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68. 도깨비
며칠 뒤, 살수를 만난 창식이 준비해 둔 먹이와 미끼를 던졌다. 5만 원권 지폐가 가득 담긴 가방을 보며 살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창식이 그 위에 살수의 사진이 들어간 주민등록증과 여권을 올려놓았다. 신분증. 무국적자인 살수에게 딱 맞는 미끼였다.
주민등록증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여권을 열어 자신의 것이 맞다는 것을 확인한 살수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창식을 쳐다보았다.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지만 오로지 자신에게만 없는 그 두 장의 카드 때문에 살수는 수십 년의 세월을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한 마리의 동물로 취급되는 삶을 살아야 했다.
창식이 살수의 주민등록증과 여권을 다시 챙겨 자신의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이 돈은 지금 가져가. 평생 굶을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주민등록증이랑 여권은 일이 다 처리된 다음에 줄게.”
살수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목표가 누구인가요?”
창식이 살수에게 4장의 사진을 내밀었고, 익숙한 얼굴들에 살수가 자신감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식이 캐빈의 사진을 짚으며 말했다.
“이 자는 특별히 잔인하게 죽여. 천천히, 죽음의 고통을 느낄 수 있게.”
* * *
살수는 가장 쉬운 목표물부터 제거했다. 동선이 단순하고 신체 능력이 떨어진 밀환은 집 앞 어두운 골목에서 만난 살수의 칼에 별다른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밀환에게 내지른 살수의 칼끝에는 지난날 자신을 이용하고 팽한 데에 대한 복수심이 서려 있었다.
다음 목표물은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했다. 이미 태식을 죽이는 것을 한 번 실패한 경험이 있는 살수는 창식에게 받은 돈으로 플라스틱 갑옷을 맞춰 입고 헬멧을 썼다.
늦은 밤 엘리베이터에서 칼을 뽑아 든 살수에게 태식이 주먹을 내질렀지만 단단한갑옷에 막혀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태식의 손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태식의 발차기를 피한 살수가 태식의 옆쪽에서 칼을 꽂았다. 엘리베이터 안에 태식의 피가 낭자했고 살수는 유유히 빠져나갔다.
창식이 특별히 잔인하게 죽여 달라고 했던 타겟을 위해 두 번의 작업 후 무뎌진 칼을 갈았다. 캐빈의 동선은 불규칙했고, 요즘 들어서는 집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앞선 두 인물의 살해 소식을 접하고 조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살수는 오랜 경험으로 다져진 끈기를 발휘하며 치밀하게 캐빈의 주위를 살피며 차분하게 기다렸다.
며칠 뒤 이른 아침, 말끔한 양복 차림의 캐빈이 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유빈이 따라 나왔다. 살수는 하늘이 돕는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 타겟과 네 번째 타겟이 동시에 눈앞에 나타났다. 캐빈과 유빈이 자동차 옆에 서서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 재판 잘받고 올게. 아마 무죄 나올 거야.”
“나도 같이 가요.”
“넌 그냥 집에서 쉬어. 아직 몸도 완전히 회복 안 됐잖아.”
“그래도 나 때문에 받는 재판인데 어떻게 혼자 보내요.”
“정말 괜찮아. 너 밖에 나오면 위험할 수도 있단 말이야. 며칠 전부터 지밀환 교수님이랑 메이페어가 연락이 안 돼. 왕창식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 수도 있어. 집에 안전하게 들어가 있어.”
“왕창식 때문에 위험한 거면 나만 위험한 게 아니잖아요. 달링이 더 위험해요.”
유빈의 말이 맞았다. 전봇대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살수가 순식간에 칼을 빼 들고 캐빈의 뒤에서 쇄도해 들어갔다. 척추를 기준으로 왼쪽 어깨 조금 아래에 칼이 꽂혔다 뽑혀 나왔다. 살수는 자신의 솜씨가 만족스러웠다.
폐를 관통당하고 심장으로 향하는 대혈관이 찢어진 캐빈은 소생하기 힘들었다. 곧 호흡이 곤란해지고 터진 혈관에서 쏟아지는 피가 내부의 장기들을 하나하나 압박해 들어갈 것이었다. 몸 안의 혈액이 점점 부족해지다가 생존에 필요한 양 이하로 떨어졌을 때 캐빈은 사망할 것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일 것이었다. 그 시간 동안 살수는 유빈을 처리하고 창식이 의뢰한 대로 캐빈이 죽음의 고통을 느낄 수 있게 캐빈의 몸을 난도질할 생각이었다. 이 일만 마치면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목숨으로 자신의 주린 배를 채워야 하는 이 지긋지긋한 삶도 끝이었다. 창식에게서 받은 돈과 여권을 들고 해외로 도망쳐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계획이었다.
캐빈을 뒤로한 살수가 유빈에게 접근했다. 유빈은 도망치려고 했지만 얼마 못 가 살수에게 어깨를 잡히고 담벼락으로 몰아붙여 졌다. 살수가 유빈에게 칼을 뻗으려는 순간 총소리가 울렸다.
