어. 캐빈 오빠 그렇게 되고, 우리 아빠도 그렇게 되고나서 너무너무 힘들었는데 이제 괜찮아.”
어린아이 같은 수연의 모습에 유빈은그만 웃어버렸다. 언뜻 캐빈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수연과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다고 했던 캐빈의 말이 생각났다.
수연이 불쑥 물었다.
“그때 내가 피어싱했던 거 이제 다 아물었지?”
유빈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수연에게 피어싱 당한 후에 창식에게 문신 바늘로 유린당했던 유두는 아직도 스트레스 받을 때면 쿡쿡 쑤셔왔지만 구태여 괜찮지 않다는 말을 해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수연에게 꼭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작년 캐빈 기일 어떻게 보냈어요?”
캐빈의 이름을 듣자 수연의 어깨가 떨려왔다.
“어떡해. 나 안 괜찮은가 봐.”
기억을 반추하던 유빈이 삐삐를 서랍에 넣고 현재로 돌아왔다. 휴대폰이 울렸다. 팬텀 유통과 프로텍의 합병을 추진하는 태스크 포스 팀(Task Force Team)을 이끌고 있는 팬텀 유통 박 대리님이었다.
메시지의 내용은 해직된 김덕기 상무가 복직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소송도 불사하겠다며 회사를 들쑤시고 다니는 통에 업무에 지장을 받을 정도라고 했다.
유빈이 단호하게 답장했다.
- 복직 불가라고 하세요. 우리 회사는 사내 성추행범 안 받아 줘요.
바로 답장이 도착했다.
- 회장님을 꼭 만나야겠다고 합니다. 자기는 회사에서 성추행을 한 적이 없다고 계속 잡아뗍니다.
덕기가 저지른 성추행의 피해자가 바로 유빈이었다.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피하지 않기로 했다. 일정을 확인하고 답장했다.
- 모레 2시 30분에 프로텍 회장실로 오라고 하세요.
- 네. 회장님. 아참, 영업1팀 대마법사 황우현 대리 기억하세요? 다음 달에 결혼한다고 합니다. 회장님을 깊이 연모했다고, 꼭! 전해달라고 하네요. 제 친구지만 무슨 말 하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
유빈이 웃으며 답장했다.
- 황 대리님 신부님을 위해서 제가 결혼식에 가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결혼 축하한다고 꼭! 전해주세요.
박 대리님께 답장을 보내고 컴퓨터를 보니 사내 메신저로 메시지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 유빈아 나 살려줘. 꼭대기 층 3번 탕비실.
유빈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을 눌렀다. 펜트하우스와 던젼은 철거되었고, 그 공간은 프로텍 직원들의 휴게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직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추가로 탕비실을 갖추고, 야근이 잦은 프로텍 업무의 특성을 고려해 수면실도 마련됐다. 작은 탁구장과 당구장, 기원(棋院)도 들어왔다. 100원으로 이용할 수 있는 코인노래방 기계도 설치되었다.
반응은 뜨거웠고, 이제 막CEO로서 첫발을 내딛은 유빈이 사원들 사이에서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
탕비실로 들어가자 커피잔을 들고 있는 필문이가 보였다.
“에이 민유!”
유빈이 황급히 탕비실 문을 닫으며 필문이에게 핀잔을 줬다.
“쉿!, 여기 회사야. 너 나랑 친한 거 들키면 너한테도 안 좋고 나한테도 안 좋아.”
필문이가 입을 삐죽거렸다.
“지나가는 사람 아무도 없었어.”
“그런데 왜? 살려달라더니 잘 살아 있네.”
“민유민유, 나 제발 다른 부서로 옮겨주라. 응? 경영지원팀 팀장님 일 중독 마녀야. 이러다가 나 골병이 들어서 병든 뼈를 회사에 묻어야 될 것 같아. 나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도 회사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함이 없겠지만, 그래도 부서만 옮겨주라. 응?”
유빈이 필문이를 달래 듯 대답했다.
“친구야. 우리 이제 그런 회사 아니야. 회장이라고 마음대로 인사이동하고, 그런 거 안 돼. 인사 관련 문의는 1차적으로 인사과에 하면 그 다음에 절차 거쳐서 심사하는 거야.”
필문이의 입이 조금 전보다 두 배는 더 튀어나왔다.
“동기 사랑?”
“나라 사랑. 이따 술 살게. 퇴근 몇 시야?”
“10시 넘어야 될걸?”
“11시에 족발에 소주. 콜?”
“콜!”
<스토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