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67. 파국 준비
캐빈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뭔데? 지금 어제 서울 못데 아이스링크가 통째로 대관된 이상한 흔적을 찾았어. 조금만 기다려봐.”
“그것보다 이걸 먼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진짜 급해요.”
태식이 캐빈에게 보여준 것은 사람들의 관심사를 알아내기 위해 여러 SNS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사용자가 설정한 조건에 맞는 글이 올라오면 자동으로 스크랩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태식은 그 프로그램이 단시간에 유사성이 높은 글 여러 개가 동시에 올라오면 글 뭉치로 스크랩하도록 설정해놓고, 퇴근 후에 머리를 식힐 겸 스크롤을 내려보곤 했었다. 주로 뉴스나 유머 글이 스크랩됐지만, 방금 스크랩되어 올라온 글 뭉치는 달랐다.
같은 장소에서 동시에 5편의 개인 라이브 방송이 송출되고 있었고, 같은 장면을 촬영한 십여 편의 동영상과 셀 수도 없는 사진들이 올라왔다.
그 장면의 가운데에는 유빈이 있었다.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는 캐빈과 태식을 보고 밀환도 호기심이동했는지 태식의 노트북으로 다가와 화면을 보았다.
화면 안의 유빈은 클럽에서 무언가에 홀린 듯 춤을 추고 있었지만 언뜻언뜻 비추는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볼에는 마른 눈물 자국이 그려져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유빈이 그 많은 클럽 안의 사람들 앞에서 팬티만 입고 나체로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이었다. 영상에는 잘 잡히지 않았지만 팬티 뒤에 무언가 달려 있는 것 같은 장면도 보였다.
캐빈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이거 라이브 영상이지? 위치! 위치 빨리 불러.”
태식이 허둥대며 마우스를 잡고 라이브 방송이 송출되고 있는 위치를 추적했다.
“여기서 가까워요! 홍대 Nbefore 클럽이요.”
캐빈이 자동차 열쇠를 쥐고 뛰쳐나갔고, 태식이 그 뒤를 따랐다. 잠깐 고민하던 밀환도 황급히 수정하던 문서의 저장 버튼을 누르고 따라 나갔다.
클럽에 들어선 캐빈이 경악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해치고 유빈이 있는 스테이지로 달려갔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코트를 들어 유빈에게 입히려고 했을 때 유빈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캐빈은 유빈이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스테이지 가장자리에 창식이 리모컨을 들고 서 있었다.
캐빈이 뒤따라온 태식에게 소리쳤다.
“메이페어! 저 새끼 잡아! 절대 놓치지 마.”
상황이 예상치 못하게 돌아가자 창식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창식이 앞서고 태식이 그 뒤를 쫓으며 계단을 오르고 내려 클럽 입구에 도착했다.
창식은 입구를 통과했지만, 창식이 유빈과 클럽을 즐기는 동안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기 위해 약간의 뒷주머니를 챙겨 주었던, 클럽 입구를 지키고 있던 남자들이 태식을 가로막았다.
“부회장님!”
창식이 자신을 부르는 태식을 슬쩍 뒤돌아보더니, 더 이상 쫓아올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그 앞을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타고 사라졌다.
태식이 클럽 안으로 들어가려고 돌아섰을 때 유빈을 코트로 감싸 들어 안은 캐빈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유빈의 얼굴은 여전히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고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창식이 도망치기 직전 최고 출력으로 켜 놓은 딜도와 플러그가 작동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캐빈이 자신을 노려보는 경비원들을 어깨로 툭툭 밀치며 밖으로 나왔다. 클럽 바로 앞에 주차해둔 차 뒷좌석에 유빈을 눕히고 딜도 팬티를 벗겨주었다. 애널 플러그도 뽑아주려고 했지만 유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난번 애널 플러그를 뽑았을 때 대변과 피가 튀어 올랐던 것이 생각났다. 캐빈의 차에 그런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유빈을 가장 힘들게 했던 전기 딜도 팬티는 벗겨졌고, 플러그의 진동 정도는 잠깐 동안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캐빈은 유빈에게 코트를 덮어주고 멀리 떨어져 서 있던 태식에게 가 내일 밀환과 같이 다시 자신의 집으로 와달라고 부탁했다. 차로 돌아와 운전석에 앉아 엔진을 켰다. 뒷좌석에서 유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요.”