살수의 뒤통수에 명중한 총알이 머리를 관통하고 코를 중심으로 얼굴 정면에 주먹만 한 구멍을 낸 뒤에야 유빈의 눈앞에서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유빈의얼굴이 살수의 피와 뇌척수액으로 뒤덮였다. 살수가 쓰러지자 총을 쥐고 열린 자동차 문에 힘겹게 기대어 서 있는 캐빈의 모습이 보였다.
유빈은 얼굴에 묻은 액체들을 닦아낼 겨를도 없이 캐빈에게 달려갔다.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캐빈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려고 할 때 캐빈이 덥석 유빈의 손을 잡았다.
“내가 준 삐삐 메시지 꼭 확인해.”
캐빈의 몸이 축 늘어지더니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 * *
경찰의 추적을 피해 조용한 시골 마을로 차를 몰고 간 창식이 냇가 옆 구멍가게에 들러 빵과 우유를 샀다. 차로 돌아와 운전석에 앉은 창식의 손에는 가게 앞에붙어 있던 수배 전단지가 들려 있었다. 절도범과 사기범 사이에 살인범 창식의 얼굴이 들어가있었다.
빵 봉지를 뜯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텁텁했다. 조금 신맛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봉지를 살펴보니 유통기한이 지나있었다. 입에 문 빵을 질겅질겅 씹다가 느껴지는 역한 맛에 창문을 열고 뱉었다. 유통기한이 하루 남은 우유도 남은 빵과 함께 창문 바깥으로 버렸다.
프로텍 경영권자로 살아가던 창식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도망자로서의 삶은 견디기 힘들었다. 차라리 서울로 돌아가 법적으로 대응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켜져 있던 내비게이터에서 자신의 뉴스가 나왔다.
“(……) 오늘 아침 경찰이 도주 중인 연쇄 살인 용의자 왕 모 씨의 개인 컴퓨터를 압수수색하여 분석한 결과 피해자들의 구체적인 신원과 살해 방법, 사체 유기 장소 등이 담긴 파일을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한편, 용의자 왕모 씨는 국내 굴지의 IT 대기업의 차기 후계자였던 것과, 왕 모 씨가 현재 입원 중인 부친까지 살해하려고 시도했다는 정황이 포착되어 충격을 더하고 있습니다.”
서울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가게 앞에서 가져온 전단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사는 벌레 같은 인간들사이에 자신의 얼굴이 끼어 있었다. 높은 곳에서 바닥을 기어 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봐야 할 자신이 그 바닥에 눕혀져 짓밟히고 있었다.
세상이 잘못되었다. 자신은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프로텍을 손에 넣기 위해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지옥 같은 대학원 생활과 후계자 수업을 견디고, 캐빈에게 프로텍을 넘기려던 아버지의 약을 바꿔쳤다. 유빈을 얻기 위해 욕망을 참으며 10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을 때 마지막 순간, 캐빈이 모든 것을 망쳐 놓았다. 결국 프로텍도, 유빈도 가질 수 없었다.
역시 노력하면 원하는 걸 가질 수 있다는 어렸을 때 들었던 아버지의 말씀은 거짓말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원하는 걸 가질 수 없는 세상은 창식에게는 의미 없었다.
서울이아닌 두 번째로 생각해 놓은 행선지가 좋을 것 같았다. 뒷좌석으로 손을 뻗어 어제 사놓은 번개탄을 꺼내고 꼼꼼하게 창문을 닫고 자동차의 환풍 기능을 차단했다. 번개탄에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차 안에 퍼지고 조금씩 정신이 흐려져 갔다.
내비게이터에서는 다음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안타까운 소식 전해드립니다. 방금 한 IT 대기업의 후계자가 자신의 부친을 살해하려 시도했다는 뉴스 전해드렸습니다. 입원 치료를 받던 회장님, 그러니까 피해자이자, 피의자의 아버지 되시는 분께서 지난주에 병원에서 돌아가셨다는 뉴스가 방금 저희 데스크로 들어왔습니다. 구체적인 사망 경위 및 아들의 살해 시도가 사망 원인이었는지, 추가적인 살인 기도가 있었는지는 잠시 후에 후속 보도 통해 전해드리겠습니다.”
”연이은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최근 서울 도심에서 발생한 연쇄 흉기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앞서 지 모 교수, 이 모 회사원을 살해한 이 용의자는 모 유통업체 대표 왕 모 씨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총을 맞고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경찰 측은 전해왔습니다. 용의자와 사투를 벌인 왕 모 씨는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과다출혈로 사망했습니다. (……)”
창식은 길동무들이 많은 게 마음에 들었다. 다음 생에는 반드시 자신이 저 자들의 아버지로, 형으로, 교수로 태어날 거라고 다짐했다. 숨쉬기가 힘들어지고 정신이 흐려졌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벌써 자신이 원하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다음 날 도로에 설치된 카메라를 따라 창식을 추적해 온 경찰들이 창식의 자동차 창문을 깼다. 뿌연 연기가 걷히고 나자 청록색으로 변해 잔뜩 부풀어 있는 창식의 얼굴이 드러났다. 청록색 바탕에 수없이 찍힌 붉은색 일혈점들은 창식을 마치 전설 속의 도깨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