* * *
다음 날 프로텍 부회장실로 돌아온 창식은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절망하고 있었다. 회사는 어느 부서 하나 제대로돌아가는 곳이 없었고 며칠 동안 처리하지 않은 업무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바쁘게 움직여야 했지만 또다시 유빈을 놓쳐버린 절망감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늦은 저녁 시간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었지만 뭐 하나 제대로 처리된 일이 없었다.
기계적으로 읽지도 않은 결재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을 때 직원 한 명이 부회장실 문을 노크했다. 다급했는지 한 번의 노크가 더 이어졌다.
창식이 펜을 놓고 대답했다.
“들어오세요.”
부회장실까지 뛰어 올라왔는지 직원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부회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회사 밖에 경찰들이 부회장님을 체포하겠다고 떼로 몰려와 있어요. 체포영장까지 들고 왔습니다. 죄목이 연쇄살인이랑 존속살인이라고 하던데,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습니다. 일단 피하시는 게 어떨까요?”
창식이 펜을 다시 들어 부러질 듯 움켜쥐었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일단 나가보세요. 경찰들 이곳까지 못 올라오게 막아주시고요.”
“네. 부회장님.”
짧게 대답한 직원은 올라올 때만큼이나 급하게 내려갔다. 창식의 머릿속에 수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일단은 몸을 피하는 게 우선이었다. 집무실에서 약간의 물건들을 챙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비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직행했다.
좋아하는 차 문을 열었다가 다시 잠갔다. 경찰이 자신을 쫓고 있다면 자신의 이름으로 등록된 차를 타는 건 위험했다.
유빈을 데리고 다닐 때 썼던 차명 차량에 올라타 급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무사히 경찰들을 따돌리고 프로텍을 빠져나와 한 시간 정도 목적지 없이 달리다가 한적한 도로의 갓길에 정차했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생각에 잠겼다. 새벽에 있었던 일부터 차근차근 되짚어 보았다. 클럽 스테이지에서 모두가 우러러보는 가운데 유빈에게 펠라치오를 받을 절정의 순간 직전에 캐빈이 나타났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또다시 유빈을 빼앗아 갔다.
게다가 그 일이 있은 후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경찰들이 체포영장을 들고 나타났다. 죄목이 연쇄살인과 존속살인이라고 했다. 잘 감췄다고 생각했는데 들켜버린 것 같았다.
클럽에 나타난 캐빈과 갑작스럽게 출동한 경찰, 두 사건이 관련 없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결국 또 캐빈 때문에 모든 일을 그르치고말았다.
캐빈을 살려둘 수 없었다. 아니 오래전에 제거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다. 어렸을 때 사사건건 자신을 통제하고, 가르치려고 들 때부터 없애버렸어야 했다.
밀환도 같이 죽이기로 했다. 때로는 아버지의 친구라는 명목으로, 때로는 스승이라는 명목으로 창식을 훈계하고 창식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멋대로 정했다. 그리고 어제 클럽에서 나오면서 그 앞을 서성이고 있던 밀환을 분명히 목격했다. 체포영장의 뒤에는 밀환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그리고 한 명 더. 계속해서 유빈의 주위를 파리처럼 맴돌면서 어제는 캐빈의 편에서 자신을 추격하기까지 했던 태식도 같이 처리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유빈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아무도 가질 수 없어야 했다. 특히 캐빈이 가져서는 안 됐다.
캐빈이 유빈과 같이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쓰라려 왔다. 가장 깔끔한 방법은 유빈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면 캐빈뿐만 아니라 아무도 유빈을 가질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사람들의 목록을 정리한 창식이 충실한 종복이 된 살수에게 전화했다. 살수를 다루는 방법은 간단했다.
약간의 돈, 그리고 이번엔 실수해서는 안 되는 큰일을 맡기는 만큼 그가 평생 소원해왔을 조금 특별한 것도 미끼로 던지기로 했다.